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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18)화 (118/181)
  • 118화 

    “어때, 걱정할 것 없었지?”

    공식 절차를 마치고 아펠이 날 별궁까지 데려다주며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계속 머릿속이 복잡했기에 편히 웃어주지는 못했다.

    그 반응 때문인지 아펠은 한 팔을 들어 내 어깨를 감싸주었다. 팔이 단단했기에 부드러운 손길이었음에도 안정감이 느껴졌다.

    나는 그 손길을 뿌리치지 못하고 조금 고개를 숙였다.

    공작이 오늘 밤, 내게 급히 전해야 할 말이 뭘까?

    사실은 제가 배신했습니다?

    저는 이만 발을 빼겠습니다?

    오늘 몽블랑의 신변을 태자 전하께 넘기겠습니다?

    좋게 생각하면 다음 작전에 대한 말을 할 것 같기도 했지만, 사실 나는 그리 좋은 대답을 기대하진 않고 있었다.

    무엇보다 십 년도 전에 세상을 떠난 황비의 시해죄와 바로 그저께 숨을 거둔 황제의 시해죄는 사안의 중대함 자체가 달랐으니까.

    “크레페?”

    “으, 응?”

    “괜찮아? 많이 피곤해 보이네.”

    우리는 어느새 내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아펠이 걱정 어린 말을 건네며 내 모자를 들치고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으응, 잠을 설쳐서…….”

    의심을 살까 봐 대충 둘러댄 나는 아펠의 손을 잡아 멈추고, 모자를 벗은 후 직접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손이 너무 차갑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제 보니 어두운 하늘에는 보일 듯 말 듯 한 싸락눈이 휘날리고 있었다.

    아펠의 손등은 추위로 붉어져 있었으며 물기도 조금 남아 있었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내가 눈에 맞지 않도록 손으로 막아준 모양이었다.

    “너…….”

    내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자 아펠은 곧바로 손을 빼내고 나를 배려해 빠르게 말을 돌렸다.

    “그럼 오늘은 기사 없이 푹 쉬어. 필요한 게 있으면 평소처럼 하녀나 시녀를 부르고.”

    기사 없이?

    아펠이 방문을 열어주었지만 나는 거기 들어가는 대신 그를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오늘 밤에 공작이 전언을 보낼 가능성이 컸으니 당연히 크바스 같은 감시의 눈길은 없는 게 속 편했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물려준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

    “황궁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날 감시하지 않아도 괜찮겠어?”

    “감시라니.”

    농담인 척 직설적으로 묻자 아펠이 그 단어를 되풀이하며 피식 웃었다.

    “어차피 네가 마음먹고 도망치려고 하면 기사 한두 명으로는 안 될 거잖아. 웬만한 마법도 안 통한다며? 내 투명 마법도 꿰뚫어 보고선.”

    아펠이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디저트라도 준비시킬까?”

    “아, 아니야. 빨리 잘게.”

    “그래. 고생했어.”

    아펠은 아직 붓기가 남은 내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본궁에 돌아갔다.

    “…….”

    나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창문을 열었다. 구름에 가린 달빛은 희미했고 싸락눈처럼 휘날리던 눈은 어느새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있었다.

    나는 몰래 찾아올 손님을 기다리며, 옅은 위화감의 원인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 * *

    그리고 조용한 새벽, 잠든 척 침대에 누워 있던 나는 익숙한 마나를 느끼고 눈을 떴다. 아펠의 마나는 아니었다.

    착각이겠지, 하고 다시 눈을 감으려던 순간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크레페 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놀란 내가 넘어지다시피 침대에서 내려와 급히 창문을 열었다.

    “파타슈 님?”

    “나도 왔어!”

    갈레트가 파타슈 옆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 아니, 어떻게 직접…….”

    나는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어버렸다. 그러나 파타슈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태연히 눈비에 젖은 로브를 털었다.

    “공작님께 얘기 듣지 않았어요?”

    “이걸 들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내가 두루뭉술하게 대꾸했다.

