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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20)화 (120/181)
  • 120화 

    적막한 식사 후에 하녀들이 들어와 빈 그릇을 치워 갔다. 동시에 후식으로는 홍차와 롤케이크가 차려졌는데, 통상 롤케이크처럼 무거운 단맛을 가진 디저트는 후식용이 아니었다.

    “먹어 봐. 네가 단걸 좋아한다고 했더니 오늘 귀족들이 디저트를 바리바리 챙겨 왔더라고.”

    아펠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그가 따로 지시하기도 전에 하녀가 롤케이크를 잘라 내 접시에 올려주었다. 나는 케이크에 시선을 못 박은 듯 눈을 떼지 않았다.

    촉촉한 케이크시트는 시럽이 얇게 발려 반짝거렸고, 가운데에는 크림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듬성듬성 큼지막한 딸기가 박혀 있는 것도 보였다.

    “생딸기가 들어간 롤케이크라면 카이트 남작과 세렝기 자작이 줬던 건가……. 철도 아닌데 구하느라 고생했겠다. 다음에 겉치레용 인사라도 해줘야겠어. 그렇지?”

    내가 시위하듯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동안에도 아펠의 말은 유려하게 이어졌다.

    결국 참다못한 내가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나 가둬놓으니까 편해?”

    “가두다니. 장례 기간 동안 워낙 오가는 사람이 많아서 그래. 위험할 수도 있잖아. 너도 갑자기 친한 척 해오는 사람들 때문에 피곤하지 않았어?”

    핑계는.

    “정 나가고 싶으면 말해. 나랑 같이 산책이라도 가자.”

    “…됐어.”

    내가 힘없이 대답한 그때, 황실 기사단의 누군가가 들어와 아펠의 귓가에 몇 마디 말을 속삭였다.

    “미안, 크레페. 객실에서 다툼이 생겼대. 내가 직접 가봐야겠다.”

    아펠이 미안함을 담은 미소를 짓고 손을 닦은 냅킨을 내려놓았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얼마든지 해줘.”

    자리에서 일어난 아펠이 내 곁에 몸을 숙이고 볼 옆에서 쪽 소리를 냈다. 연인 사이에 나누는 작별 인사였다.

    내 어깨에 온기를 남겨놓고 그는 식당을 나갔다.

    “…….”

    대외 업무를 주로 처리하는 아펠과 별궁에서 거의 나가지 않는 나.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내가 별궁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 아주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때도 아펠은 연회에 출석했고 나는 그와 반대로 별궁에서 쉬제트 백작령과 관련된 일을 처리했다.

    아펠이 일을 마친 후엔 별궁으로 와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패턴도 그대로였다.

    물론 내가 그와 함께 나가지 않은 이유는, 내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대응하는 일이 어색하고 피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오늘 그가 한 말마따나.

    하지만 별궁에 있는 지금, 내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았다.

    “…내가 뭐 하는 거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솔직히, 나가려면 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바깥에 나가서 구체적인 사실을 알아보기엔 못내 꺼림칙했다.

    혹시라도 내가 알던 사람들이 이미 다 처형됐을까 봐.

    갈레트가 아펠의 편에 붙었다면 몽블랑의 현재 위치도, 바니유 공작가가 몽블랑을 도왔다는 것도 전부 알려진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 두려움도 아예 허황된 것은 아닐 테다.

    나는 포크를 들고 롤케이크를 콕 찍었다. 처음엔 쫀쫀하게 엉겨 붙어 있던 크림이 점차 점성을 잃고 흐물거리다가 툭 떨어졌다.

    “실례합니다.”

    용건이 있을 때만 나타나는 시녀가 내게 말을 붙였다.

    “오늘도 밀 크레프 님 앞으로 방문 요청이 몇 들어와 있습니다만, 뭐라고 전할까요?”

    “평소대로 처리해 주세요.”

