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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14)화 (114/181)

114화 

* * *

“내 손님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카눌레가 정문을 지키고 선 불침번에게 간단히 해명하곤 우리를 안내해 들어갔다.

나와 갈레트는 혹시 얼굴을 들키기라도 할까, 후드를 코끝까지 눌러쓰고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아니, 도련님! 이렇게 갑자기 나가시면 곤란합니다! 제가 호위로 따라온 이유가…….”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한 남자가 카눌레의 앞을 가로막았다.

익숙한 하이텐션의 목소리.

오밤중에 뛰어나간 카눌레 때문에 적잖이 당황한 듯 그의 머리는 까치집처럼 뻗쳐 있었고 얇은 가죽으로 된 흉갑은 뒤집어 입었는지 목이 죄어 보였다.

분명 내 호위를 맡던 마르크였다.

아니, 마르크가 여기에 왜 와 있는 거야?

“나도 기사 지망생인데,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카눌레가 날파리라도 쫓듯 팔을 휘저었다.

그러나 마르크는 전혀 기죽지 않고 우리에게 주의를 돌렸다.

“이분들은……?”

마르크는 의심스러운 것이라도 본 듯 내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다리까지 오는 로브 차림에 얼굴도 가리고 있었으니 수상하다고 느낄 만은 했으나, 지금만큼은 그의 프로 정신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크흠.”

나는 카눌레에게 도와달라는 의미로 헛기침 소리를 냈다.

“자리부터 내주세요.”

카눌레가 손등으로 마르크를 가볍게 밀쳐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카눌레가 우릴 도와주려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는 그대로 제 방에 쏙 들어가 버렸다.

“음? 으음?”

눈알을 굴리는 건지 머리를 굴리는 건지, 마르크는 여전히 내 앞을 막아선 채 연신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어떻게 대처하지도 못하고 식은땀만 뻘뻘 흘리고 있었다.

물론 나도 속으로야 반갑다고 수십 번 인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르크의 성정을 보면 곧바로 큰 소리가 터져 나와도 이상할 건 없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과 별개로 어떻게든 그의 시선을 피하려 이리저리 목을 돌렸다.

으, 심장에 안 좋아!

“실례하겠습니다…….”

결국 나는 짧은 양해를 구하며 고개를 숙이고 마르크를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목소리를 낸 것이 실수였던 듯, 마르크가 경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크!”

그때 갈레트의 마법진이 공중에 떠오르며 마르크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순간 심장이 덜컥했지만 다행히 그의 목소리는 음소거를 한 듯 들리지 않았다.

나는 눈치 빠른 갈레트의 대처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결국 마르크를 포함한 우리 네 명은 카눌레의 방에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이곳은 저택도, 집무실이나 회의실도 아니었기에 티 테이블은 기껏해야 2인용 사이즈였고, 모여 앉은 사람들도 기사와 기사 지망생, 장성한 청년에 통통한 나였기 때문에 자리는 한참 부족했다.

부대끼는 기분에 괜히 엉덩이를 들썩이던 내가 도톰한 로브를 아예 벗어 던졌다.

휴, 이제 좀 낫네.

“이, 이곳엔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아저씨야말로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그는 보통 내 호위기사를 전담하고 있었고 카눌레와 붙어 다니던 기사는 따로 있었기에(물론 카눌레는 성인이 된 후로 거의 혼자 움직인다.) 마르크가 이곳에 있는 것은 의외였다.

“내가 루아 요새는 초행이라 호위를 붙여달라고 했어. 마르크 경은 이곳에 온 경험도 있고 출신지가 근처라 추천받았지.”

카눌레가 대신 설명했다.

“제가 아직도 변방에 차출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거든요. 거기에 질렸는지 단장님께서 저한테 머리 좀 식히고 오랍니다.”

마르크가 옆에서 거들었다.

