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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16)화 (116/181)
  • 116화 

    아펠에게서 짧게 들었던 ‘운명’이 떠올라 나는 고개를 숙였다.

    분명 원작에서 크레페가 어떻게 죽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앞뒤를 맞춰 생각해 보건대, 아무래도 크레페는 카눌레를 죽이는 데 실패한 후 아펠의 손에 의해 직접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크레페, 아니야. 걱정하지 마. 널 죽이다니, 현실에서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내 표정이 굳어진 것을 눈치챈 아펠이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는 아이를 달래는 게 서툰 사람처럼, 그래서 아이가 울음을 터뜨릴까 불안한 사람처럼 어떻게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려 안간힘을 썼다.

    “…몽블랑 후작님이 알고 있는 정보라는 게 뭔데?”

    그것만큼은 아펠에게서 직접 들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대답 없이 질문한 내가 고개를 들고 아펠의 눈을 마주 보았다.

    “나는…….”

    아펠이 잠깐 숨을 고르고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

    “황제의 친자가 아니야.”

    뭐?

    나는 미처 반문할 정신도 없이 입을 벌렸다.

    아펠은 내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설명을 이었다.

    “어머니가 황제와 결혼했을 때 이미 내가 배 속에 있었대. 직접 들은 건 아니고 신탁의 서에서 본 얘기지만.”

    “그, 그럼 아닐 수도 있잖아!”

    내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아펠의 판단이 착각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펠은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황제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건 확인했어.”

    그 표정을 본 내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황가에서 신탁의 서에 관한 전설은 유명해. 어머니가 살아생전 내 마탑 입성을 반대한 것도, 내가 신탁의 서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이었대.”

    “그럼 네가 마탑을 폐쇄한 건…….”

    “물론, 내 이야기가 쓰인 신탁의 서를 보는 사람이 생길까 봐서지.”

    아펠이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담담히 대꾸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도 황비는 아펠이 마법을 배우는 것을 반대했다. 크레페는 그 이유를 몰랐고 말이다.

    이번 생에도 마찬가지였다.

    아펠은 마탑을 폐쇄했고, 나는 그 진의를 지금에야 알았다.

    원작의 아펠도 똑같은 이유였겠지만, 크레페는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왕당파인 몽블랑이 어째서 아펠을 태자 위에서 끌어내리고자 했는지도.

    - 그럼 앞으로는 내 운명으로 장난치지 마세요. 아니, 저 말고 다른 사람들이라도!

    - 그래, 앞으로는.

    비로소 모든 단서가 모인 듯했다. 디몬과 대담한 그날 들었던 말뜻을 이제야 알았다.

    몽블랑이 신탁의 서를 보고 자신의 운명에 따르기로 결심한 순간, 아펠이 신탁의 서에서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순간.

    내가 디몬과 대화하기 전에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것이었다.

    “크레페, 솔직히 말할게. 몽블랑 후작이 운명과 달리 이 이야기를 끝까지 비밀로 해준 것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느껴. 하지만, 이 정보가 가져올 파문이 얼마나 클지는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슈트루델 신성 제국.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명분으로 대대로 이어져 온 권력.

    정통성에서 위배된다면 아펠의 황태자 직위는 당연히 박탈, 나아가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아니, 정말로?

    “아냐! 태자 위를 내놓자. 그리고 나랑 같이 도망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살 수도 있잖아.”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면 그 첫 단추까지 다 풀어버리면 그만이었다.

    나는 아펠의 옷자락을 꽉 붙들고 반쯤 애원하듯 다그쳤다. 내가 그의 어깨에 걸쳐주었던 로브가 미끄러져 내렸다.

    “크레페.”

    아펠이 내 손을 겹쳐 잡았다.

    그의 눈동자는 나를 가엾이 여기는 것 같기도 했고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슬픈 미소를 지으며 그가 짧게 말했다.

    “이미 늦었어.”

