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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21)화 (121/181)

121화 

듣자 하니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한 듯했다.

몽블랑이 황비를 독살했다는 이야기에 대해선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귀족들마저, 이번 황제의 암살도 몽블랑의 짓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이 모두 아펠의 눈치만 보며 쉬쉬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럴 수가…….”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하긴 황비 암살 혐의를 받고 도주하는 중에 황제까지 암살하려는 왕당파 귀족이라니, 그 무슨 끔찍한 혼종이란 말인가.

장례식에서 아펠와 내 비위를 맞추려 하던 귀족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크렘이 헛기침을 하고 덧붙였다.

“이 상황에 섣불리 의혹을 제기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제국의 권력가로 꼽히는 바니유 공작조차 일이 그렇게 됐는데.”

“…바니유 공작님이 왜요?”

“아.”

내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크렘이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는 몰랐냐는 듯 당황스러운 눈빛을 띠더니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전에 공작가에 암살자가 침입했대요. 근데 그때 밝혀지길, 몽블랑 후작님께서 몸을 숨기고 있던 곳이 바니유 공작가였답니다.”

암살자?

그 단어와 함께 크바스에게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얼마 전, 장례식에 참석했던 바니유 공작이 새벽에 급히 귀가했다고.

갈레트가 나와 파타슈를 묶어둔 동안 있었던 일이구나.

“암살자는 임무에 실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니 누가 보낸 건지는 영영 알 수 없겠지만, 사실 눈치가 있는 사람은 다 알겠죠.”

“…몽블랑 후작님은요?”

“함께 있던 마법사들과 함께 급히 몸을 피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이후의 행방은 모르겠군요. 저희들 사이에선 몽블랑 후작님이 어디로 향했는지보다 바니유 공작님이 어떤 처벌을 받을지가 더 큰 화젯거리니까요.”

아무래도 파타슈가 금방 돌아간 덕분에 몽블랑의 목숨이 보전된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바니유 공작까지 한 번에 몰락시키기 위한 사전 공작이었을지도 모르지.

나는 다소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처벌이라는 건…….”

“글쎄요, 아무래도 몰락은 정해진 수순이겠죠. 작위를 박탈당할 거라는 얘기도 있고, 바니유가의 사람들이 전부 처형될 거라는 얘기도 있고.”

그러더니 크렘이 슬쩍 내 눈치를 보며 헛기침했다. 내가 에클레어와 친분이 두텁다는 걸 아는 만큼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조심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무튼 요즘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아요. 크레페 님도 조심하세요. 전하께서 워낙 아끼시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갈레트는 내게 인사를 하고 황궁을 나간 이후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가 피오르를 설득하는 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알 것도 같았다.

몽블랑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공작의 처형 이야기가 오갈 정도다.

그를 직접 도주시켰다는 의심을 받는 키슈나 파타슈의 목숨도 아마…….

“잠깐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네? 네, 알겠습니다.”

나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으로 향했다.

암살자, 처형, 숙청.

처음엔 살벌한 단어에서 느껴지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그저 초조할 뿐이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자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이대로 자포자기하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왜 날 구금했는지 알겠어. 이 소식을 들으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럼, 그 예상대로 움직여줘야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나는 종이에 몇 마디 글을 휘갈긴 후 접대실로 돌아왔다.

“크렘 님, 제가 말하는 사람에게 이걸 전해주실 수 있나요?”

“예, 물론이죠.”

크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대화를 마치고 그를 배웅했다.

빈 공간에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던 그때, 덜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왔다.”

직접 카트를 끌고 나타난 크바스였다.

아차.

“뭐야, 크렘은?”

“하, 하하…….”

내가 대답 없이 멋쩍은 얼굴로 웃자, 접대실을 둘러보던 크바스가 상황을 파악하고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펠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별궁에서 저녁을 먹었다.

“갈레트 오빠는?”

“아직 바쁜 모양이던데?”

짧은 질문만큼이나 가벼운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내일 장례에 갈레트가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식기를 내려놓았다.

“내일, 나도 장례식에 참석해도 될까?”

오늘 내가 크렘을 만났다는 말을 전해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기는 쉬웠을 테지만, 아펠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네가 원한다면.”

그건 마음대로 해보라는 강자의 여유에 가까워 보였다. 실제로, 보는 눈도 많은 장례식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라고, 아펠은 생각하고 있겠지.

“응.”

나는 속내를 숨기고 웃었다.

* * *

그렇게 다음 날이 밝았다. 내가 동반 참석 하기로 한, 장례식의 마지막 날이었다.

어쩌다 보니 예식의 첫날과 마지막 날에 한 번씩 참석하게 된 셈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귀족들의 분위기는 첫날과 다소 달라져 있었다. 그들은 아펠을 전보다 더 어려워했고, 아펠보다는 나와 말문을 트고 싶어 했다.

