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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24)화 (124/181)

124화 

린처는 방해하지 않겠다던 자신의 말마따나 곧바로 서가에서 책을 한 권 꺼내 앉았다. 중간부터 펼친 것을 보니 이미 한창 읽던 책인 것 같았다.

“…….”

나는 잠시 말없이 그가 책을 읽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재에 안내해 달라고 먼저 말한 건 나였지만 간섭 하나 없는 지금 상황이 내심 어색했기 때문이다.

날 감시하러 온 게 아닌가……?

여러모로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크흠.”

괜히 헛기침을 하고 서재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2층이었지만 뛰어내리기엔 충분했고, 창문은 책의 변색을 막기 위해 테이블 쪽에만 나 있었다. 린처가 앉은 뒷자리 말이다.

물론 이 건물에서 정원을 지나 정문으로 나가기까진 적잖은 방해가 있겠지만…….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지, 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 우려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뢰드그뢰드는 내 발목에 채워진 구속구와 저택 내의 경비를 굳게 믿고 있는 듯 보였으니까.

우락부락한 기사들 대신 카미 한 명만 내게 붙어 있는 걸 보면 말이야.

그럼에도 문제가 있다면, 이곳에 내 편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비상시 어디로, 어떻게 몸을 피하면 좋을지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그래서 서재에 들어온 거지만.

나는 걱정을 애써 외면하고 책장 뒤로 향했다.

내가 찾고 있던 책이 코앞에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내 도주 계획에 큰 도움이 될 만한, 지리에 관한 판본이.

나는 엄마가 잠든 사이에 몰래 컴퓨터를 하러 나온 아이처럼 긴장한 눈으로 린처를 곁눈질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책을 읽는 데 신경이 쏠린 것 같았다.

더 망설이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서 최대한 태연하게 지리서를 펼쳤다.

대륙에서 제국이라는 호칭을 붙일 만한 나라는 슈트루델과 바움쿠헨뿐이었다.

둘은 지리적으로도 붙어 있었는데, 슈트루델을 중심으로 북서쪽에 인접해 있는 큼지막한 나라가 바로 바움쿠헨 제국이었다.

그중에서도 플뢰데 후작령은…….

나는 책 위에 손가락을 짚고 바쁘게 눈을 움직이며 이곳의 위치를 찾았다.

바움쿠헨의 영토 중에서는 동쪽 언저리, 미개척지인 변방 중심으로는 서쪽.

카미가 변방에서 거둬진 고아라는 얘기를 듣고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실제로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

아빠가 있는 변방과.

“실례하겠습니다.”

카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화들짝 놀란 나는 지리서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후, 손에 잡히는 책을 아무거나 꺼내 들고 린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가 쿠키와 비스킷, 사브레 따위를 테이블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함께 마실 차와 따끈히 데운 우유 주전자도 한쪽에 놓였다.

“고맙다. 나가 있어도 돼.”

린처의 말이 끝나자 카미가 다시 문밖으로 나갔다.

내가 말없이 린처를 응시하자 그가 곧 시선을 눈치채고 당황한 얼굴을 했다.

“아, 지금은 레이디 크레페의 시중을 들고 있었지요? 제가 멋대로 지시한 게 실례가 됐겠군요.”

“친한 하녀인가요?”

“아뇨, 친하다고 할 만큼의 교류는 없습니다.”

“그럼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전부 기억하실 만큼 사려 깊은 성격이신가 보군요.”

내가 미소를 지으며 찻잔에 우유를 따랐다. 은은한 베르가모트 향이 서재를 가득 채웠다.

“그렇다기보다는… 오래전부터 저택에서 일해 온 아이라 눈에 익은 것뿐이죠.”

린처의 대답에 내 손이 멈칫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부정이 겸손이라고 생각했다. 카미가 평민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나도 쉬제트 백작가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자주 마주치는 몇 하녀와 기사, 에이미 정도의 책임자급 되는 이들의 이름을 알 뿐이지.

더군다나 평민이라면, 아마 카미가 린처나 뢰드그뢰드 후작 같은 직계 가족들의 시중을 든 적은 손에 꼽힐 것이다.

“그래도 대단하세요.”

“정말 사소한 일입니다. 오히려 레이디께서 저를 좋게 봐주시니…….”

“그럼 됐고요.”

내가 곧바로 말을 잘랐다.

린처는 갑자기 제 말을 끊을 줄 몰랐다는 듯 잠시 당황했으나, 곧 내 눈치를 본 후 다시 읽던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

나는 말없이 손을 뻗어 함께 나온 쿠키를 베어 물었다. 쿠키 겉에 뿌려진 설탕의 까끌까끌한 감촉이 혀에 느껴졌다.

아몬드 파우더를 넣은 듯 고소한 맛과 코를 간질이는 버터 향.

바삭거리는 소리에 귀까지 즐거운, 이것은 분명 훌륭하기 그지없는 디저트였으나 나는 어쩐지 순수하게 그 맛을 만끽할 수가 없었다.

이건 무슨 기분이지?

* * *

“정원 관리가 안 되어 있어서 부끄럽군요. 제가 이런 쪽에 소양이 부족해서 말입니다.”

이유 모를 저기압 상태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하지만 린처는 대놓고 면박을 준 내게 싫은 소리 한마디 없이 저택 이곳저곳을 안내해 주었다.

“아버님께서 저택 내부의 일까지 신경 쓰기엔 너무 바쁘시거든요. 외교 업무에 영주 일에, 조금 여유가 난다 싶으면 몬스터 토벌에도 종종 나가실 정도니까요. 저도 이제 스물둘이니 조금은 업무를 분담해 주셔도 좋을 텐데…….”

