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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13)화 (113/181)
  • 113화 

    사실 그 이후 몽블랑과 둘만 얘기할 기회가 없진 않았다. 갈레트가 몽블랑과의 대화를 피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몽블랑에게 추가로 들어야 했던 대답은 전부 내가 먼저 들은 후 갈레트에게 전해주었다.

    이를테면, 엄마의 암살을 사주한 진범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고서 나는 아펠이 왜 몽블랑을 없애려 하는지에 대해 다시 질문했는데, 그때의 대답은 별로 속 시원하지가 않았다.

    - 그것만큼은 크레페 님께서 전하께 직접 들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타인에게 말을 흘렸다는 사실이 그분 귀에 들어가면, 아마 크레페 님께서 피하고 싶은 결말을 맞게 될 테니까요.

    역시 스무고개라도 하는 기분이라니까.

    “크레페, 준비 다 했어?”

    “아, 잠깐만.”

    벌써 약속한 시간이 된 듯 갈레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키슈를 내보내고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 * *

    얇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로브는 분명 겨울용이었는데도 어딘가 찬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아니면 비 온 후의 겨울밤이라 더 춥게 느껴지는 건가?

    “끄응.”

    다행히 바니유 공작령도 이곳도 이제 비가 그쳐 있었지만 추위를 머금은 바람은 날카로웠다.

    나는 가슴께의 매듭을 더 꽉 여미고 갈레트의 옆에 붙어 섰다.

    “여기 맞지?”

    갈레트가 내게 물었다.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좌표는 오빠가 계산한 거잖아.”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내 말에, 갈레트는 뭐라 대꾸하지도 못하고 얼떨해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물론 나도 마음 같아서는 걱정 말라며 토닥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이곳이 루아 요새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사실 여기 온 게 십 년도 더 된 옛일이기도 했고, 주변은 어두운 데다가, 요새라는 게 원래 다 고만고만하게 생겼을뿐더러, 이곳은 요새의 돌벽 바깥쪽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 왔다고 다 기억하면 내가 천재지!

    “일단 벽 따라서 가보자.”

    내가 갈레트의 팔을 잡아당겨 길잡이 노릇을 했다.

    물론 갈레트와 내 로브에 달린 후드를 콧등까지 오게 푹 덮어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건물이 보일 때가 됐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말고 코를 훌쩍거렸다.

    우리는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숲이 우거진 외부의 길을 걷고 있었다. 깊은 숲인 데다 산책 길도 아니었지만 주변은 몬스터들의 기척 없이 조용했다.

    사실 나는 석재 건축물에, 특히 이런 곳을 한밤중에 거니는 것에 대해 그리 좋은 추억이 없었다.

    비에 젖어 축축해진 길이나 눅눅한 냄새 같은 것에도 말이다.

    그래서 내 몸이 자꾸 움츠러드는 게 찬바람 때문인지 안 좋은 경험 때문인지, 또는 특유의 적막함 때문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여기 맞다.”

    내게 이끌려오던 갈레트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발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벽의 임시 버팀대인 목재를 향해 있었는데, 거기에는 엄마의 성씨인, 루아 가문의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갈레트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문양을 손가락으로 쓸고는 고개를 들었다.

    “아, 그렇네. 다행이다.”

    한시름 놓은 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연스럽게 주변에 대한 경계심도 조금 누그러졌다.

    이곳은 내가 처음 본 요새였다.

    거대한 문과 높은 벽을 보고 위압감을 느낀 기억이 생생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내 키가 컸기 때문인지 지금은 그때만큼 무섭지도, 커 보이지도 않았다.

    졸업한 초등학교에 찾아온 기분이라고 하면 되려나.

    허리에 검을 차고 있던 엄마와 날 감싸준 몽블랑, 거기에 키슈와 파타슈와 브라우니의 활약까지.

    새삼스러운 감상에 빠진 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밤중의 숲이 스산하긴 해도 이 너머에는 몽블랑의 영지가 있을 것이다.

    여기가 변방도 아니고, 카눌레가 시찰을 마치기도 했을 테니 주변 관리나 보안 정비 같은 것도 걱정할 건 없었다.

    “저게 본부였던 것 같아.”

    내가 눈에 익은 건축물을 발견하고 손가락을 뻗었다.

