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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25)화 (125/181)
  • 125화 

    【 협력자 】

    이제 더는 나와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해 묻어두었던 일이 어느 순간 수면 위로 떠오를 때가 있다. 상처의 원인을 파악할 새도 없이 고통만 느껴질 때가.

    어제가 그런 경우였다.

    - 이쯤 되니 네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궁금해질 지경이구나.

    린처가 날 스쳐 지나가기 직전, 나는 분명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의 상처받은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나를 괴롭히던 이상한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가 닮은 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과거의 나였다는 사실을.

    - 이런 점수로 웃음이 나오니?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십니까?”

    오래전에 들은 목소리를 떠올리던 내가 그 질문에 번뜩 고개를 들었다.

    뢰드그뢰드는 나의 부자연스러운 태도에 놀란 듯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내게 왜 그러느냐고 묻는 것같이 느껴져서, 나는 제 발 저린 사람처럼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아뇨… 맛있네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꽤나 허술한 대답이었다.

    나는 머쓱하게 눈을 돌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포크로 걸레짝을 만들어 놓은 팬케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이게 언제 이렇게 됐지?

    민망함을 숨기고 애써 태연한 척 팬케이크를 포크로 찍었다. 하지만 이미 곤죽이 되어 있는 그것은 차라리 포크를 스푼 삼아 떠먹는 게 더 편했다.

    팬케이크라고 했지만 아침 식사용으로 나온 음식이니만큼 그 맛과 식감은 담백한 부침에 가까웠다.

    단맛 없는 팬케이크라니, 그야말로 외국! 이라는 느낌이구나. 이 정도 일에 이국의 향취를 느끼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괜한 태클을 걸고는 접시 한쪽에 곁들여진 감자 샐러드를 한 입 크게 넣었다.

    그러나 담백한 팬케이크에 감자 샐러드 조합은 간이 조금 심심한 것 같았다.

    원래 이렇게 먹는 게 맞나?

    고개를 갸우뚱하며 바움쿠헨 사람들의 입맛에 대해 고찰하던 내 눈에 린처가 소시지를 베어 무는 모습이 들어왔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나는 곧바로 그를 따라 소시지를 입으로 가져갔다. 확실히 소시지와 함께 먹으니 간이 맞긴 했다.

    하지만 이 소시지 맛없어.

    음식 알레르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반찬 투정하는 어린애도 아니니 웬만한 것은 다 맛있게 먹는 나였지만, 이 소시지에 들어 있는 향신료는 생전 처음 먹어보는 요상한 맛이었다.

    “그럼 잠자리가 바뀌어 피곤하신 모양이군요.”

    내가 차마 얼굴을 펴지 못하고 우물거리던 그때, 뢰드그뢰드가 넘어가 주겠다는 듯한 말을 하고 식기를 내려놓았다.

    이제 와서 향신료가 별로네요, 같은 말을 하긴 늦었겠지.

    나는 대답 대신 린처를 쳐다보았다. 평상시처럼 식사하던 린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그릇에 집중했다.

    그는 아침 내내 그런 식이었다. 어제 일 때문에 아직도 나를 대하는 게 불편한 것 같았다.

    “…….”

    아무래도 화기애애한 식사는 진작 물 건너간 모양이로군.

    내가 린처에게서 눈을 떼고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크레페 님.”

    뢰드그뢰드가 다시금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자, 뢰드그뢰드가 자못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부담이 될까 봐 말하지 않고 있었습니다만, 크레페 님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귀족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우움.”

    아직 입 안에 음식물이 남아 있었기에 나는 애매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뢰드그뢰드는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가 헛기침을 해 표정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크흠. 한낱 후작에 불과한 제가 아펠 슈트루델 전하의 청을 언제까지나 무시하고 있을 순 없다는 말입니다.”

    “…….”

    내가 음식물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아펠이 절 돌려보내 달라고 하던가요?”

    “…그것을 갖다 주게.”

    뢰드그뢰드는 내게 바로 대답해 주는 대신 보좌관을 불러 뭔가를 지시했다.

