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15)화 (115/181)
  • 115화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카눌레가 이곳을 시찰하러 왔다는 말을 듣고 내가 여기 올 것을 예상한 건가? 아니면…….

    바니유 공작이 배신을?

    순간 내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 났다.

    “…갈레트 드 루아 쉬제트가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갈레트가 제일 먼저 예를 취했다.

    마르크는 뒤늦게 아펠이 태자라는 것을 알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나 허리를 숙였다.

    내 앞을 가로막은 카눌레만 예를 갖추는 대신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허리춤에 찬 검이 흔들리고 있었다.

    “황족에게 검을 겨누는 불충을 저지를 생각은 아니겠지요?”

    아펠이 먼저 선수를 쳤다.

    눈썹을 움찔한 카눌레가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떼고 제 왼 가슴에 주먹을 올렸다.

    “카눌레 드 보흐도 쉬제트가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펠이 고개를 끄덕여 예를 받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가 가까워지는 만큼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어쩌면 힘으로 제압당할지도,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내가 마른침을 삼키자 아펠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렇게 긴장해? 내가 널 위험에 빠뜨리는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어떻게 알고 왔어?”

    제일 신경 쓰이던 질문을 꺼냈다.

    정보의 출처가 바니유 공작이라면 그곳에 머물고 있는 몽블랑이 잡혀 오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어쩌면 바니유 공작가에 아펠의 정보원이 있거나, 의심하긴 싫지만 젤라토가 돌아선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펠은 그에 대해선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보다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지 않아?”

    화제를 돌리기 위함이겠지만 분명 옳은 말이었다.

    바니유 공작이 말려서 미뤄놨을 뿐, 나는 애초부터 그와 나눠야 할 얘기가 있었다.

    그래, 그 일정이 당겨졌다고 생각하면…….

    “카눌레 님!”

    건물로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갑옷을 챙겨 입은 기사였는데, 그는 카눌레의 주변에 낯선 인물이 셋이나 있는 것을 보고는 할 말도 잊은 듯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거대한 늑대가 나타났는데…….”

    그 말에 카눌레가 아펠을 쳐다보았다.

    아펠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키우는 신수입니다.”

    “소란을 피우면 피차 좋을 건 없어 보입니다만.”

    카눌레가 짧게 말했다. 다소 무례한 듯한 어투였지만 플럼을 대할 때에 비하면 한참 양반이었다.

    “날뛰라고 지시한 적은 없으니, 제 이름을 대고 진정시키면 얌전해질 겁니다.”

    아펠도 그 어투에 대해 지적하지 않고 태연히 받아쳤다.

    “…….”

    카눌레가 기사와 아펠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머랭을 진정시키러 나가보라’는 아펠의 의도를 이해한 것이다.

    “마르크 경, 나가보시죠.”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직접 나가는 대신 마르크를 내보냈다.

    갈레트가 몸가짐을 바로 하고 물었다.

    “태자 전하께서 야심한 시각에 이곳까지 행차하신 까닭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실례했군요.”

    아펠이 부드럽게 답했다.

    “크레페를 데리러 왔습니다. 아시다시피 크레페는 아직 별궁에 머물고 있으니까요.”

    그건 은근한 강권이었다.

    내가 몽블랑과 함께 도망쳤다는 것도, 외부에서 머무른 일도 없던 것으로 할 테니 돌아가자는 의미.

    이 타이밍에 그의 제안을 거부하고 억지로 몸을 뺐다간 이번에야말로 다른 이들을 끌어들이는 결과가 될 것이 뻔했다.

    “나와 할 얘기가 남아 있잖아. 그렇지?”

    내가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는지 아펠이 자상하게 덧붙이며 손을 내밀었다.

    시리도록 파란 눈은 여전히 순한 빛이었고, 달빛처럼 고운 머리색은 비현실적일 만큼 찬란했다.

    표정과 손짓, 눈빛까지 전부 어릴 때와 마찬가지였다. 타인을 대할 때는 몰라도 나를 대할 때만큼은 항상 그랬다.