    갈레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멈춰 섰다.

    “카눌레가 머무는 방도 저기인 거지?”

    “응, 그럴 거야.”

    사실 여긴 작은 요새였기에 본부라고 할 만한 건물도 하나뿐이었다.

    증축했다는 보고를 받은 기억은 없었기에 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안에는 어떻게 들어가지?”

    갑자기 생긴 계획이다 보니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저 건물에 들어가는 건 둘째 치고, 당장 외부의 벽을 넘어 요새에 진입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비교적 안전한 내륙이라곤 해도 요새이니만큼 경계 근무를 서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오빠만 불러낼 수 있는 방법은 없으려나…….”

    내가 뒤늦게 고민하던 그때, 갈레트가 바닥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들었다.

    “뭐 하려고?”

    갈레트가 대답 대신 팔을 위로 뻗었다.

    설마 여기서 저 창문을 맞히겠다는 건가?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내가 토끼 눈을 떴다.

    각도를 보든 거리를 보든, 어지간한 근력과 컨트롤이 아니면 시도도 못 해볼 짓이었다.

    내가 뭐라 탄성을 내뱉기도 전에 갈레트가 턱을 들고 손을 뒤로 젖혔다.

    후드가 흘러내리며 이를 악문 입이 드러나더니, 곧 활에 장전한 화살처럼 돌멩이가 빠르게 쏘아졌다.

    탁. 데구루루.

    “…….”

    그러나 갈레트가 힘차게 던진 돌멩이는 건물에 닿기는커녕 벽을 넘지도 못하고 우리 발치로 돌아왔다.

    …마법 실력이 얼마나 발전했든, 역시 신체 능력과는 별개구나.

    갈레트의 첫 검술 대회 때가 생각날 정도의 부끄러움이었다.

    “괘, 괜찮아. 마법을 쓰면…….”

    내가 뒤늦게 그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려 안간힘을 썼다.

    민망하기로는 나보다 더할 갈레트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냐, 마나에 반응하는 몬스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최대한 조심해야지.”

    그도 그렇다.

    “그럼 역시 우리 얼굴을 알 만한 기사에게 부탁하는 게 제일 낫겠네. 찜찜하긴 해도 우리가 수배범은 아니니까 별일 없을 거야. 그냥 비밀로 해달라고 하고…….”

    “크레페, 나무 탈 줄 알아?”

    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것처럼, 주변을 돌아보던 갈레트가 뜬금없이 물었다.

    “엥?”

    “빨리. 내가 밑에서 받쳐줄게.”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오빠가?’라고 되물을 뻔했다.

    하지만 갈레트는 부득불 나를 숲으로 데려가선 그나마 작아 보이는 나무 밑에 자리를 잡았다.

    갈레트가 양손으로 무릎을 짚고 바닥에 단단히 섰다.

    “내가 생각이 있어.”

    “으응…….”

    그래, 원작 공인 천재가 하는 말이니 다 깊은 생각이 있는 거겠지.

    나는 그의 행동에 의문을 표하기를 관두고 로브 자락을 품에 모아 쥔 후, 낑낑거리며 그의 등 위에 기어올랐다. 활동하기 편한 바지를 입고 온 게 다행이었다.

    “억.”

    짧은 단말마는 못 들은 척했지만.

    “다 올라왔어.”

    “좋아. 잘 숨어 있어!”

    고개를 끄덕인 내가 빗물이 맺힌 손을 털고 굵은 가지를 꽉 잡았다. 곧 갈레트도 큼지막한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나무가 미끄러운 듯 헛발질이 몇 번 있긴 했지만, 앓는 소리와 함께 갈레트는 꾸역꾸역 자리를 잡고 앉는 데 성공했다.

    “휴우…….”

    잠시 숨을 고른 갈레트가 내게 눈짓을 하고는 쉿, 소리를 냈다.

    긴장 어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갈레트가 요새를 향해 깊은숨을 들이켰다.

    “으아아악! 늑대다! 늑대가 나타났다아아!”

    “…….”

    머릿속이 하얘졌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나는 말을 잃고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양치기 소년의 한 구절이 머릿속을 스친 순간이었다.

    * * *

    요새에 잠깐 동안 작은 소란이 일어나더니, 곧 카눌레를 포함한 몇 명이 벽을 따라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이상 없습니다!”

