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플뢰데 후작가 】
바움쿠헨까지는 하루가 꼬박 걸렸다. 어두운 새벽에 마차에서 내린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뻐근한 허리를 폈다.
그래, 국경을 넘는 데 하루밖에 안 걸린 거면 가까운 거지.
“이곳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 님을 정식으로 모시게 되어 영광이군요.”
뢰드그뢰드가 좋은 사람인 척 가는 눈매를 휘며 웃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기꺼이 문을 열어주시다니 감사할 뿐입니다.”
예의를 갖춰 말하자 뢰드그뢰드가 고갯짓으로 대답하고는 저택에서 마중을 나온 시종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게 보였다.
아마 내 방문이 갑작스러웠으니만큼 내 편의와 관련된 내용일 것이다.
나는 그쪽에 신경을 끄고 저택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충분히 넓고 화려해 보였다.
다만 코앞의 정원은 겨울임을 감안해도 황폐했고 죽어 있는 나무도 있었기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풍겨 썩 마음 편해지는 환경은 아니었다.
집안일을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 없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아들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아펠의 생일 연회에서 들었던 말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긴가민가했다.
그러고 보면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도 뢰드그뢰드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는 없었던 것 같았다.
원작이 차라리 역사서처럼 서술되어 있었다면, 하다못해 외전이라도 빵빵했다면 이 사달이 날 일도 없었을 텐데 말야.
“밀 크레프 님?”
“네?”
케케묵은 미련을 되새김질하던 내가 뢰드그뢰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방을 안내해 주겠지, 했던 예상과 달리 그는 시종에게서 건네받은 금속 도구를 내게 내밀었다.
“발목에 이것을 착용해 주시겠습니까?”
“…이게 뭐죠?”
나는 그것을 받아 들기 전에 물었다. 그의 손에 올려져 있는 차가운 금속성의 고리는 일단 생긴 것부터 장신구와는 백 보 정도 거리가 있었다.
발목에 착용해야 한다는 것도 꺼림칙하고 말이지.
그리고 돌아온 답은 뻔뻔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마나 억제용 구속구입니다.”
뢰드그뢰드가 다른 손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구속구에 채우도록 만들어진 자물쇠가 쥐여져 있었다.
“…….”
나는 사나운 눈빛으로 뢰드그뢰드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밀 크레프 님이 마탑에도 다녀오셨다기에……. 타국의 땅인 데다 제게도 예정에 없던 일이었으니, 이곳에 머물기를 바라신다면 부디 양해해 주시지요.”
대답을 들은 내가 그에게 성큼 다가가 구속구와 자물쇠를 채어 갔다.
그러고는 정문 옆에 있는 화단 턱에 한 발을 올리고, 보란 듯이 구속한 발목에 자물쇠를 걸었다.
“됐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뵙지요.”
뢰드그뢰드가 눈을 접어 웃은 후 시종에게 내가 쓸 방을 안내하도록 했다.
어차피 내겐 통하지 않는 물건이니 망정이지.
나는 콧바람을 길게 내쉬며 시종의 뒤를 따라갔다.
* * *
이튿날, 나는 나무를 닮은 낯선 향을 느끼며 눈을 떴다. 슈트루델의 황궁에서 은은한 풀꽃 향이 배어 나왔던 것과는 대비되는 아침이었다.
이게 뢰그그뢰드 후작의 취향인지 바움쿠헨 제국의 일상적인 냄새인지는 모르겠지만.
“킁.”
나는 괜히 코를 한 번 씰룩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하루아침에 낯선 환경에 내던져진 터라 몸이 찌뿌둥한 게 영 거북한 기분이었다.
심지어 여긴 외국, 그것도 원작의 악역인 플뢰데 후작의 집 아닌가.
혹시 아나? 한밤중에 암살자라도 들어올지.
“하움…….”
뻑뻑한 눈을 비비며 문을 열었다. 새까만 무언가가 문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끄악!”
설마 암살자가 벌써?
번뜩 떠오른 생각과 함께 나는 용수철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그러나 문 앞에 서 있던 여자는 동요 없이 허리를 숙였다.
“기침하셨습니까?”
피부는 갈색에 머리카락과 속눈썹은 숯처럼 검은색, 눈동자는 고동색.
나는 그녀가 입은 옷이 검회색 하녀복임을 뒤늦게 깨닫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언제부터 대기한 건지 모를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저는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 님께서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시중을 들게 된 카미라고 합니다.”
“에, 예에…….”
내가 아직도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답했다.
사실 그녀가 암살자 같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도 심장이 쉽게 진정되진 않았다. 그녀가 자아내는 분위기가 워낙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무채색의 옷차림과 낮은 목소리, 어조까지 포함해 그녀는 전신에 어두움이라는 필터를 씌운 것 같았다.
기분 탓인지 존재감도 흐릿한 게, 만일 지금이 밤중이었다면 귀신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비명을 지르긴 했지만 이 정도면 기절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말씀을 낮추어 주십시오,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 님.”
카미가 재차 내 풀네임을 부르며 목 밑에 손바닥을 대고 예를 표했다. 그러자 얇은 살가죽 너머로 손가락뼈가 두드러졌다.
분명 외관을 보면 내 또래인데, 워낙 빼빼 마른 체구라 각진 뼈와 주름이 드러나 상대적으로 나이 들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나이 같은 것보다 내 신경을 자극한 건 따로 있었다.
“평민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카미가 나와 눈을 맞추지 않고 말했다.
그 대답을 들은 나는 내심 역시나, 하는 말을 삼켰다.
보통이라면 ‘밀 크레프 님’이라는 호칭으로 충분했을 텐데 굳이 내 풀네임을 꼬박꼬박 부르더란 말이지.