    그래서 잊고 있던 것이다. 그가 원작에서 폭군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말해 줄 거야?”

    “…그래.”

    썩 개운치 않은 대답이었지만, 적어도 아펠이 내게 거짓을 말한 적은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아펠이 프러포즈 승낙을 받은 것처럼 환히 웃었다.

    “다녀올게.”

    내가 오빠들에게 인사한 것을 마지막으로, 아펠은 춤을 추듯 내 옷자락을 휘감고 몸을 돌린 후 자연스럽게 마법진을 전개했다.

    잠깐 눈부신 빛에 눈을 깜빡이자, 마치 꿈이라도 꾼 듯 나는 별궁으로 돌아와 있었다.

    【 진실과 장례식 】

    별궁은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변한 것 하나 없었다. 처리하다 만 서류와 책상 위의 펜, 침대맡에 벗어둔 신발까지.

    ‘마치 꿈이라도 꾼 듯’이라는 수식어가 이렇게 잘 어울릴 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심지어는 아펠의 옷차림도 내가 도주해 온 그날처럼 얇은 실내용 로브만 걸친 채였기에, 확연히 추워진 기온만 아니었다면 정말 그간의 일이 꿈이 아닐까 긴가민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펠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게만큼은 여전히 따뜻한 눈빛으로, 아펠이 옅게 미소 지었다.

    “재밌게 놀다 왔어?”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놓고 품에서 벗어났다. 그의 미소에 조금 씁쓸함이 감돌았다.

    “그러다 감기 걸리려고.”

    내가 짧게 말하며 겨울용 로브를 벗어 그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잠깐 놀란 듯하던 아펠이 곧 눈을 접고 수줍게 웃었다.

    “하아…….”

    잔소리할 기력도 없었다. 한숨을 내쉰 내가 곧바로 침대에 앉아 말했다.

    “얘기해 준다고 해서 온 거야.”

    “몽블랑 후작은? 아무 말도 안 했어?”

    “안 했어.”

    내게 제일 먼저 물어본 게 ‘몽블랑 후작에게서는 아무 말도 못 들었냐’는 질문이라니.

    “…….”

    아펠은 내 즉답을 듣고 생각을 정리하듯 잠시 침묵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난 그 반응에 조금 놀랐다. 비밀을 숨기겠다는 몽블랑의 결정이 옳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그것만큼은 크레페 님께서 전하께 직접 들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타인에게 말을 흘렸다는 사실이 그분 귀에 들어가면, 아마 크레페 님께서 피하고 싶은 결말을 맞게 될 테니까요.

    내가 피하고 싶은 결말.

    그건 분명 아펠이 폭군처럼 행동하는 미래일 것이다.

    “무슨 일인데 그래?”

    나는 한층 조심스럽게 물으며 아펠의 팔을 잡아당겼다.

    근육이 잡혀 있는 팔은 분명 단단한 감촉이었지만 아펠은 힘없는 사람처럼 이끌려 내 옆에 앉았다.

    그러나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이며 시간을 확인하듯 창밖을 여러 번 돌아보았다.

    별의 움직임이 느껴질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가 말문을 열었다.

    “크레페, 넌 꿈을 꾼 적이 있어?”

    “응?”

    그 질문이 생각지 못했던 것이라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아펠이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다시 말했다.

    “예지몽 말이야.”

    예지몽?

    그 말을 듣자마자, 마법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예지몽을 꾼다던 속설이 뇌리에 스쳤다.

    나도 그렇게 마탑에 들어갔었고, 아펠도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다고 했었다.

    사실 내가 예지몽을 꿨다는 말은 거짓이었지만, 아무튼 그때 이야기를 떠올린 내가 물었다.

    “꿈에서 날 봤다고 했던 그거?”

    “맞아.”

    아펠이 배시시 웃었다.

    “어릴 때부터 내 꿈에선 항상 네가 나왔어. 크레페라는 이름도, 네가 망아지를 키우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지. 네가 디저트를 좋아한다는 것도 말이야.”

