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몰라서 대답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내가 변방으로 기사 수련회를 갔을 때, 엄마가 목숨을 바쳐 지켜낸 평민들과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으니까.
다만 갈레트는 그곳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갈레트는 내가 입을 다문 이유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가 눈을 내리깔고 씁쓸하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엄마는 오빠한테 맡길게. 내가 마법 배워 오는 동안, 오빠가 엄마를 지켜줘. 알겠지?”
갈레트가 책을 읽듯 말했다. 내 목소리를 흉내 낸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 말이 내가 했던 말이라는 걸 기억해 냈다.
내 마탑행이 결정된 후에 그에게 당부한 것이었다. 깊은 생각 없이, 갈레트가 나를 따라 마탑에 들어오는 사태를 막으려고.
“그 부탁을 받고 나서, 나도 계속 범인을 조사하고 있었다는 건 알 거야. 실제로 엄마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지.”
나는 그때 일을 떠올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마탑에 있는 동안, 아직 어린아이였던 갈레트는 나보다도 훨씬 본격적인 조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고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난 엄마가 변방에 가겠다는 걸 말리지 않았어. 왠지 알아? 아빠가 거기 있었으니까. 난 아빠가 엄마를 지켜줄 거라고 믿었거든.”
거기까지 말한 갈레트가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결과가 어땠는지는,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앙상한 겨울나무 밑에 선 갈레트의 로브 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봄의 환희를 담은 듯 화려한 보랏빛이었지만, 지금처럼 스산한 밤에는 그저 처연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는 아빠를 ‘장례식에도 오지 않은 사람’이라고 불렀고, 나와 카눌레가 변방에 가겠다는 걸 말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적대감의 이유를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갈레트를 진정시키는 데만 급급해 있었다.
갈레트가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고.
나는 뒤늦게나마 그를 달래기 위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빠가 엄마를 지켜주지 못해서 그래? 아무리 아빠라도 어떻게 몬스터 무리를 다…….”
“역시 모르는구나.”
갈레트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그날, 아빠는 몽블랑 후작과 주민을 대피시키려고 엄마를 두고 후퇴한 거래. 상상이 돼? 엄마가 셀 수 없이 많은 몬스터들 앞에서 칼을 빼 들고 있는데, 혈혈단신으로 떠맡기고 후작이랑 같이 도망쳤다고!”
“…….”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갈레트가 예상한 대로 그건 내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니, 한편으로는 예상할 수 있는 범주 내의 일이기도 했다.
엄마는 검을 다루는 데 능숙했고, 몽블랑은 엄마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아빠는…….
-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게 우리가 명예를 지키는 방식이야. 크레페, 너도 언젠가 알게 되겠지.
“넌 진범이 따로 있으니 몽블랑 후작을 탓하지 말자고 그랬지? 하지만 내게 엄마를 죽인 건 아빠랑 후작이야.”
오래전에 들은 아빠의 목소리를 떠올리던 그때, 갈레트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나는 엄마를 죽이기 위해 뒤에서 수작을 부린 바움쿠헨의 귀족보다, 코앞에서 엄마를 지키기를 포기한 두 사람이 더 싫어.”
- 어떻게 할지, 너는 벌써 정한 것 아냐?
그럼 바니유 공작가에서 했던 그 말도, 날 위로해 주려던 게 아니라 내 생각이 자기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거였어?
그 말에 마음을 다잡았던 내게는 이 상황이 마치 블랙코미디처럼 느껴졌다.
굳이 그 질문을 꺼내 배신감만 더하고 싶진 않았기에, 나는 잠깐 동안 이를 악물었다. 눈물을 참기 위해서인지 웃음을 참기 위해서인지는 스스로도 구분할 수가 없었다.
“오빠, 진정해 봐. 이렇게 급하게 일을 진행시킬 필요는 없잖아.”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고 신중하게 그를 만류했다. 그러나 그런 나와 대조적으로 갈레트의 표정은 천연덕스러웠다.
“괜찮아. 태자 전하와는 충분히 얘기했거든. 내가 바니유 공작가의 보안 마법진을 해제한 건 기억나지? 통신구도 같은 패턴을 쓰고 있더라고. 참, 공작가의 보안 운영 체계가 그 정도라니 탄식이 나오더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갈레트가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했다.
“몽블랑 후작을 처형하고자 하는 목표가 같고 네가 안전했으면 하는 바람도 같으니, 그분과 손을 잡으면 분명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 거야.”
“아니, 나랑 얘기 좀 하자니까?”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그에게 다가가려던 찰나였다. 큼지막한 눈송이가 내 눈앞을 스치며 잠깐 동안 시야를 가렸다.
갈레트가 마법진을 전개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오빠!”
누군가 내 외침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안중에 없었다. 나는 그가 뭘 하려는 건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그를 막아섰다.
어차피 내게는 마법이 안 통하니까.
하지만 갈레트가 노린 건 나였다.
“욱.”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났다. 갈레트의 손 밑에는 반투명한 등자색으로 마법진이 떠올라 있었는데, 마나를 증폭하고 융합시키는 용도의 진(陳)이었다.
곧 이 근방에 남아 있던 파타슈의 마나가 거기 흡수되며, 처음 공간 이동을 했을 때만큼의 메스꺼움이 느껴졌다.
마나에 민감한 내 체질을 이런 식으로 이용할 줄이야.
의식이 멀어질락 말락 한 상황에서마저 그의 응용력에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조심해야지.”
내가 비틀거리자 갈레트가 날 안아 지탱해 주었다. 곧 소곤거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미안, 크레페. 난 누가 황제가 되느냐, 그런 거엔 별 관심이 없어.”