    “무, 무슨 소리야?”

    “어머니를 살리려고 했지만 살리지 못했어. 운명은 그리 쉽게 거스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지. 바꾸려면 근본을, 가능한 한 큰 것을 바꿔야 해.”

    그때 갑자기 황궁 밖이 분주해졌다.

    내가 창밖을 돌아보자 아펠도 분위기를 느낀 듯 손가락을 튕겼다.

    방음 역할을 하던 마법진이 사라짐과 동시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귀족도 없는 시간. 시종과 시녀, 하녀뿐인 엄숙한 황궁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수선스러움이었다.

    “크레페.”

    당황한 나를 두고 아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황제가 될 거야.”

    “전하!”

    말뜻을 파악하기도 전에, 흉갑을 입은 기사가 숨을 몰아쉬며 방문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 * *

    굳이 세간의 소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몽블랑은 황비뿐 아니라 황제까지 암살한 범인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처형은 확실시됐다. 아펠이 어째서 몽블랑을 쉽게 놓아준 건지, 이제 그 이유를 알게 된 셈이었다.

    “…조심하라고 했지?”

    “그게 할 말이에요?”

    얄미운 말에 내가 곧바로 맞받아쳤다. 크바스는 별 대꾸도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크바스는 아펠이 황제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동안 다시 내 호위를 맡았다.

    그는 비록 날 한 번 놓친 적이 있긴 했지만, 내가 별궁을 탈출한 것 자체가 비밀이었으니 굳이 다른 사람을 써서 말이 새어 나갈 구멍을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내가 또 도망치려 해봤자… 이번엔 아펠도 날 그리 쉽게 보내줄 것 같지 않고.

    “몽블랑 후작님의 행방은요? 아직 찾고 있대요?”

    “내가 그런 걸 왜 말해 주겠냐?”

    내 질문에 크바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평소보다도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아하니, 내가 그를 따돌리고 도주했던 것에 아직 앙금이 남은 듯했다.

    “조심하라고 한 건 무슨 뜻이었는데요?”

    내가 그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꺼냈다.

    “…크흠.”

    크바스가 대답 대신 헛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괜한 말을 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듯 보였다.

    “그것도 아직 말 못 하나요?”

    옅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돌아보았다.

    크바스는 내 말을 못 들은 척 빳빳이 세운 목깃을 매만졌다.

    그는 내가 붙여줬던 별명처럼 여전히 우람한 체구였기에 셔츠 차림이 그리 편해 보이진 않았다. 그 위에 기사임을 알리기 위한, 심장 부위를 가리는 약식 흉갑을 두르고 있어서 더 그렇게 보인 건지도 모른다.

    그러던 그가 목깃을 매만지던 손을 멈췄다. 손톱에 작은 브로치가 걸렸기 때문인 것 같았다.

    검은 백합 브로치.

    옷에도 그렇고 덩치에도 그렇고 썩 어울리는 장신구는 아니었지만, 애도의 표시였기에 황실 기사단으로서는 안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폐하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크바스는 언제 툴툴거렸냐는 듯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기다려봤자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진 않았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도움이 안 되네.

    그렇게 포기하고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을 때, 크바스가 입을 열었다.

    “황비님께서 서거하신 후로 황제 폐하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고 하더군.”

    목소리를 들은 내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때 폐하의 병환은 이미 심각했었다고 하지. 그래서 내가 기사단에 들어왔을 때도 대부분의 정무는 태자 전하의 몫이었대.”

    아펠의 방에 꽉꽉 들어차 있던 서류와 책들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그냥 일중독이구나 생각하고 넘어갔었는데, 이제 보니 아펠은 그때 이미 실질적인 황제의 역할을 하고 있던 듯했다.

    “폐하에 대해서는, 원래 있던 병환이 깊어진 것이니 그렇게 마무리될 수도 있어.”

    크바스가 담담하게 말을 맺었다.