    그러고 보면 마탑에서 아펠이 날 위해 간식거리를 챙겨준 적이 있었다. 내가 단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전에 말이다.

    내가 단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 묻자, 그때도 ‘꿈에서 봤다’고 했던가.

    당시에 나는 그가 정확히 무슨 꿈을 꾸었는지에 대해 물어봤지만 아펠은 비밀이라며 눈웃음만 짓곤 했다.

    “봄에 보는 쉬제트가의 뒤뜰은 예쁘더라. 정자에는 등나무 꽃이 흐드러져 있고 후원 가득히 꽃향기가 났지. 너는 그 향기를 덮을 만큼 진한 메이플 시럽을 챙겼고.”

    아펠이 잠시 말을 멈추고 킥킥 웃었다.

    “처음엔 예지몽이 아니라 백일몽인 줄 알았어. 나는 한 번도 그렇게 마음 편한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거든. 아무 걱정 없이 너와 보내는 시간은 너무 즐거워서… 아니, 즐거운 시간이라기보단 그래, 행복한 시간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그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내 눈을 마주 보았다.

    “그래서 생각했어. 그 행복을 실현시키기 위해 널 찾아야겠다고.”

    예지몽을 현실로 만드는 게 꿈이었다는 소리였다.

    어쩐지 말장난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호응하고 다시 물었다.

    “그게 몽블랑 후작님이랑은 무슨 상관인데?”

    내가 아는 원작의 내용과 다르긴 해도, 그가 꿈에서 내 이름이나 브라우니의 존재까지 알았다면 분명 예지몽이 맞았다.

    그럼 가만히 있어도 이뤄질 미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꾸밀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

    아펠이 말을 고르듯 잠시 입을 다물고는 재차 창밖을 돌아보았다. 밖은 아직 어두웠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굳이 마법진을 전개했다. 목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방음진처럼 보였는데, 그것을 본 나는 이제부터 할 얘기가 본론임을 확신했다.

    “내가 마탑에 머랭을 데리고 간 날, 기억해?”

    아펠이 나와 눈을 맞추고 내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나직한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그건 내가 디몬과 만난 날, 정확히는 그 일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의 상황이었다.

    - 나 다시 가봐야 해, 몰래 빠져나온 거라. 이따 데리러 올 테니까 이 녀석 좀 맡아줄래? 부탁할게.

    나와 동갑인 아펠은 그때 겨우 일곱 살이었다.

    그날 생일을 맞은 그는 왠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고, 한편으로는 초조해 보였다.

    새벽까지 입고 있던 예복, 비에 맞아 흐트러진 머리, 넘어진 듯한 상처.

    하나부터 열까지 당황스러운 행색이었다.

    - 설명은 나중에 해줄게. 부탁해.

    그런 얘길 들었던 게 기억났다.

    하지만 나는 끝내 그날의 일을 다그쳐 묻지 못했다.

    디몬과 만나 대화한 게 바로 직후였던 만큼, 내 일만으로도 차고 넘치도록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지금껏 그때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던 스스로에 대한 책망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조금 얼굴을 찌푸리고 물었다.

    아펠이 살포시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너한테 거짓말을 한 적은 없어. 기사들과 실랑이가 있었고, 나는 머랭을 따라가다가 우연히 비밀 통로를 발견했지.”

    “그리고?”

    “…내 신탁의 서도.”

    그가 조금 굳은 얼굴로 손을 내리고 말을 이었다.

    “내용은 이래. 몽블랑 후작은 어떤 사실을 알게 된 후 나를 태자 직위에서 끌어내리려고 하지. 그러고는 내 약혼녀인 너를 인질 삼아 날 협박하는 거야.”

    “몽블랑이?”

    아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태자 위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너와 파혼하고, 결국엔 내가 직접 너를 죽이게 돼.”

    약혼녀인 크레페와 파혼.

    그건 분명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 나오는 내용이었다.

    비록 파혼 이유는 원작에서 나온 것과 달랐지만, 원작의 크레페만 모르고 있던 거라면 모순은 없었다.

    - 내가 널 죽이는 미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