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23)화 (123/181)

123화 

“…크흠.”

뢰드그뢰드가 곧 표정을 가다듬고 헛기침을 했다.

“아직 말씀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미뤄도 괜찮습니다. 시간은 많으니까요.”

결국 내 말을 진지하게 믿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우선 식사부터 하실까요? 제 아들을 소개해 드리죠.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저보다 훨씬 긴 녀석이니, 크레페 님과 함께할 시간도 그만큼 많을 겁니다.”

뢰드그뢰드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미소가 오히려 내게는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정보 협상에서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만일 ‘서약의 강제력 때문에 얘기할 수 없다’는 내 말을 계속 거짓으로 받아들인다면, 내가 진짜 볼모가 되거나 목숨을 빼앗길 가능성도 있었다.

‘해를 끼치다니, 제가 그렇게 냉혈한으로 보이십니까?’

뢰드그뢰드가 그렇게 질문했을 때에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고 있었다. 단순히 오늘 알게 된 필사본 같은 일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아펠과 동반 입장을 하겠다고 청하기 전에 굳이 갈레트가 장례에 참석하는지 확인했다.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플레 님의 암살을 기도한 인물은 바움쿠헨의 플뢰데 후작입니다.’

바니유 공작가에서 몽블랑이 알려줬던 그 이름을 되뇌며, 나는 뢰드그뢰드의 옆얼굴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내가 뢰드그뢰드의 집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는 걸 알면, 갈레트 오빠는 어떻게 나올까?

* * *

식당까지 가는 길에 다른 특기할 말한 일은 없었다.

하긴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인데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느냐마는, 군데군데 건축 양식이 상이한 것만 빼면 외국인 줄도 모를 정도였다.

바움쿠헨이 그만큼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라서 그런가.

“이곳입니다.”

직접 나를 안내한 뢰드그뢰드의 말이 끝나자 뒤로 물러나 걷던 카미가 식당의 문을 열어주었다.

바쁘게 눈동자를 굴리던 내가 옷을 추스르고 자리에 바로 섰다.

아들을 소개해 준다고 했다. 심지어는 ‘함께할 시간이 많을 것’이라는 직접적인 말까지 하면서.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 뢰드그뢰드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일언반구 나온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게도 눈치라는 게 있었다.

아마 카미와 함께 내 감시 역을 맡게 될 사람이겠지.

손님이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난 아펠의 정식 약혼녀도 아니고, 개인 작위도 없는 백작가의 여식에 불과했다.

아군은커녕 호위 기사 하나 없는 혈혈단신으로 외국행을 택한 몸이었으니 그 아들이라는 사람에게 만만히 보이면 앞으로의 생활이 힘들어질 것이었다.

최대 악역의 아들이라니, 이번엔 어떤 양아치 같은 놈이 나오려나.

내심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밀 크레프 님이십니까?”

먼저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잠시 어리벙벙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고, 그러는 사이 남자가 먼저 예를 갖춰 인사했다.

“린처 토르테 메드 플뢰데라고 합니다. 편하게 린처라고 불러주십시오, 레이디.”

소개를 듣고 나서야 나는 그가 후작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그는 긴 사각형 모양의 대리석 식탁 앞에 앉아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남자, 린처는 도무지 뢰드그뢰드의 아들 같지 않았다.

이목구비는 분명 후작과 비슷한 생김새였으나 거기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뢰드그뢰드 후작의 근육질 몸과 다른 호리호리한 체형의 소유자였다.

뢰드그뢰드 후작은 육체파 뱀상, 음, 동물로 비유하자면 습지에 사는 아나콘다 같은 인상인 것에 반해 린처는…….

“레이디?”

“네? 네, 잘 부탁드려요.”

너무 오랫동안 딴생각에 빠져 있던 것 같았다.

세 번째 인사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그에게 마주 인사했다.

“앉으시죠.”

뢰드그뢰드가 손짓을 곁들여 말했다.

* * *

착각으로 만들어진 첫인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린처는 식사 내내 젠틀하고 유순한 태도를 보였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아니, 유순한 태도라기보다 저자세라고 말하는 게 어울릴지도.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는 갑자기 이곳에 신세를 지게 된 내가 해야 할 말이었다.

양아치처럼 빈정거리는 말이나 할 줄 알았던 나는 비굴하게까지 보이는 린처의 태도가 아직 어색하기만 했다.

“아뇨, 제가 무슨…….”

“커스터드 귀족 학교 최연소 입학. 그 정도면 충분히 대단한 업적이지요. 게다가 입학 전에는 마탑에 계셨다고 들었는걸요.”

부담스러울 만큼의 관심이었다. 아무래도 ‘말씀은 많이 들었다’던 게 그냥 겉치레로 한 말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갑자기 칭찬에 익숙해질 리 없지만.

“린처.”

뢰드그뢰드가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린처가 그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순간 어색한 적막이 식당을 가득 채웠다.

“…실례했습니다. 부담을 드렸군요.”

린처가 한발 물러나는 말을 했다. 나는 이 이상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도록 과하게 부정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뇨. 오히려 제가 불편하게 한 것 같아 죄송해요.”

“혹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린처가 싱긋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한 그때, 뢰드그뢰드가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제 아들이 원체 둔해 그런 것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선천적인 것인지 교육을 해도 나아지질 않더군요. 크레페 님께 비하면 갈 길이 멀지요.”

그가 접시 옆에 냅킨을 내려놓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할 일이 남아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천천히 식사 마치시길.”

그러고서 그는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약례하고 식당을 나갔다.

“…….”

린처와 어색하게 시선을 교환한 내가 포크를 들고, 접시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찐 호박 덩어리를 찍어 먹었다.

