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갈레트는 우리 저택이나 마탑에서 본 적 없는 장서가 이곳에 몇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공부 삼매경에 빠져 있었는데, 실험을 해보자며 우리에게 외출을 종용하는 일도 잦았다.
주 목적지는 물론 첫날 방문했던 항구였다.
“비 오는데요?”
파타슈가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쪽은 안 오셔도 되는데요?”
갈레트가 곧바로 맞받아치자 파타슈의 얼굴에 발끈한 기색이 스쳤다.
그들이 한판하기 전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한테 먼저 얘기해 볼게요.”
문을 닫으며 돌아보자, 말다툼하는 그들 사이에 끼인 브라우니도 익숙한 일이라는 듯 달관한 표정으로 콧바람을 내쉬고 있었다.
사실 외출 자체는 그리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날 에클레어가 우리에게 안내해 줬던 항구는 사유지였으니까.
나도 최근에 들은 사실이긴 했지만, 그곳은 바니유 공작이 가명으로 사용하는 이름의 소유라고 한다. 아펠의 ‘플럼 바클라와’ 같은 것 말이다.
심지어 바니유 공작은 그 가명을 이용해 상단을 만들었다던데, 그 수완에 나는 내심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오가는 길이 시장통이라 문제일 뿐 우리에게 내린 수배령도 없고, 민간에 얼굴이 알려진 사람도 없었다.
아마 에클레어도 흔쾌히 동행해 주겠지?
하지만 태평한 예상과 달리, 에클레어의 방 앞에 도착한 나는 그녀의 방문을 노크해도 될지부터 고민해야 했다.
“넌 그 말을 믿어? 아버지가 뭐라 하셨든, 솔직히 나는 반대야. 전하께서 왕당파 귀족에게 왜 누명을 씌워?”
나중에 다시 올까, 아니면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뗄까.
문틈으로 새어 나온 젤라토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내적 갈등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 봤자 어떻게 됐냐는 질문을 받고 곤란해하는 내 모습만 상상됐기에, 나는 뜸 들이는 대신 곧바로 문을 두드렸다.
“애초에 누명이라는 것도 증거가 없…….”
“크흐흠.”
대놓고 들으라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야 젤라토가 나를 발견하고 말을 멈췄다.
“…미안, 크레페.”
“괜찮아요. 저희야 폐만 끼치는 입장인데.”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웃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수는 없는 입장 아닌가.
“피해 가지 않도록 할게요.”
내가 슬쩍 덧붙이자 젤라토는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발을 빼기엔 한참 늦은 시점이니, 내 말이 빈말로 들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냐, 둘이 얘기해. 그리고 아버지가 너랑 갈레트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시더라. 난 일하고 있을 테니 둘이 이야기 끝나면 가볼래?”
“네,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젤라토가 눈짓으로 인사를 받고 먼저 방을 나갔다.
“미안. 오빠가 요즘 업무에 치여서 스트레스가 많은가 보더라.”
에클레어가 한숨을 내쉬며 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 아냐. 날카로워질 만하지.”
내가 곧바로 손을 내젓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공작가에 처음 공간 이동을 해 온 날에도 젤라토는 새벽까지 서류와 씨름하고 있었다.
바니유 공작이 우리 일로 정신없는 사이에 젤라토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을지 생각하면 고개를 바로 들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영주업이 얼마나 바쁜지 내가 모르는 바도 아니고.
“무슨 일이야?”
“응? 아니…….”
에클레어의 질문에 내가 잠깐 뜸을 들였다.
공작이 우리에게 볼일이 있다면 나가긴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 * *
“카눌레 오빠가요?”
내가 반사적으로 되묻자 우람한 체구의 바니유 공작이 고상하게 웃었다.
“그럼 두 분이 여기 계시는데 누가 영주 업무를 처리하겠습니까?”
듣고 나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사 지망생인 카눌레가 책상에 앉아 영지의 민원과 씨름하는 모습이 영 상상이 안 됐다.
“루아 요새라면…….”
“갈레트 님은 그쪽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하셨지요? 크레페 님은 방문한 전력이 있으실 텐데, 기억나실지 모르겠군요.”
7살 때 일이니 기억하지 못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나는 보통의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니만큼 그날의 일을 잊었을 리 없었다.
심지어 내가 죽을 뻔했던 곳인데.
“기억나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몽블랑을 쳐다보았다.
내 시선의 이유를 깨달은 듯 몽블랑은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공작을 대신해 용건을 정리했다.
“카눌레 님께서 시설 점검차 루아 요새로 시찰을 나가셨다고 합니다. 저택보다 감시망이 허술할 테니, 이번 외출을 기회 삼아 그분께 안부를 전하고 오시면 어떨까 싶어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 갈게요!”
나는 고민하지도 않고 냅다 대답했다.
“몽블랑 후작령이 근처이니 소수 인원으로… 아니, 저랑 오빠만 다녀오는 게 좋겠네요. 괜찮지?”
내가 고개를 들어 갈레트를 쳐다보았다.
“포트나 리시버가 없으면 혼자선 조금 벅찬데…….”
“출발지와 도착지를 모두 바니유 공작가로 설정하면 문제없을 겁니다. 이곳에는 포트와 리시버가 다 있으니까요.”
갈레트가 난색을 표하자 몽블랑이 곧바로 대안을 제시했다.
나는 그 말대로 하면 되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는데, 갈레트는 속 시원히 대답하지 않았다.
“오빠.”
내가 갈레트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눈치를 주었다.
“…알았어.”
안전 문제 때문인지 그의 대답은 썩 시원찮았으나 분명 긍정의 답이긴 했다.