    그는 보좌관이 자리를 비운 동안 냅킨으로 입을 닦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보좌관에게 손짓했다.

    “국상을 끝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태자가 함부로 타국에 방문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의 보좌관이 내게 편지를 내밀었다. 한 번 뜯어진 흔적이 있는 그것은 본래 슈트루델 황가의 인장으로 봉해져 있었다.

    “열어보시길.”

    뢰드그뢰드의 제스처에 따라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몇 줄 되지 않는 짧은 서신이었기에 읽는 건 금방이었다.

    “이건…….”

    내가 곧바로 얼굴을 굳혔다.

    찍혀 있던 것은 분명 황가의 인장이었으나, 편지를 쓴 건 아펠이 아니었다.

    [제 막냇동생이 플뢰데 후작가에서 신세를 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타국의 귀족에게 과한 폐를 끼치는 것 같으니 제가 곧 그곳에 들러 동생을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갈레트 드 루아 쉬제트.]

    “황가의 인장이 포함된 서신이니 어떤 의미인지는 아시겠지요?”

    뢰드그뢰드가 짧게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입술을 다물었다. 뢰드그뢰드는 처음부터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다행히 정확한 일시가 표기되어 있지는 않더군요. 저는 오늘 직접 슈트루델의 황궁으로 가 태자 전하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어볼까 합니다. 시간을 많이 벌 수는 없겠지만 임시방편은 되겠지요.”

    “…….”

    내가 이곳에 도착한 지 겨우 하루 이틀 지난 시점에 편지까지 도착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아펠이 시간을 그리 많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그 이유는 내가 그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안의 위중함을 생각하면 갈레트가 공간 이동용 리시버를 해킹해 당장 쳐들어오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 내가 황궁으로 돌아가게 되면 이번에야말로 감옥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는 죄인 신세가 되겠지?

    “으으!”

    원작 뺨치게 꿈도 희망도 없는 그림을 상상하다 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창 진지하게 이야기하던 뢰드그뢰드의 표정이 묘하게 구겨졌다.

    “…아무튼, 일이 그렇게 됐으니 저는 바로 슈트루델로 출발할 채비를 하겠습니다. 부디 크레페 님께서도 현명한 판단을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말로는 부탁이었지만 반쯤은 위협에 가까울 것이다. 그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뢰드그뢰드는 구태여 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보좌관도 내게 서신을 도로 받아 나갔다. 어제 그랬듯이 디저트가 나오기도 전이었다.

    둘만 남게 된 식사 자리에서 린처와 내가 반사적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린처가 어색하게 목을 가다듬고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럼 저도 잠시…….”

    그때 하녀, 카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린처를 보고 앞서 물었다.

    “치울까요?”

    “아, 아니.”

    그대로 자리를 피하기엔 어색한 타이밍이었기에 린처는 얼떨한 표정으로 다시 앉고 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

    날 불편해하는 게 어찌나 잘 보이던지, 내가 더 민망할 정도였다.

    “크흠. 드시지요.”

    집주인인 뢰드그뢰드가 없는 자리에서 린처가 대신해 말했다.

    나는 눈짓으로 가볍게 약례한 후 곧바로 포크를 세웠다.

    접시 위에 놓인 그것은 내 손보다 조금 작고 동그란 와플이었다. 함께 나온 휘핑크림이나 과일은 없었고, 그 위에는 슈거 파우더조차 뿌려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겉에 은은한 광택이 도는 걸 보니 반죽에 설탕이 이미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그 추측을 증명이라도 하듯 포크 끄트머리가 닿은 표면은 설탕 과자처럼 살짝 단단했다.

    포크로 눌러 자르자 코팅이 바스러지는 바삭 소리와 함께 조각이 부드럽게 나뉘었고, 단면에는 눌어붙은 캐러멜처럼 엉긴 투명한 실이 생겼다.

    벌써부터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카미가 다가와 컵에 우유를 채워주었다.