    “여긴 늑대가 서식하는 숲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주민 중 누군가가 장난을 친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아예 무시하는 것보다야 낫겠죠.”

    짐짓 진지하게 말한 카눌레가 대답을 마치자마자 하품을 했다.

    아무래도 갈레트의 외침이 잘 자고 있던 카눌레를 깨운 모양이었다.

    탁.

    그때 갈레트가 얇은 나뭇가지를 꺾어 던졌다.

    아주 작은 소리였으나 카눌레는 곧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곤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빠른 대응에 감탄할 새도 없이, 카눌레의 빨간 눈이 우리를 발견한 듯 잠깐 커진 것이 보였다.

    “…….”

    “어디까지 수색할까요?”

    “아니, 이만하면 될 것 같군요.”

    카눌레가 딱 잘라 말했다.

    “예?”

    그의 갑작스런 태세 전환에 기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돌아가 보셔도 될 것 같다는 말입니다. 저는 조금 더 주변을 살피다 가겠습니다.”

    카눌레는 그렇게 핑계를 대고 동행한 기사 두 명을 먼저 돌려보내려 했다.

    “하지만…….”

    기사들이 카눌레의 안전을 걱정하는 듯 망설였다. 하지만 상사인 카눌레의 지시에 항거하지는 못했다.

    아마 카눌레의 검술 실력이 이미 유명하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아무쪼록 무리하진 마십시오.”

    카눌레의 끄덕임을 마지막으로 기사들이 등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나는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기둥만 한 나뭇가지를 껴안고 찰싹 달라붙어 나무의 일부인 척 몸을 숨기고 있었다.

    다행히 숲이 어두운 데다 이곳까지 나온 것이 소수 인원들뿐이었기에 들키지는 않았다.

    그들이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감추고, 그 발소리와 인기척마저 사라진 후에야 카눌레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

    카눌레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느냐든가, 그간 잘 먹고 잘 살았냐든가, 기가 막힌다는 태도나 취할 줄 알았는데 카눌레의 보폭과 낌새를 보니 어쩐지 기분이 저기압인 듯했다.

    찔리는 구석이 있는 내가 구태여 먼저 손을 들어 인사했다.

    “어, 안녕. 갑자기 사라져서 미…….”

    “야, 너 당장 돌아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카눌레가 나무 기둥 부분을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당장 오라고오오!”

    “으아아, 왜, 왜 그래애!”

    개중에 작달막한 크기이긴 했지만 나무는 나무였다.

    한 명이 흔들어봤자 내가 있는 위까지 느껴지는 진동 따위는 없었지만, 나는 지레 겁먹고 우는소리를 냈다.

    “쉬잇!”

    갈레트가 나무에서 훌쩍 내려왔다.

    올라갈 때와는 다른, 제법 시원스런 몸놀림이었으나 나는 그의 잇새로 작게 윽, 소리가 삐져나온 걸 눈치챘다.

    “그래, 대체 그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건데?”

    카눌레가 걱정하는 말 하나도 없이 물었다. 반항적인 태도와 까칠한 말투를 보니 이제야 카눌레 같았다.

    갈레트가 제 발목을 몇 번 주무르다 말고 입을 열었다.

    “얘기 들은 거 없어?”

    “뭔 얘길 들어?”

    카눌레가 짜증스럽게 답했다. 그래도 대놓고 화를 내진 않는 걸 보니, 우리의 용건이 범상치 않은 일일 것임을 짐작은 한 듯 보였다.

    “몽블랑 후작님 소식은 들었지?”

    왕당파인 아빠와 친분이 있던 데다 갈레트의 후견인이기도 했던 몽블랑.

    그의 이름을 꺼내자 카눌레가 입을 다물었다.

    카눌레가 세상 돌아가는 일에 아무리 관심이 없다곤 해도, 수배령까지 떨어진 마당에 몽블랑의 소식을 못 들었을 리 없다.

    “사람들 모르게 온 거야. 조용한 데로 가자.”

    갈레트도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이 이상 자세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카눌레가 더 트집 잡지 않고 앞장섰다.

    “오, 오빠, 잠깐만!”

    내가 다급히 그들을 불러 세웠다.

    “가기 전에 나 좀 내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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