“한 그릇 더 내오라고 할까요?”

“아, 아뇨. 배불러요.”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다급히 손을 내젓고 나니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왔다.

이만 일어나겠다고 하면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보이려나?

소심한 걱정을 하며 슬그머니 포크를 내려놓은 그때, 린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디저트를 준비시키겠습니다.”

* * *

대체 뢰드그뢰드에게서 어떻게 저런 순둥이 같은 아들이 나왔지?

역시 보면 볼수록 불가사의할 지경이었다.

나는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며 린처의 눈치를 보았다. 린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는 듯 곧바로 카미를 불러 디저트를 더 가져오도록 했다.

“듣던 대로 디저트를 정말 좋아하시는 모양이네요.”

그가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멋쩍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입 안이 디저트로 가득 차서 어쩔 수 없었다.

접시에 늘어져 있던 것은 스펀지 시트 사이에 과일잼을 바르고 한 입 크기로 자른, 토르테류의 케이크들이었다.

구성 자체는 단순했지만 촉촉한 빵과 잼이 둘 다 훌륭했기에 맛에서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입에 맞습니까?”

끊임없는 디저트 공세에 혹할 지경이었다. 독살이라도 당할까 봐 주저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나는 린처에게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반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미가 추가 디저트를 가지고 도착했다. 나는 그녀가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였다.

그러나 그녀가 내 앞에 그릇을 내려놓은 순간,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이게 디저트라고?

그것은 수프처럼 오목한 그릇에 담겨 있었다.

되직한 황백색의 죽 위에 올라간 라즈베리와 블루베리, 블랙베리들로 만들어진 소스, 달달하게 풍겨 오는 단 향.

크림 수프에 딸기 소스를 끼얹은 듯 묘한 비주얼이었다.

“드셔 보시죠.”

린처가 부드럽게 권했다. 그는 일찌감치 배가 부르다며 식사를 마친 상태였다.

본인은 안 먹고 내게만 권하는 게 조금 불안하긴 했으나, 나는 차마 그 호의를 거절하지 못하고 스푼을 들었다.

그리고 한 입 먹자마자 나는 그 불안이 깡그리 감동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하얀 게 수프가 아니라 연유였구나……!

“이건 이름이 뭔가요?”

“로테 그뤼체요.”

린처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나는 쉬제트 저택에 돌아가서도 똑같은 걸 해달라고 말할 욕심에 그 이름을 몇 번 입 안에서 중얼거리며 다시 맛을 음미했다.

연유로 만든, 은은한 단맛의 베이스와 상큼한 베리 소스. 새콤달콤한 묽은 푸딩에 연유를 뿌려 먹는 맛이라고 하면 비슷할지도 모른다.

슈트루델에서 주로 나오는, 밀가루로 만들어진 디저트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맛의 경지였다.

와, 나중에 세계 디저트 유람이라도 다니면 좋겠네.

“레이디께서 맛있게 드시는 것 같아 저도 기분이 좋군요.”

린처가 웃는 얼굴로 말을 붙였다.

나는 레이디라는 호칭을 듣고 어색하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고는 이 자리에 우리 둘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되새겼다.

린처에게는 확실히 후작에게선 느껴지지 않는 온화함이 있었다.

어쩌면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 그의 악행에 대한 서술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린처의 인상 자체가 그리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나는 잠시 숟가락질을 멈추고 린처의 생김새를 뜯어보았다.

파타슈처럼 까무잡잡한 피부에 밝은 갈색 머리와 금색 눈동자.

구릿빛 피부는 보통 건강미의 상징으로 쓰이곤 했지만 린처에겐 통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조용히 책을 넘기는 게 누구보다 잘 어울릴 법한, 차분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뛰어난 마법사로 알려진 갈레트나 파타슈보다도 말이다.

…음, 이렇게 말하니 오히려 평가 절하 하는 느낌이군. 차라리 어른스럽고 부드러운 느낌이 젤라토를 닮았다고 하는 게 좋을까.

- 나는 반대야. 전하께서 왕당파 귀족에게 왜 누명을 씌워?

- 바니유가의 사람들이 전부 처형될 거라는 얘기도 있고.

내 거취에 대해 말하던 젤라토의 목소리와 크렘이 전해준 뜬소문이 뇌리에 스쳤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에, 아, 아니요. 그것보다는…….”

너무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것 같았다. 내가 황급히 부정하고 문득 떠오른 용무를 입 밖에 꺼냈다.

“서재나 도서관을 보고 싶은데 가도 괜찮을까요?”

* * *

“책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세간에 퍼진 소문이 과장이 아닌 듯합니다.”

린처는 꺼리는 기색도 없이 앞장서서 날 안내해 주었다.

동시에 그는 이런저런 화젯거리를 늘어놓았는데, 그마저도 날 띄워주는 말이었기에 난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제게 그렇게 대단한 업적은 없어요. 그리고 그냥 크레페라고 불러주세요, 린처 토르테 님.”

“저도 그냥 린처라고 불러주십시오, 레이디 크레페.”

아니, 그냥 크레페라고만 부르라는 뜻이었는데요.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린처가 문을 열었다. 쉬제트나 바니유가에 비하면 아담한 넓이의 서재가 나타났다.

“방해는 하지 않겠습니다. 편히 즐겨주시길.”

“예에.”

“아, 카미.”

그림자처럼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던 카미가 말없이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린처가 익숙한 듯 지시했다.

“책을 읽으며 즐길 만한 사브레를 부탁하지.”

“예.”

담담히 대답한 카미가 뒷걸음질로 서재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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