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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17)화 (117/181)

117화 

“나는…….”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나는 억지로 힘을 주고 눈을 부릅뜨려 했지만 눈물을 참을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이 분하기까지 해서, 나는 이를 악물고 한 마디 한 마디를 씹어뱉듯 말했다.

“나는 널 좋아하지만 내 행복은 너 하나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난 친구들이 좋고, 내 주변 사람들이 같이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아펠도 그것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말을 들은 아펠은 옅게 웃었다. 얼핏 슬픈 표정으로 보이기도 했으나 머랭을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나와 눈을 맞춘 그는 그저 웃는 얼굴이었다.

“우리 운명에는 행복이 보장돼 있잖아. 그대로만 가면 행복해질 수 있는데, 발을 내딛는 게 무서워?”

“…….”

내가 피하고자 발버둥 쳤던 운명에 대해 아펠은 행복이 보장된 길이라고 말했다. 그 위화감에 나는 잠시 그의 말을 곱씹어야 했다.

아펠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와 섰다. 그러고는 오랜 시간 동안 펜대를 잡은 것 같은 손으로 내 뺨에 맺힌 눈물방울을 닦아주었다.

얄궂게도 그 손길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펠이 내 눈가에 입을 맞추며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힘들어질 것 같은 일은 내가 다 처리할게. 네가 마음 쓸 일 없게, 신경 쓸 일 없게 할게. 그냥 날 믿고 따라와 줬으면 좋겠어.”

내가 눈을 몇 번 깜빡이자 그제야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깨끗한 피부, 홀릴 것 같은 눈동자, 이마 위에서 사락거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이 계절에 어울리는, 겨울바람 같은 향기.

아펠은 미안하다는 듯 웃고 뒤로 물러나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일 장례식에 같이 갈래?”

‘와볼래?’

그 목소리가 순간 마탑에서 들었던 그의 목소리와 겹쳐졌다. 창가 앞에 서서 내게 손을 내밀던 소년 시절의 모습이 지금의 그보다 익숙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마음 정리할 시간이 더 필요해?”

“…아냐, 같이 가자.”

내가 대답하자 아펠이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참으로 무해하고, 행복해 보이는 미소였다.

* * *

눈이 오려나?

아침부터 하늘이 흐렸다.

나는 황제의 장례식에 걸맞은 암색 드레스를 입고 벨벳으로 된 천을 허리에 둘렀다. 내 페가수스 목걸이는 목깃 안에 넣고, 아펠에게서 받은 팔찌도 소매로 덮어 가렸다.

그러는 동안 내 환복을 도와준 하녀가 옆에서 모자를 챙겨주었다. 챙이 넓은, 검붉은 색의 모자였는데 거기에는 눈가까지 내려오는 망사가 붙어 있었다.

발갛게 부어오른 눈꺼풀을 망사로 가린 후, 마지막으로 검은 백합 브로치를 가슴께에 달고 방을 나갔다.

“어서 와.”

별궁 앞에서 기다리던 아펠이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그가 입은 예복은 어두운 군청색이었는데, 어깨를 가로질러 묶은 벨벳이 나와 같은 암회색이었기에 페어 룩 느낌이 났다.

아펠의 생일 연회 때도 언급했듯, 동반 입장이라는 것은 그와의 관계를 공적으로 선포하는 일이었다.

그는 내게서 받았던 은색 팔찌를 매만지며 소매를 정리하고 날 에스코트했다.

[밤하늘을 옮겨놓은 듯한 짙푸른 색의 옷과 대비되어, 그의 머리칼은 마치 사막의 달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제 영역에 누구도 들여놓지 않겠다는 듯 서늘했고 한편으로는 모래바람처럼 메마른 느낌이 났다.

크레페는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압도당한 느낌이었다.

그건 훈련된 몸가짐에서 느껴지는 엄숙함 때문도, 무표정과 딱딱한 옷차림으로 인한 거리감 때문도, 하다못해 비현실적일 만큼 잘생긴 그의 외모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그가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자연 앞에서나 느낄 법한 압도적인 존재감.

크레페는 통성명을 하기도 전에 저것이 슈트루델 제국의 황태자, 아펠 슈트루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폐물인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의 남주, 아펠 슈트루델.

그의 첫 등장은 그런 식으로 묘사됐다.

비록 내 생일과 황제의 장례식이라는 배경이 다르고, 작중에 서술된 나이와 지금 나이도 달랐지만, 그럼에도 아펠이 자아내는 특유의 분위기만큼은 원작을 읽으며 상상하던 것과 놀랄 만큼 비슷했다.

사막의 달이라고 했던가.

그래, 이제야 그 묘사가 좀 이해가 간다.

내심 한숨을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원작을 나름 재밌게 본 독자로서 기뻐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이 상황이 그리 달갑진 않았다.

내 인생도 피폐물로 가는 것 같아서.

그 이상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 직전,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

“…….”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숨이 막힐 듯한 적막에 순간 몸이 굳었지만, 사람들은 곧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나는 아펠의 팔짱을 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얼마 전 아펠의 생일 때 왔던 연회장이었으나 지금은 다른 장소가 아닐까 헷갈릴 만큼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영롱하다기보다는 웅장하고, 찬란하다기보다는 엄숙한.

아펠은 긴장한 기색 하나 없이 걸음을 내디뎌 정면의 단상으로 올라갔고, 나는 단상 한편에 위치한 의자에 앉았다.