    나는 더 잴 것도 없이 와플 조각을 입에 넣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폭신한, 겨울철 스낵으로 먹을 만한 따끈따끈한 온도의 부드러움이 혀를 감쌌다.

    식감은 치즈케이크처럼 무거우면서도 달았고 버터 향 역시 진했다.

    그래, 이거지!

    신나게 호들갑을 떨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옆에 있던 우유 잔을 들었다. 한 모금 크게 들이켜자 조밀한 입자 사이로 우유가 스며들어 묵직한 맛이 한층 더해졌다.

    거기에 고소함과 단맛까지…….

    “크으! 여기 우유 한 잔 추가요!”

    우유를 막걸리처럼 원샷한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외쳤다.

    내 목소리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린처가 이내 픽 웃음을 터뜨렸다.

    * * *

    게 눈 감추듯 디저트를 마저 해치운 나는 곧바로 방으로 돌아와 창문을 내다보았다.

    내 방은 서재와 똑같은 2층에 있었지만 창문이 난 방향은 달랐기에, 서재에선 뒷문만 보였던 것과 달리 이곳에선 정문을 볼 수 있었다.

    뢰드그뢰드는 막 출발하려는 듯 마차를 기다리며 얇은 장갑을 손에 끼우고 있었다.

    배웅을 나간 린처가 뭐라 입술을 달싹이는 것도, 그 말을 들은 뢰드그뢰드가 와락 인상을 구기는 것도 보였다.

    그때 건물 뒤편에 있던 듯한 마차들이 줄지어 모습을 드러냈다.

    뢰드그뢰드는 곧바로 맨 앞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다음 마차에는 보좌관이, 또 그다음에는 그들을 호위하기 위한 플뢰데 후작가의 기사들이 탑승했다.

    갑작스러운 외출치고는 화려한 행렬이었다.

    물론 그것을 구경이나 하려고 지켜본 건 아니었지만.

    “후우…….”

    짧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도망칠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치마를 걷어 올렸다. 그러고는 족쇄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마법진이 새겨진 부분을 찾았다.

    보기 힘든 안쪽이긴 했지만 다행히 금속 틈새로 마법진의 생김새를 대충 볼 수는 있었다.

    이쪽은 마나 흐름 차단이랑 억제, 저건 위치 감지용인가?

    음, 해체 알람은 따로 설정되지 않은 것 같군.

    그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왼쪽 손목의 팔찌를 감싸 쥐어 마구를 발동시킨 후 족쇄에 달려 있던 자물쇠를 가볍게 끊어버렸다.

    철커덕.

    “됐다.”

    슈트루델의 감옥 탑에서 이미 비슷한 짓을 했던 나는, 내게 마나 억제용 도구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탈옥범처럼 비장하게 혼잣말을 하며 족쇄마저 끊어버린 그때,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레이디 크레페?”

    아침 식사를 하는 내내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던 린처의 목소리였다.

    “자, 잠깐만요!”

    나는 허둥지둥 족쇄를 다시 채워보려 했지만 깔끔하게 끊어진 쇳덩이가 도로 붙을 리 만무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침대 밑에 족쇄와 자물쇠를 밀어 넣고 옷을 털어 치맛단을 정리했다. 다행히 발목은 넉넉히 가려지는 기장이었다.

    “크흠, 무슨 일이시죠?”

    나는 목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내 반응이 어색해 보였을 법도 한데, 린처는 그에 대한 언급 없이 자신의 용건을 밝혔다.

    “서재에 가려는 길입니다만, 레이디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아, 저는…….”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면 억지로 강요하진 않겠지?

    그런 계산으로 반사적인 대답을 꺼내려던 와중, 문득 떠오른 의문에 말을 멈췄다.

    그러고 나서 내가 도망치면? 린처는 어떻게 되는 거지?

    - 미련한 놈!

    나는 순간 환청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몸을 퍼들거렸다. 하지만 역시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어젯밤에 들은 그 호통 소리를 떠올리자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

    “…네, 같이 가요.”

    결국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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