한편으로는 상황을 살피기만 하고 이쪽에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오늘 주된 조문객은 타국에서 온 사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슈트루델 제국의 태양이 진 것에 애도를 표합니다.”

“대륙의 달이 졌으니 곧 태양이 떠오를 겁니다.”

아펠이 미소를 지으며 맞받아쳤다. 우리 슈트루델을 대륙으로 높여 말한 것과 동시에 황제를 달로, 자신을 태양으로 비유한 일종의 기 싸움이었다.

역시 외교 업무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조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떠본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인사를 들으며 나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런 살벌한 현장이니 어지간한 국내의 귀족들은 이쪽에 다가올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괜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구석에 선 크렘과 눈이 마주쳐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때 아펠이 은근한 손길로 내 뺨을 쓸었다.

“크레페? 집중해야지. 다 널 보고 있는데.”

첫날과 다른 태도에 내가 흠칫 몸을 굳혔다. 짧은 순간 귓가에 아펠의 속삭임이 들렸다.

“미안해, 크레페. 널 다시 보낼 일은 없을 거야.”

아펠은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홍채의 한색(寒色)과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눈빛도 여전했다.

하지만 그의 한 손은 나를 꼭 붙든 채였다. 달콤한 목소리 때문인지, 그것은 위협이라기보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느껴졌다.

“두 분의 사이가 매우 각별한 것 같아 보기 좋군요.”

그 순간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펠은 방금 전의 태도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점잖게 자세를 가다듬었다.

“눈요깃거리로 보였나 보지요?”

너그러운 어투와 달리 내용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쪽에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상대는 외교에 있어 베테랑급의 인사였으니까.

“불쾌하셨다면 사죄드립니다. 바움쿠헨에서 온 뢰드그뢰드 메드 플뢰데 후작이라고 합니다.”

바니유 공작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건장한 체구와 그에 대비되는 마른 뺨, 까무잡잡한 피부의 소유자.

그는 원작의 크레페를 조종해 아펠과의 파혼을 이끈 악역으로, 내가 그를 실제로 보는 것은 두 번째였다.

“방문에 감사드립니다.”

아펠이 짧게 인사했다. 뢰드그뢰드 후작은 발뒤꿈치를 마주쳐 소리를 내고는(바움쿠헨의 예법이다) 나를 내려다보았다.

“크레페 님과 단둘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잠시 괜찮으실는지요.”

“크레페는 제 파트너로 온 겁니다.”

아펠은 짧게 말하며 내 손등을 감쌌다. 뢰드그뢰드와 나의 첫 만남이 그리 달가운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날 보호해 주려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냥 내가 타국의 귀족과 대화하는 걸 막으려는 것이거나.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

내가 존칭으로 답하며 아펠의 손을 떼어냈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아펠이 눈을 크게 떴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뢰드그뢰드가 은연히 웃음을 삼키고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아펠에게 건넸다.

“크레페 님께서 제게 전해주신 서신입니다.”

크렘이 제대로 전해준 모양이구나.

나는 아펠이 그것을 읽는 동안 크렘에게 다시금 눈짓했다. 명백한 감사의 뜻이었다.

- 크렘 님, 제가 말하는 사람에게 이걸 전해주실 수 있나요?

그 부탁은 바움쿠헨의 뢰드그뢰드 후작에게 서신을 전해달라는 것이었으니까.

“이건…….”

아펠이 내용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뢰드그뢰드가 내게 손을 뻗었다.

“제 저택에서 천천히 말씀 나누시겠습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가까운 곳에서부터 점차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단둘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던 뢰드그뢰드의 말이 가만히 보아 넘길 만한 게 아님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황태자의 예비 약혼녀가 혈혈단신으로 바움쿠헨으로 향한다니, 어쩌면 내가 그곳에서 인질이나 볼모가 될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반응을 무시하고 치맛단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레페.”

아펠이 내 팔을 붙잡았다. 평소 공식 석상에서 봤던 여유 있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는 드물게 불안감이 묻어 있었고, 한편으로는 머랭을 데리고 마탑에 찾아온 그날 밤과 비슷하게 보이기도 했다.

‘너도 내 옆에 있어줘.’

왜 지금 그 말이 떠오르는 거지?

순간, 스스로도 느껴질 만큼 내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

하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만 한 기회가 또 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펠은 보는 사람이 많으니 내가 도망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반대로 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는 나를 강압할 수 없었다.

“가시죠.”

뢰드그뢰드 후작이 다시금 부추겼다. 귀족들은 어느새 웅성거리던 것을 멈추고 이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뢰드그뢰드의 손에 내 손을 겹쳤다.

불리할수록 당당할 것.

나는 그 말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발걸음을 뗐다.

그리고 연회장을 나가는 동안,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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