“하아…….”
참지 못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카미는 그런 반응을 예상한 듯 딱히 불쾌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한숨을 내쉰 이유는 아마 카미의 생각과 다를 것이다.
몇몇 사람들의 인식과 달리, 보통 귀족가의 고용인은 대부분 몰락 귀족의 후손이 맡는 고급 일자리였다.
본인을 암살 위협에서 지켜내려면 수발을 들어줄 사람의 출신 성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귀족들의 풍조 때문이었다.
그 말인즉, 뢰드그뢰드 후작이 날 독살한 후에 그 혐의를 이 카미라는 평민 하녀에게 뒤집어씌울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어지간하면 그런 강수는 두지 않겠지만, 일단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긴 했다.
차라리 담당 하녀를 바꿔달라고 행패라도 부릴까?
“못 미더우시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카미가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한 타이밍에 말했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타진해 보던 나는 결국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고, 이내 반쯤 포기한 채 입을 열었다.
“그냥 크레페 님이라고 불러.”
* * *
가볍게 차림새를 정돈하고 뢰드그뢰드 후작이 기다린다는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치마폭으로 가린 왼쪽 발목의 발찌, 아니 족쇄가 썩 답답하게 느껴졌다.
“오셨군요.”
먼저 자리에 앉아 있던 뢰드그뢰드가 엉덩이를 떼고 날 맞아주었다. 내가 치맛자락을 들어 약례한 후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날 이곳까지 안내한 카미가 자연스레 문을 닫아주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입을 열었다.
“시중을 들 사람으로 평민 아이를 붙여주셨더군요.”
정식으로 예를 차리기도 전에 꺼낸 화제였다.
웃으며 말한 것도 아니니 내 기분이 안 좋다는 걸 알 텐데, 뢰드그뢰드는 태연히 맞받아쳤다.
“벌써 통성명을 하신 겁니까?”
나를 칭찬하는 듯한 미소가 얄미울 만큼 뻔뻔스러웠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내 딴에는 카미에게 오해를 살 것을 각오하고 힘들게 꺼낸 말이었다.
카미가 문밖에 있으니 얼굴은 안 보였지만 그래 봤자 목소리는 다 들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대로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내가 좀 더 직설적으로 고쳐 말했다.
“제게 해를 끼치려고 급히 사람을 구하신 건가요?”
“해를 끼치다니, 제가 그렇게 냉혈한으로 보이십니까?”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뢰드그뢰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변방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입니다. 어릴 때부터 저희가 거두어 먹이고 있지요.”
“…….”
나는 섣불리 반박하지 않았다.
진의야 어찌 됐든, 조사했을 때 가짜로 판명될 거짓말을 그가 쉽게 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보다 이 편지 말입니다.”
뢰드그뢰드가 테이블에 종이를 내밀었다. 그건 내가 크렘에게 전달을 부탁했던 서신이었다.
거기에는 내가 원작을 통해 알게 된 뢰드그뢰드에 대한 몇 가지 정보와 더불어 ‘그 야심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줄 테니 대신 나를 저택에 초대해 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
그 편지를 직접 쓴 나에겐 딱히 놀라울 것도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글을 끝까지 읽기도 전에 눈썹을 움찔했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크레페 님께서 제게 전해주신 서신입니다.’
뢰드그뢰드는 분명 그렇게 말하며 아펠에게 서신을 넘겨주었었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아펠에게 있어야 하지 않나요?”
해명을 요구하자 뢰드그뢰드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입을 열었다.
“아펠 전하께 드린 것은 편집한 필사본입니다. 그대로 전해드리기엔 위험한 내용이 있었으니까요. 물론 거짓으로 추가한 건 없으니 그에 대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
순간 말을 잃었다.
물론 내가 보낸 편지 안에는 후작 자신에 대한 정보도 있으니 곧이곧대로 전달하기엔 꺼려질 만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필사본이라는 말 한마디 없이?
사기꾼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짓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고 시인하는 그 태도에 나는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런 것보다 저는 제 정보를 어디서 접하셨는지, 그리고 제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라는 게 뭔지 듣고 싶습니다만.”
뢰드그뢰드가 내 반응에 아랑곳 않고 본론을 꺼냈다.
그의 야심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
나는 서신에도 적었던 그 단어를 되새겼다. 당연히 내가 거짓말로 그를 꼬여낸 것은 아니었다. 내게는 그가 탐낼 만한 정보가 있었으니까.
아펠이 황제의 친자가 아니라는 것, 더 나아가 황제의 자격이 없는 황태자라는 것 말이다.
단지, 그 이야기를 꺼낸다면 외전이든 내전이든 전쟁이 일어나 버리겠지.
질문 한 번에 그런 기밀을 냅다 불어버릴 수야 없었다.
나는 찰나의 저울질을 끝내고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기로 했다.
“신탁의 서.”
“예?”
“그 이상은 얘기해 드릴 수 없겠군요.”
짧게 말을 줄이고 왼손가락으로 오른쪽 손목 안쪽을 가리켰다. 마탑의 서류에 서명하고 문양이 새겨졌던 자리였다.
물론 지금은 말끔히 사라져 있었지만, 정보에 밝은 뢰드그뢰드 후작은 내가 말하려 한 것을 금방 눈치챘다.
“설마, 신이 썼다는 소예언서에서 제 이야기를 봤다는 말입니까?”
‘설마’라는 단어에서 그 역시도 마탑과 관련된 전설을 단순한 미신으로 치부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는 대놓고 내 말을 부정하진 못했다.
물론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의도한 게 아니었다고 해도 그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지는 모습은 꽤 볼만한 구경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