    내가 끝이냐는 물음을 담아 크바스의 눈을 마주 보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덧붙였다.

    “물론,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지만.”

    “…….”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뭐, 궁내의 사람들에겐 알음알음 퍼진 말이기도 하고.”

    그것을 끝으로 크바스가 입을 다물었다.

    대답해 주어 고맙다는 말을 할 기력도 없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나는 아직도 어제의 일을 믿고 싶지 않았다.

    어제 황제의 소식을 들은 아펠이 곧바로 방을 나갔기에 제대로 답을 듣진 못했지만, 타이밍으로 보면 황제를 죽인 건 분명…….

    “하아…….”

    지금까지 발버둥 친 시간이 허탈할 지경이었다.

    그때 아펠이 문을 노크하고 들어왔다.

    “피곤해?”

    그의 발치에는 종종걸음으로 온 머랭도 함께였다. 크바스가 예를 표하자 아펠이 손을 저어 그를 내보냈다.

    “…일이 벌써 끝났어?”

    “응, 하녀의 증언이 나왔거든. 오래전에 몽블랑의 진상품에서 독이 검출된 적이 있대.”

    아펠은 가볍게 말하며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몽블랑 후작령은, 후작 자신이 뛰어난 마법사인 만큼 이동 마법을 이용한 화물도 많이 통과하는 지점이야. 하녀의 증언은 오래전 일이지만, 아마 이번에도 몽블랑의 사주 가능성이 제시된 선에서 마무리되겠지.”

    아펠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친부가 아니라고는 해도 한창 그의 장례 준비를 하다 온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게 영 어색해 보였다.

    더불어 말의 내용이라는 것도, 쉽게 받아넘길 만한 것은 아니었다.

    아펠이 선두에 나선 시점에서 이미 그에게 반기를 들 만한 사람은 없었다. 대외적으로 그는 황제가 남긴 유일한 피붙이이자 외동아들이었으며, 정통 황태자로서 곧 황제가 될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고위 귀족들에게 공문을 돌렸어.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장례식이 치러질 거야.”

    “끼잉.”

    머랭이 안아달라는 듯 낑낑거리며 아펠의 허벅지에 앞발을 올려놓았다.

    아펠이 녀석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눈높이까지 들고는,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머랭을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머랭의 뽀얀 꼬리가 고양이 장난감처럼 살랑거렸다.

    “그게 좋아?”

    내가 짧게 묻자 아펠이 머랭의 머리 너머에 있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다시 물었다.

    “넌 정말 나만 있으면 돼?”

    “무슨 뜻이야?”

    아펠이 머랭을 제 허벅지 위에 놓았다.

    나는 그의 평온한 표정에 오히려 눈을 질끈 감고 싶은 기분이었다. 한편으론 인지 부조화가 느껴지는 태도였지만, 아펠의 기분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펠이 말했던 그의 목표는 애초부터 우리가 함께하며 얻게 될 행복이었으니까.

    실제로 그 미래는 바로 코앞이었다. 몽블랑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하면 아펠은 아무 방해물 없이 황제 위에 올라 나랑 행복하게 승승장구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나도 그럴까?

    이 모든 사건을 겪고 난 후에도 나는 아펠을 전처럼 볼 수 있을까? 그가 꿈에서 느꼈다던 행복을 내가 온전히 느끼는 게 가능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회의적이었다.

    “나한텐 부족해. 너 하나만으로는 안 될 거야.”

    그렇게 말하고 나니 문득 내 스무 살 생일이 떠올랐다.

    카눌레가 아펠에게 대련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해 삐친 것, 아펠이 내게 선물해 준 디저트 산을 보고 에클레어가 질린 표정을 지은 것, 갈레트가 부지런히 디저트를 날라주던 것, 파타슈가 단 음식밖에 없는 홀을 둘러보다가 메슥거린다며 발코니로 도망친 것.

    분명 내가 원하는 행복은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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