기사단의 TMI를 새로 알게 된 내가 간단히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크 경이나 너나, 위험한 변방이 뭐가 그리 좋다고 계속 가려는 건지 모르겠다.”

갈레트가 한숨을 내쉬며 후드를 벗었다.

마르크는 그의 존재를 지금에야 깨닫고 다시 한번 헉, 소리를 냈다.

그 반응을 무시하고 카눌레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언제 돌아올 거야?”

왜 안 돌아오고 있느냐는 사정을 묻기도 전에 언제 올 거냐는 질문이라니.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려나, 하는 생각에 잠시 뜸을 들이자, 카눌레가 별안간 내 어깨를 붙들고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돌아와라.”

이 인간이 웬 구남친 같은 대사를?

“빨리, 돌아오겠다고 해! 아니면 형이라도 괜찮으니까, 응?”

카눌레가 이번엔 갈레트를 향해 애원했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그러고 보니 아까 나무에 매달려 있던 날 보고도 카눌레가 제일 처음 한 말은 당장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자 없던 걱정이 샘솟기 시작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혹시 은연중에 들은 소문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내가 걱정스레 물었다.

“에이미가…….”

카눌레가 인상을 찌푸리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언성이 높아지는 건 금방이었다.

“에이미가 날 안 놔준다고! 밤낮으로 업무 처리하느라 바빠서 그간 훈련을 하나도 못 했어!”

“하나도 못 하다뇨. 잠까지 줄이고 훈련하시느라 피곤한 거지. 일일 훈련량을 채우겠다고 한숨도 안 주무신 건 본인 선택이셨잖습니까?”

얄밉기까지 한 팩트 폭력에 카눌레가 마르크를 째려보았다.

눈치 없이 부언한 마르크가 뒤늦게 헛기침을 했다.

“지, 진정해, 오빠.”

나는 혹시라도 방 안의 소란 때문에 누군가 들어오기라도 할까 싶어 그를 진정시켰다. 말을 듣고 보니 카눌레의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어진 것 같았다.

카눌레가 언짢은 표정으로 혀를 차고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우리 얘기는 어떻게 알고 있어?”

잠시 숨을 돌리는 타이밍을 가로채고 갈레트가 물었다.

카눌레가 흥, 콧바람을 내쉰 후에 답했다.

“크레페는 별궁에, 형은 공방에. 하지만 언제 돌아올 거냐고 서신을 보내도 별궁에선 아무 답이 없었지. 피오르 님도 형이 공방에서 사라진 지 꽤 됐다고 했고… 뭐, 그분은 워낙 바빠 보여서 더 묻기도 뭐하더라.”

그러고서 카눌레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돌리고는 테이블에 한쪽 팔꿈치를 올려 삐딱한 자세를 취했다.

“이렇게 몰래 올 이유가 있었어?”

그 말에 갈레트가 마르크를 쳐다보았다.

마르크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앞이라도 지키고 있죠.”

* * *

마르크가 나가 있는 사이에 갈레트는 대충 상황을 설명했다.

몽블랑의 누명에 대한 얘기에서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던 카눌레는, 우리가 극비로 바니유 공작가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한 다음에는 갑자기 손을 들어 말을 멈췄다.

“하아, 난 그런 머리싸움 질색이야. 검 들고 설치는 게 낫지.”

그럴 거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갈레트는 더 할 말이 있는 듯한 기색이었지만 이 분위기에 굳이 긴 이야기를 먼저 꺼내진 않았다.

“근데 바니유 공작가면 좀 위험한 거 아냐? 오크로시카 영지 바로 밑에 있잖아.”

오크로시카?

내가 질문 대신 고개를 갸우뚱했다.

“크바스 형네 말이야. 그래서 형이 바니유가랑 어릴 때부터 안면이 있던 거라고 하던데.”

“그렇구나. 별 관심이 없어서 몰랐네.”

“너 말야…….”