    손님이 올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기껏해야 공작 본인이나 그에게 전언을 부탁받은 기사가 찾아올 줄 알았다. 설마 침입자나 마찬가지인 그들이 올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렇다면 바니유 공작은 처음부터 날 궁에서 빼낼 생각이었나?

    “자세한 얘긴 가서 하고요, 자.”

    “추우니까 옷 걸치고!”

    파타슈가 넘어오라는 듯 창 옆으로 비키자마자 갈레트가 거들었다. 아무래도 다급해 보여서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두툼한 신발을 챙겨 신었다.

    창문을 넘어 바깥으로 나가는 길은, 이제 거의 문을 나서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경로로 느껴졌다.

    뭐, 이번엔 맨발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려나.

    “잘 있었어?”

    내가 겨울 풀을 밟은 것과 거의 동시에 갈레트가 물었다. 안부 인사나 나누고 있을 땐가 싶었기에 나는 다른 발을 창문에서 빼내자마자 질문했다.

    “공간 이동으로 갈 거지?”

    공작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오면서 다른 사람들 눈은 어떻게 피했는지, 내 방이 여기인 줄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그 외에도 물어보고 싶은 건 산더미 같았지만, 그런 사소한 질문들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들의 마법 실력과 바니유 공작의 정보력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납득이 되기도 했다.

    애초부터 이 상황에서 날 도주시킨다는 바니유 공작의 배짱부터 내겐 이해가 안 될 수준인데, 뭘!

    “쉿.”

    파타슈가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수풀에 몸을 숨겼다. 신분을 알 수 없는 기사가 누군가와 교대한 듯 황궁을 떠나고 있었다. 바닥에 옅은 발자국이 남았다.

    “저기…….”

    “곧바로 이동 마법을 쓰면 마나 패턴으로 목적지를 추적당할 거야. 가능하면 여기서 최대한 멀어진 다음에 이동해야지.”

    갈레트가 주변을 망보며 설명해 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불안이 가시진 않았다.

    하늘에선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함박눈은 아니라지만 바닥에는 눈이 얇게 쌓여 있었기에 우리 발자국을 숨기긴 어려워 보였다.

    갈레트도 뒤늦게 그것을 눈치챈 듯, 굴러다니고 있던 낙엽으로 지나온 발자국을 덮었다.

    “아예 길이 안 닦인 쪽으로 가는 게 낫겠다. 저쪽 어때?”

    그러고 갈레트가 가리킨 방향은 연회장 북쪽에 꾸며진 후원이었다.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갈레트가 앞장서서 우리를 이끌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마나를 퍼뜨려 다른 감지 마법이 발동하진 않는지 거듭 살폈다.

    그 모습이 바빠 보이긴 했지만, 내게는 아직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근데 왜 둘이 같이 왔어?”

    “널 구해내는 게 먼저니까 왔지!”

    갈레트가 어깨를 펴고 당당히 말했다. 파타슈가 뒤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저 혼자만 오는 거였는데, 이분이 워낙 걱정된다고 따라오시겠대요.”

    여느 때와 같은 태도였고 새삼 놀랄 필요도 없는 이유였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그냥 받아넘기지 않았다.

    “…….”

    내가 더 이상 수풀에 몸을 숨길 생각도 않고 허리를 펴 섰다.

    “크레페?”

    “왜 그러세요?”

    인적이 드문 시간과 장소, 바닥에 희미하게 남은 우리의 발자국, 연회장 너머에 있는 본궁, 아까 전 아펠과 헤어지며 나눈 말까지.

    희미하게 느껴지던 위화감이 선명해졌다.

    “…파타슈 님,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세요.”

    “뭐?”

    “네?”

    갈레트는 고개를 갸우뚱했고 파타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우리가 다 한곳에 있는 건 위험해요. 지금 저택에는 공작님도 없잖아요. 추적은 저랑 오빠가 처리할 테니까, 어서!”

    “네, 네에.”

    내가 파타슈를 설득하다 못해 거의 등 떠밀 듯 다그치자 그는 얼떨떨해하면서도 바로 이동 마법을 썼다.

    갈레트가 찜찜해하는 듯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내게 손짓했다.