* * *
“으으…….”
숙취에 시달리는 것처럼 머리가 쨍하니 아팠다.
나는 부드러운 거위 털 이불을 덮은 채 뻑뻑한 눈을 깜빡였다. 창문으로 내려오는 햇살은 부드러웠고 방 안의 공기는 아늑했다.
“크레페! 잘 잤어?”
갈레트가 웃으며 인사했다. 기억이 애매한 곳에서 끊기기도 했고 내게 인사하는 그의 얼굴도 해맑아서, 나는 순간 어제의 일을 통째로 꿈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물론 여기가 별궁의 내 방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정신을 차렸지만.
“어, 어떻게 됐어?”
“뭐가?”
“다!”
시위하듯 그의 귀에 대고 빽 소리 질렀다. 갈레트가 끙 소리를 내며 잠시 동안 귀를 막고 있었다.
나는 후다닥 이불을 걷고 주변과 내 옷차림 같은 것을 둘러보았다. 어제 겪은 게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침대 밑에 놓인 실내화에는 겨울 풀이 조금 붙어 있었다.
곧바로 신발을 구겨 신고 방문을 열었다. 근육질의 어깨가 떡하니 내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무 시끄럽게 하지 마.”
문을 지키고 서 있던 크바스가 이쪽을 흘끗 돌아보았다. 갈레트를 내 방에 들여보낸 것도 크바스였던 듯, 그는 갈레트의 존재에 딱히 놀라는 반응도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넌 아주 사건을 몰고 다니냐? 난장판이 따로 없네.”
크바스가 가볍게 혀를 찼다.
“아직 장례 기간이야. 안 좋은 말이 돌 수도 있으니 조심 좀 해.”
나는 그의 반응에 멀뚱히 서서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크바스가 훙, 콧바람을 내쉬고 문을 닫았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현실감 없는 상황이었다.
“…별일 없었어?”
“글쎄.”
갈레트가 피식 웃으며 옷을 털었다.
“너 일어난 거 확인했으니 됐어. 난 스승님한테 가봐야겠다.”
“피오르 선생님?”
“응. 아직도 사방팔방 조사하느라 바쁘시대. 걱정하실 테니 제자 된 도리로 안심시켜 드려야지.”
“잠깐만!”
다급히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문고리에 손을 뻗던 갈레트가 행동을 멈추고 날 마주 보았다.
내가 문 쪽을 한 번 곁눈질한 후에 물었다.
“바니유 공작님은 어떻게 됐어?”
아까보다 직접적인 질문에, 갈레트가 잠깐 고민하듯 뜸을 들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갈레트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처음부터 장난칠 생각이었던 것처럼 눈을 접어 웃었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
“…….”
그를 붙잡았던 손에 스르륵 힘이 풀렸다. 갈레트는 귀엽다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내 볼을 꾹 눌렀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다 정리될 거야.”
갈레트가 자세를 가다듬고 도로 문고리를 쥐었다.
“아, 그런데 크레페.”
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날 돌아보며 물었다.
“원래 운명에서, 내가 죽을 거라는 거 알았어?”
“…….”
“아냐. 그냥 물어봤어.”
내가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도 전에, 갈레트는 싱긋 웃으며 곧바로 문을 열고 크바스에게 당부했다.
“형, 크레페 잘 부탁해.”
“하여간 건방진 건 알아줘야지.”
크바스가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혀를 찼다.
갈레트는 그에게 따로 대꾸하지 않고 멀어졌다.
그동안 내가 무반응으로 서 있자, 크바스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있었냐?”
내가 고개를 치켜들고 크바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어제의 일이 꿈처럼 느껴진 데엔 분명 그의 무덤덤한 반응 탓도 있었다.
왜냐면 크바스와 젤라토의 사이가 각별했으니까.
“혹시 바니유 공작가에 대해 얘기 들은 거 있어요?”
오크로시카 후작가와 바니유 공작가의 영지가 인접해 있다고 했으니 들은 게 있을지도 몰라.
나는 지푸라기를 잡는 것 같은 심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크바스의 반응은 여전히 단순했다.
“…아니. 오늘 새벽에 바니유 공작님께서 급히 귀가하셨다는 말은 들었는데.”
“…….”
“넌 대체 뭐가 그렇게 바쁜 거야?”
크바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그게 기가 막히기도 하고 허탈하면서도 부러워서,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됐어요, 아펠이랑 얘기해 볼게요.”
내가 스탠드 옷걸이에 걸려 있던 외투를 곧바로 꺼내어 입고 갈레트가 나간 별궁의 정문으로 향했다.
“크흠.”
그러나 내가 정문을 통과하기도 전에 크바스가 헛기침을 하며 내 앞을 막아섰다.
몇 마디 보태는 것을 빼면 그의 행동은 지금껏 호위에 머물러 있었기에, 그가 이렇게 대놓고 날 말린 건 처음이었다.
“왜요?”
내가 그를 올려다보자 크바스가 내 시선을 피하고 짧게 대답했다.
“구금 명령을 받았어.”
“…아펠한테서요?”
“그래.”
크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본 건 나였지만 설마 긍정의 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기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래도 크게 답답하진 않을 거야. 별궁이라면 어디든 가도 되고, 널 보러 이곳에 방문한 사람은 지금까지처럼 만날 수 있으니까.”
위로인지 설명인지 모를 말들이 이어졌지만, 내 귀에는 그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장례가 끝날 때까지만 참아.”
크바스가 건조한 투로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