우리를 걱정하고 있을 카눌레에게 안부를 전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좋습니다. 그럼 오늘 밤에 바로 출발하시는 걸로 하죠.”
“오늘 밤이요?”
공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바니유가의 보좌관이 들어와 공작의 귀에 뭐라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인 공작이 날 보며 말했다.
“카눌레 님께서 지금 막 루아 요새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내일 아침에 쉬제트 백작가로 돌아가신다고 하니, 오늘 밤밖에 시간이 없겠지요?”
공작이 당연한 얘기를 왜 묻느냐는 듯 태연히 대답했다.
…공작이 아군이라 다행이다.
* * *
가깝지도 않은 영지의, 사소한 외출에 대한 소식까지 입수한 공작의 정보력에 경악할 법도 했으나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생긴 일정인 만큼 급히 채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카눌레한텐 뭐라고 말하지?
어차피 카눌레는 마탑 소속이 아닌 만큼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수야 없겠지만, 나는 당장 몽블랑 후작에 대한 얘기를 어떻게 꺼낼지가 고민이었다.
사정을 들은 갈레트가 그에게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아직도 생생했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대놓고 적의를 표하지는 않지만…….
“에휴.”
짧은 한숨을 내쉬며 옷장에 들어 있던 것 중 제일 큼지막한 로브를 꺼냈다.
보온성을 위한 얇은 가죽 재질에 전신을 가릴 수 있을 만한 길이.
이 정도면 되겠지, 하고 로브를 손에 든 그때 누군가 내 방문을 노크했다.
“크레페 니임?”
“네, 들어오세요.”
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렸다.
얇은 수첩을 손에 든 키슈가 익숙하게 들어와 말했다.
“얘기 들었어요. 안전한 거 맞죠? 파타슈도 동행시키는 게 좋지 않겠어요?”
“괜찮아요. 저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파타슈 님이 대처해 주셔야죠. 두 분께는 수배령이 내려져 있잖아요.”
“그도 그렇지만, 역시 몽블랑네 근처라 괜히 신경 쓰여서 말이에요.”
키슈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내 말에 키슈는 어떻게 걱정을 안 하냐면서 잠깐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럴 때 보면 파타슈보다 어린 것 같다니깐.
“그 얘기만 하러 온 건 아니죠? 오늘 질문은 뭐예요?”
내가 웃음을 삼키고 묻자, 키슈가 멋쩍은 미소를 짓고는 가져온 수첩을 펼쳤다.
“흠흠.”
나는 아직 옷장을 뒤지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키슈는 짐짓 목을 가다듬고 곧바로 질문했다.
“저번에 마탑 지하의 제단과 인생 서고가 이어져 있었다고 했죠? 직접 문을 여신 건가요?”
“음, 문을 열었다기보다는 빨려 들어갔다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호오.”
그녀는 인터뷰를 따는 취재 기자처럼 진지하게 눈을 빛내며 대답을 받아 적었다.
나는 그쪽에 주의를 기울이는 대신 로브 속에 입을 만한 옷들을 찾아 침대 위에 꺼내놓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키슈의 질문은 몇 번 더 이어졌다.
내가 신탁의 서를 본 것은 물론이고 인생 서고에까지 들어가 봤다는 얘기를 한 후부터 키슈가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엔 그녀의 관심이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제법 익숙해진 상태였다.
키슈의 학구열이야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안에 그림자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완전 하얀색.”
“세상에…….”
“말도 안 된다고요?”
“네! 저는 정말 서고나 성녀 같은 얘기를 들을 때마다…….”
“지어낸 얘기인 줄 알고 그쪽 전공을 포기했다고요?”
“맞아요!”
키슈는 내 경험담을 들을 때마다 프로 방청객처럼 감탄하곤 했다.
며칠째 한결같은 반응이었기에 나는 연신 그녀의 말을 가로채며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인생 서고는 페가수스나 펜리르 같은 신수보다 훨씬 미신에 가까운 이야기라 했으니 그녀의 반응도 이해가 안 될 건 아니었다.
“근데 설마 서고에 가본 사람이 바로 옆에 있을 줄이야……. 아, 크레페 님이 디몬 님을 직접 본 적은 없다고 하셨죠?”
“네에…….”
내가 말꼬리를 늘이며 얼버무렸다.
키슈한테는 미안하지만, 내가 만일 디몬을 봤다는 얘기를 해야 한다면 갈레트나 아펠에게 먼저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럼 혹시 서고에서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진 않던가요?”
“자, 오늘은 여기까지!”
적당히 둘러대다가 꼬투리를 잡힐까 무서워 질문을 막았다.
키슈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지만, 내게 할 일이 있다는 걸 아는 만큼 쉽사리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키슈가 수첩을 덮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문득 물었다.
“근데 제 얘기, 후작님과 공유하시나요?”
“네?”
갑자기 떠오른 질문이었다.
내가 옷장 문을 닫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자, 키슈는 무슨 뜻이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얘기요?”
“아니, 후작님께서도 인생 서고에 관심이 많은가 해서요. 전에 반응이 좀 이상해 보이기도 했고…….”
갑자기 내게 협조하겠다고 약속한 그날의 얘기였다.
“아아, 아마 가족 때문일 거예요.”
키슈가 어설프게 웃으며 입술을 뗐다.
“가족이요?”
“몽블랑 같은 고위 귀족이 마법 서약을 하는 건 드문 일이잖아요. 그만큼 어머니가 신실하셨다고 하는데… 음, 그 이상은 집안 사정이니 제가 얘기하긴 좀 그렇네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캐묻기도 뭐해서 나는 적당히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