내가 대꾸하지 않아도 먼저 이런저런 정보를 떠먹여 주니, 한편으로는 린처가 자상한 건지 호구인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럼 저보다 두 살 많은 건가요?”

“아, 그렇겠군요.”

한참 듣기만 하다가 한 마디 묻자 린처는 눈을 접어 웃었다. 하지만 나는 마주 웃어준다거나 하는 마땅한 반응 없이 메마른 정원으로 눈을 돌렸다.

어른스러운 태도 때문에 젤라토 또래 정도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카눌레보다도 어린 나이였다니.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새삼 어린아이를 상대로 화풀이를 한 것처럼 양심이 찔렸다.

“크흠.”

나는 자꾸만 마음 깊은 곳을 툭툭 건드리는 불쾌한 감정을 참고 태연히 대화를 이어나가려 안간힘을 썼다.

“아까 읽으시던 책이 제법 어려워 보이던데, 공부를 잘하시나 봐요.”

“그래 봤자 커스터드 귀족 학교에도 못 들어갔는걸요. 아버님의 기대에 부응하기엔 멀었죠. 저보다 크레페 님과 오빠분께서 더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린처가 재차 화제를 내게 돌렸다.

“…….”

또다. 이상한 불쾌감.

물론 속으로야 이런 내 태도가 예절에 어긋남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이해득실을 따져도 손해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단순히 생각해도 뢰드그뢰드 후작보다는 린처를 구슬리는 게 쉽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계산속과 달리 자꾸만 퉁명스러운 태도를 취하게 되니, 나도 내 스스로가 답답할 지경이었다.

분명 나와 갈레트를 치켜세워 주는 말인데 왜 웃을 수가 없는 거지?

“죄송합니다, 린처 님. 저는 몸이 안 좋아서 이만 방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아, 예. 실례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여행길에 피곤하실 텐데.”

“괜찮…….”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참으며 곧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다 정원에서 저택으로 들어가는 계단에 걸려 앗, 하는 사이에 옆으로 자빠져 버렸다.

“윽.”

“레이디!”

린처가 뒤늦게 내게 다가와 손을 뻗으려던 때였다. 나는 그의 시선이 내 발에 향해 있는 것을 알아챘다.

정확히는 치마에 가려 보이지 않고 있던, 뢰드그뢰드 후작이 준 족쇄에.

“그건 설마…….”

“…….”

나는 대답 대신 치맛자락을 정리해 족쇄를 도로 가리고, 그의 도움 없이 옷을 털고 일어났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 * *

그날 밤,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던 나는 가위에 눌렸다. 눈을 떴을 땐 달이 중천에 뜬 밤중이었고 내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나는 있는 대로 인상을 찡그리고 방문을 열었다. 벽에 기대어 눈을 붙이고 있던 카미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필요한 것을 가져다드릴까요?”

“물… 마시고 싶어.”

겨울의 건조한 공기 때문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카미가 곧바로 자세를 추스르고 예를 갖췄다.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냐, 직접 갈 테니 안내해 줘.”

가위에 눌렸던 만큼 혼자 침대에 남아 있고 싶지는 않았다. 딱 잘라 말하자 카미도 일언반구 없이 고개를 숙이고 앞장섰다.

* * *

내가 린처에게 느끼고 있던 것은 이상한 기시감이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게 안 좋은 소리를 한 젤라토가 떠올라서?

아니, 그 정도 기분은 아니었는데.

나는 소매로 식은땀을 훔치고 열심히 카미를 따라 발을 놀렸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 코너를 돌자마자 뒤쪽에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미련한 놈!”

잠이 번쩍 깰 정도로 거친 목소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분명 뢰드그뢰드 후작의 집무실에서 난 소리였다.

“그래도 후작가의 손님이십니다. 정식으로 몸을 의탁해 오신 분을 어찌 노예 대하듯…….”

“의탁? 하, 그건 믿을 곳이 우리 후작가밖에 없는 사람에게나 쓸 수 있는 말이지. 정보와 안전을 저울질하는 영악한 풋내기에겐 어울리지 않아.”

아무래도 나 때문에 뢰드그뢰드와 린처가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 서서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런 성격으로 대체 어떻게 이 자리를 지키겠다는 거야!”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압적인 말투와 노여움을 담은 목소리.

뢰드그뢰드의 얼굴을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표정을 예상하기는 쉬웠다.

“…….”

이내 뢰드그뢰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쯤 되니 네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궁금해질 지경이구나. 선생을 수없이 붙여줬는데도 커스터드 수석 입학은 실패하고, 피가 무섭다며 일찌감치 검의 길도 포기했지. 차라리 아펠 태자 대신 널 선택해 달라고 유혹이라도 하지 그랬느냐.”

린처의 대꾸는 들리지 않았다.

“쯧, 나가 보거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무실은 코너 너머에 있었기에 린처의 모습이 눈에 바로 들어오진 않았다. 그러나 내가 몸을 숨기거나 태연한 척 몸가짐을 가다듬을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린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코너를 돌아 내 앞에 섰다. 놀란 듯 그의 동공이 순간 작아졌다.

“시, 실례했습니다.”

대놓고 문에 귀를 대고 엿들은 건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에선 오해받기 딱 좋았다. 내가 재빨리 몸가짐을 가다듬고 예를 취했다.

“…….”

하지만 린처는 내 인사를 받아주기는커녕 아예 나라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듯, 날 무시하고 지나쳐 갔다.

그리고 나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내가 느낀 기시감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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