카눌레가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도 딱히 고의적으로 크바스를 무시하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기에, 굳이 그 반응에까지 신경 쓰진 않았다.

“바니유가에서 뭘 하고 있었는데?”

카눌레가 툭 던지듯 물었다.

그 말투만 들어도 ‘내가 영주 업무랑 씨름하는 와중에 팔자 폈구나’ 하는 심정이 느껴졌다.

그간 마음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억울한 취급이긴 했으나 나는 말을 가렸다. 실제로 우리가 한 일 중에 당당히 말할 만한 중요 업무는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거나 작전을 검토하거나 하는 일은 있었지만, 정작 정보 수집은 몽블랑과 키슈, 바니유 공작의 몫이었으니까.

하지만 갈레트의 대답은 당당했다.

“바다 보고 있었지!”

“…놀러 간 거야?”

카눌레가 반박할 기운도 없다는 듯 허탈하게 말했다.

갈레트가 생글거리자 카눌레는 더 이상 태클 걸 의욕도 사라진 듯 고개를 가로젓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언제 돌아오려고? 이 사태가 언제쯤 마무리될지 생각은 해봤어?”

“…….”

그 질문을 들은 갈레트가 날 쳐다보았다. 몽블랑의 탈출을 주도한 게 나였으니만큼 내 의견을 들어보려는 듯했다.

사실 불안하긴 했다.

실질적으로 아직 내게 피해는 없었지만, 그렇게 정보력 좋던 바니유 공작이 증거를 찾는 데 아직도 애먹는 상황이다.

만일 작전이 잘못되면 이 발버둥도 모두 의미 없는 일이 될 게 뻔했다.

몽블랑이야 당연히 사형이겠고, 키슈는 잘돼 봤자 마탑 연구원에서 영구 제명, 마법을 배우려던 파타슈의 미래도 덩달아 불투명해짐과 동시에 바니유 공작과 젤라토, 에클레어는 더 이상 공작가 출신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쉬제트 백작가에 피해가 미칠 가능성도 제로가 아니고.

아빠는 이 사달을 어떻게 생각하려나…….

문득 떠오른 얼굴에 내가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겨울이 가기 전에는 결판을 내야겠지. 오래 끌수록 위험해질 테니까.”

그때 익숙한 마나가 느껴졌다. 설마, 하면서도 나는 곧바로 로브를 뒤집어썼다.

“크레페.”

역시나 갈레트도 뭔가를 느낀 듯 후드를 도로 눌러 쓰고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곧이어 창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늑대다!”

카눌레가 얼굴을 가린 우리 둘을 번갈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나도 그의 어깨 너머로 바깥을 볼 수 있었다.

아래에 펼쳐진 상황을 확인한 내가 눈을 크게 떴다. 이번 사태는 갈레트의 허풍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백호만큼 희고 위압감이 느껴지는 몸집, 달빛에 빛나는 검은 눈동자.

언뜻 몬스터로 보이는 그것은…….

“머랭?”

“뭐?”

이 순간까지도 디저트 얘기냐? 라는 얼굴로 카눌레가 날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설명해 줄 여유가 없었다.

내가 곧바로 몸을 돌리고 나가는 문을 열었다. 앞을 지키고 있던 마르크가 깜짝 놀라 내 쪽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

나는 넋 나간 사람처럼 제자리에 멈춰 섰다. 마르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펠…….”

“뭐 하는 거야?”

내가 넋 나간 사람처럼 아펠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카눌레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르크도 카눌레도, 내 눈앞에 선 아펠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있었다.

“겨울? 그렇게까지 미룰 필요가 있어?”

그 목소리와 함께, 흐릿한 존재감이 선명해졌다.

“데리러 왔어, 크레페.”

“플럼!”

그의 입장에서는 본명보다 익숙할 가명을 부르며 카눌레가 날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없을 텐데.”

아펠은 오랜 친우의 집에 마실이라도 나온 듯 편히 얘기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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