단상의 안쪽에는 화려하게 치장된 제단이 있었는데, 나는 차마 그곳에 눈길도 주지 못했다.

* * *

이후의 제식에서 내가 할 일은 없었다. 아펠은 준비해 둔 추모사를 읽은 후 성직자의 지시에 따라 예를 올렸고, 곧이어 아이들이 줄지어 들어와 합창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쯤엔 아펠도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합창이 끝나면 연주자들의 레퀴엠이 이어질 거라고 했다.

합창이 이어지는 사이, 내 등 뒤에 가득한 귀족들도 서서히 저들끼리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무도회 때와 달리 분위기는 차분했고, 한편으론 경계심이나 긴장감까지 느껴졌다.

거기에 굳이 덧붙이자면, 그 긴장감은 장례식이라는 특성 때문이 아니라 아펠 때문인 것 같았다. 귀족들이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 님?”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여자가 얼굴을 가리던 부채를 접고 무릎을 굽혀 정중히 예를 표했다.

“보레크 후작가에서 왔습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상심이 크시겠어요.”

“…….”

왜 아펠이 아니라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나는 그녀의 의도를 모르는 만큼 섣부르게 입을 여는 대신 고개만 끄덕여 답했다. 내 경계심을 눈치챈 듯 그녀의 얼굴에 순간 난감해하는 기색이 스쳤다.

“어…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커스터드 귀족 학교에 최연소로 입학하셨다고요. 정말 대단하셔요. 가족분들도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계신다던데…….”

나는 여전히 말없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자가 당황한 듯 말까지 더듬었다.

“보, 보레크 후작가를 기억해 주세요. 추후에 정식으로 친분을 쌓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러고서 그녀는 치맛자락을 올려 인사하더니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그녀의 말은 장례식과 어울리지 않는 덕담이었고, 후작가의 사람이 백작가의 일원인 내게 할 만한 말도 아니었다.

뭐였나 싶어 고개를 갸웃하자 옆자리의 아펠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잘 받아주지 그랬어. 노력이 가상하잖아.”

노력?

그 단어를 곱씹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귀족들 중 제법 많은 이가 나를 보고 있었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눈인사를 했다.

“설마…….”

나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들이 모두 내게 인사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 *

“정말 잘 어울리시는 한 쌍이군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눈이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봄에 태어나셨다고 들었는데, 연회가 열리면 찾아뵈어도 될까요?”

보레크 후작가의 영애를 시작으로, 눈치만 보던 귀족들이 우리에게 인사하기 위해 줄을 지어 섰다.

하나같이 조문객이라는 입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뿐이었기에 그와 반대로 내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아펠과 처음 동반 입장을 했던 날엔 이렇지 않았다. 그들은 나와 아펠의 외모를 비교하며 수군거렸고, 내가 크렘을 버리고 황태자에게 붙었다는 비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수군거림은 그때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아펠의 태도도 이런 수순을 예상했다는 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네가 힘들어질 것 같은 일은 내가 다 처리할게. 네가 마음 쓸 일 없게, 신경 쓸 일 없게 할게. 그냥 날 믿고 따라와 줬으면 좋겠어.’

내가 신경 쓸 일 없게 한댔지.

어제 막 들은 그의 말과 함께, 이 장소에서 내 뒷말을 하다가 탑으로 끌려간 페디엇 백작가의 영애가 떠올랐다.

“…….”

하하. 그래. 훌륭한 폭군이 되었구나, 아펠.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아펠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는 애써 충동을 억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거리라도 있으신가요?”

듬직한 그림자가 내 앞에 드리웠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역시나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는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뷔슈 드 노엘 바니유입니다.”

바니유 공작.

제국 황제의 장례식엔 아마 며칠에 걸쳐 국내외의 인사들이 번갈아 방문하게 되겠지만, 첫날인 오늘은 아펠의 공문을 받은 고위 귀족들만 모였다. 당연히 바니유 공작이 거기에 빠질 리 없었다.

애초 내가 아펠과 동반 입장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와 만나기 위해서였기에, 나도 티 내지 않고 마주 인사했다.

“아, 바니유 공작님. 에클레어 언니의 아버님 되시죠?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런, 딸아이에게서 무슨 이야기를 전해 들으셨는지 궁금해지는군요. 조만간 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바쁘시겠지요?”

공작이 능청스럽게 말하며 내게 대답을 넘겼다. 내가 감시 없이 자유로이 나다닐 수 있을 만한 때를 묻는 게 분명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펠을 곁눈질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귀족과 인사를 주고받느라 바빠 보였다.

그래, 긴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다는 말 정도야 다른 귀족들도 많이 했으니까.

아펠이 특별히 바니유 공작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면 가볍게 넘길 만한 말이기도 했다.

나는 공작의 처세술에 내심 감탄하며 대답을 골랐다. 하지만 따로 대화할 수 있을 만한 때라니, 크바스와 아펠이 항상 곁에 있는 내게 그런 시간이 있을 리가.

“하하…….”

내가 어설프게 웃으며 얼버무리자 공작이 의미를 깨닫고 선수를 쳤다.

“저야 오늘이라도 좋습니다만, 아무래도 바쁘신 것 같으니 꿈속에서나 뵐 수 있겠군요.”

공작이 재밌는 농담을 했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러고서 자신이 전할 말은 다 전했다는 듯 아펠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나는 공작이 한 말을 되뇌고 있었다.

오늘, 꿈속. 그 말인즉…….

오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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