    “네, 그럼 몸이 안 좋아 대면이 어렵다고 전해 드리겠습니다.”

    기운 없이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철이 아닌 딸기는 달다기보다 셨고, 미지근한 생크림은 느끼한 맛과 껄끄러운 감촉을 남기고 목구멍을 넘어갔다.

    “…그래도 맛있네.”

    세상살이가 힘들 땐 단걸 먹어라. 디저트엔 잘못이 없으니까.

    파타슈가 들으면 기겁할 듯한 내 좌우명을 되새기고, 나는 접시에 남은 것을 숟가락으로 수프처럼 떠먹은 후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머랭은 별궁과 본궁, 기사 연무장까지 자유자재로 오가곤 했다. 녀석이 신수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황궁에서 키우는 강아지’라고 하면 곧바로 머랭을 떠올렸다.

    아마 내 위치도 그 정도가 아닐까?

    쉬제트 백작령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별궁에서 지내는 아펠의 예비 약혼녀’라고 하면 날 떠올리는 거지.

    크렘과 함께 입장했을 때는 저 여자는 누구지, 하는 눈빛으로 보던 사람들이 이젠 앞다투어 날 만나고 싶어 한다니 실소가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물론 나야 컨디션이 안 좋다는 핑계로 쭉 방문 요청을 거절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너무 앞서가지 마.”

    크바스의 말을 들으니 더욱 머랭이 된 기분이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개가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다소 거친 생각을 하며 크바스를 곁눈질했다. 그는 뭘 보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내 옆에 따라붙었다.

    “칫.”

    나는 크바스의 경고를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별궁 안을 열심히 싸돌아다녔다. 어차피 무기력하게 티타임을 갖거나, 별궁 내부를 산책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으니까.

    그러다 문득 눈에 익은 문을 발견했다.

    아펠이 안내해 줬던, 황비가 즐겨 이용했다던 사교장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그 문을 세게 밀었다.

    휘이잉.

    서늘한 소리와 함께 불어온 맞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스치고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눈앞에는 발코니와 이어지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저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인 것 같았다.

    어쩐지 문이 무겁다 했더니 풍압 때문이었구나.

    나는 별생각 없이 그곳에 발을 내디뎠다.

    화려한 천장화부터 바닥에 반사된 어슴푸레한 빛, 밤하늘의 별처럼 흩뿌려진 마법등까지, 다시 봐도 비현실적인 공간이었다.

    사실 아펠을 보면서도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은 수도 없이 했지만 말이야.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크레페. 다 괜찮을 거야. 나 여기 있잖아. 너도 내 옆에 있어줘.’

    그 순간, 마치 환청처럼 아펠의 말이 귓가에서 되풀이됐다.

    나는 천장을 살피다 말고 시선을 내렸다. 발코니 너머로 귀족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한사코 방문을 거절했던 내가 혼자 사교장에 있는 꼴을 보여서 좋을 건 없었다.

    나는 창문만 닫고 이곳을 나갈 생각으로 발코니에 다가갔다.

    그런데 어쩐지 익숙한 머리털이…….

    “크렘?”

    “크레페 님?”

    멍하니 중얼거린 목소리를 들었는지, 건물 밖에 있던 크렘이 곧바로 날 발견하고 이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이런, 아프다고 들었는데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그보다 궁에는 어떻게 오셨어요?”

    대답 대신 질문으로 맞받아쳤다.

    내가 보송보송한 크림색의 머리를 보고도 순간 눈을 의심한 이유는 크렘이 자작가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사교계에서야 유명하지만, 그는 아펠의 생일 연회 때도 초청받지 못해서 날 에스코트하는 신분으로 입장했었으니까.

    “뭐, 연줄이지요.”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크렘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하고 다시 물었다.

    “그보다 크레페 님 건강은요?”

    “아…….”

    내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크렘 님도 저한테 방문 요청하셨었나요?”

    “…크흠.”