    “그래, 일단 가자. 우리라도 궁에서 멀리 떨어져야지.”

    그러고 그가 몇 걸음 앞서갔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갈레트가 금방 멈춰서 나를 돌아보았다.

    “안 가?”

    “오빠, 뭔가 이상하지 않았어?”

    “응?”

    “루아 요새에서 말이야. 아펠이 어떻게 알고 거기까지 찾아온 걸까? 혹시 공작님이 우리 정보를 넘긴 건 아닐까?”

    갈레트가 입술을 꾹 다물고 날 향해 섰다.

    그 반응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의심은 원래 하는 사람, 당하는 사람, 더 나아가 그것을 듣는 사람의 기분까지 꺼림칙하게 만드는 감정이었다. 진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 말했다.

    “근데 그거 말고도 이상한 게 있어. 오늘 아펠이 그러더라고.”

    “…뭐라고?”

    “어차피 내가 마음먹고 도망치면 기사 한두 명으로는 못 막을 거 아니냐고. 웬만한 마법도 안 통한다며, 라고.”

    기억나는 대로 말했다.

    ‘웬만한 마법도 안 통한다며?’

    내가 아까부터 아펠의 말을 곱씹고 있던 이유, 위화감의 원인은 그 말에 있었다.

    내게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갈레트와 카눌레뿐이었으니까.

    내가 짧게 물었다.

    “오빠가 알려준 거지?”

    질문이 끝나자마자 휑한 바람이 불었다. 진눈깨비가 흩날려 갈레트의 머리카락에 붙었다.

    가만히 있던 갈레트가 부정하지 않고 후드를 벗으며 웃었다.

    “역시 내 동생이야.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는데.”

    【 불리할수록 당당할 것 】

    바니유 공작가의 리시버를 사용한다면 나를 이동시키는 것은 파타슈 혼자서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갈레트는 계획에 없던 동행을 해서 파타슈와 나를 연회장 뒤로 이끌었다. 발자국이 남는 걸 핑계 삼아, 본궁과 더 가까운 곳으로 말이다.

    꼭 시간을 끄는 것이 목표인 사람처럼.

    그 감상이 그가 배신자일 가능성과 연결되기까지는 금방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쌈박하게 인정할 건 또 뭐냐.

    “뭐가 그렇게 당당해? 아니라고 우기지도 않고.”

    “하지만 기특하잖아. 역시 크레페 너는 천재라니까?”

    갈레트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맞받아쳤다. 극성 학부모 못지않은 띄우기에 부끄러워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왜 그랬어?”

    “어쩔 수 없잖아. 너한텐 네 생각이 있고, 나한텐 내 생각이 있는데. 난 동생이 성인이 됐는데도 내 생각만 올바른 거라고 주입시키는 못된 오빠가 되긴 싫거든.”

    “그렇다고 동생한테 말도 없이 뒤통수치는 건 좋은 오빠야?”

    “하하, 그렇네.”

    말도 안 되는 핑계임을 짚어줘도 갈레트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는 듯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동생이 성인이 됐는데도’라는 말과 달리 그 반응은 여전히 날 어린아이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가 문득 본궁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실 공기 중에는 파타슈가 이동하면서 퍼뜨린 마나가 아직 남아 있었다. 아펠 정도의 실력자라면 금방 감지하고 쫓아 나올 수도 있었을 텐데, 이야기된 것이 있는지 아니면 깊은 잠에 빠져 있기 때문인지 본궁은 조용하기만 했다.

    단순히 갈레트의 평소 같은 태도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내 걱정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대화할 여유는 있겠지.

    그렇게 결론지은 내가 다시 물었다.

    “왜 그랬는데?”

    “난 역시 몽블랑 후작이 싫더라고.”

    농담 따 먹기 하듯 가벼운 어투에 순간 귀를 의심했다.

    “무, 무슨 소리야? 엄마를 암살하려 한 범인은 따로 있다고 얘기했잖아! 설마 내 첫사랑 어쩌고 하는 얘기 때문은 아니지?”

    “크레페, 넌 엄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아?”

    갈레트의 담담한 반문에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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