    이쯤 되자 크렘도 내 병환이 꾀병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듯 덩달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뇨, 저는 소문으로만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요즘 같은 상황에선 정보가 곧 힘이니까요. 아무래도 크레페 님에 대해서도 걱정이 되더라고요.”

    “…….”

    정보가 곧 힘.

    그러고 보면 크렘은 사교계 인맥이 넓은 만큼 소식에도 밝을 것 같았다. 펜리르의 영혼이라 불리는 내 팔찌나 아펠의 얼굴을 곧바로 알아보기도 했고 말이다.

    나는 잠깐 입을 다물고 크렘의 붉은 눈을 쳐다보았다. 정적이 길어지자 그의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스몄다.

    “왜, 왜 그러십니까?”

    크렘과 나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발코니의 난간 하나뿐이었다. 건물의 안과 밖이니만큼 약간의 높이차가 있긴 했지만, 지난번에 그랬듯이 팔찌를 발동시키기만 한다면 크바스를 따돌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곳을 벗어나면 그 사실이 아펠의 귀에 들어갈 것이고, 무엇보다 굳이 그래야 할 필요성도 없었다.

    나는 자리에 쪼그려 앉아 크렘에게 속삭였다.

    “내일 이곳에 방문 요청을 해주시겠어요?”

    * * *

    [흰빛이 감도는 크림색에 부드러운 컬이 들어간 머리카락. 하지만 그것만으로 크렘 브륄레 커스터드의 인상을 부드럽게 여기기엔 무리가 있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가 도자기 인형 같은 살갗으로 내 손을 들어 올리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눈매는 가늘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보기가 힘들었고 입가에 맺힌 기품 어린 미소에선 은근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불행히도 나는 이런 인간상을 접할 일이 많았다. 나는 곧바로 그의 목적을 파악했다.

    나를 이용하려는 거구나.]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 따르면 ‘은근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미소’라고 했던가?

    그러나 그 서술과 달리 현재의 크렘은 순박한 촌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가 황비 전하께서 지내셨다던 별궁이군요. 제가 여길 들어와 볼 줄이야…….”

    “크흠.”

    진짜 내 집도 아니니 겸손스레 대꾸하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아서 헛기침만 한 번 하고 말았다.

    크렘이 머쓱하게 웃으며 날 따라 접대실로 들어왔다. 커스터드 귀족 학교에서 면식이 있던 크바스와 눈인사를 주고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과 준비 부탁드려요.”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크렘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하지만 접대실에서 나와 크렘을 제외하면 남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나?”

    “네. 직접 가져와 주세요. 그동안 안 도망가겠다고 약속할게요.”

    “…….”

    뻔뻔하게 말하자, 크바스가 똥 씹은 표정으로 접대실을 나갔다. 하녀나 시녀를 불러서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굳이 자신을 내보내려는 내게 반기도 들지 못했다.

    아펠에게 이를 수는 있겠지만 뭐, 그것 말고 크바스가 내게 뭘 할 수 있겠는가.

    “오크로시카 후작가의 크바스 님을 저렇게 아이 다루듯 하다니…….”

    “권력의 단맛이라는 거죠.”

    어깨를 으쓱하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요즘 같은 상황엔 정보가 곧 힘이라고 하셨죠? 아무래도 크렘 님이 사교계에서 유명하니만큼 정보에도 밝으실 것 같은데, 몇 가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예, 제가 아는 것이라면 성심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크렘이 순순히 응했다.

    그도 내가 크바스를 내보낸 시점에 다소 민감한 질문이 나올 걸 예상했겠지만, 한편으로는 내게 추가 정보를 듣거나 나와 친분을 쌓아서 얻을 수 있는 이득도 계산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내가 들은 이야기는…….

    “그럼 대부분의 귀족들이 실제로 몸을 사리고 있단 소리예요?!”

    “예에…….”

    나는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듯이 몸을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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