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11)화 (111/181)
  • 111화 

    “그때 마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무슨 일이라니?”

    “그분이 왜 마탑을 폐쇄한 거냐고.”

    “어…….”

    내가 순간 말을 잃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 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비록 아펠에게서 직접적인 대답을 들은 적은 없었지만, 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의 힘을 독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이라고.

    하지만, 애당초 그 이유가 맞기나 할까?

    나는 당연히 이번 생에서도 같은 이유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런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껏 몽블랑이 우리 엄마를 죽인 범인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크레페?”

    “응? 아, 아니… 글쎄, 다음에 물어봐야겠다.”

    결국 나는 이번에도 대답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갈레트의 질문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을, 아니 아펠 슈트루델을 믿을 수는 있어?”

    직설적인 물음에 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여차하면 반역을 논의하는 일도 불사하겠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 실수하신 겁니다. 전하께서 저를 왜 그냥 보내줬는지 생각하면…….

    - 그런데 플럼이 너희를 못 막았다고?

    - 조심해.

    오늘, 어제, 그전.

    그동안 들었던 말이 순차적으로 떠올랐다.

    그건 모두 아펠을 경계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 걱정해 주는 거야?

    - 미안해. 빨리 눈치 못 채서.

    - 나 여기 있잖아. 너도 내 옆에 있어줘.

    - 약속 꼭 지킬게.

    “…….”

    내가 대답을 미루고 있는 동안에도 갈레트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오늘 어떻게든 자신이 납득할 만한 답을 얻어가려는 듯했다.

    믿을 수 있냐고?

    그의 질문을 되뇌며 나는 피식 웃었다.

    “믿을 거야.”

    내 대답을 들은 갈레트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에 내가 뒷말을 이었다.

    “아무튼 아펠은 내가 설득해 볼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래…….”

    갈레트가 뭔가 말을 이으려 한 그때, 누군가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브라우니를 품에 안은 파타슈였다.

    “식사하시래요.”

    “아, 네. 감사합니다.”

    내가 옷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레트를 돌아보자 그는 입을 다물고 나를 마주 보았다.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

    혹시 중요한 얘기였을까 싶어 내가 물었다.

    말없이 날 마주 보던 갈레트가 피식 웃으며 옷을 털었다.

    “아니야. 나도 네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감동적이기까지 한 그 말에, 나는 생긋하는 웃음으로 보답해 주었다.

    그리고 어린 아펠이 해사하게 웃던 모습을 영영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너였구나, 크레페.

    【 루아 요새 】

    전적인 협력을 맹세한다던 말마따나, 이후 몽블랑의 행동은 그간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변했다.

    키슈가 전해주길, 바니유 공작과 함께 자신이 황비를 시해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준비하느라 바쁘다고 했다.

    갑작스런 변화가 의문스럽긴 했으나 긍정적인 방향이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나 역시 몽블랑과 대화할 거리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펠이 왜 그에게 누명을 씌우려 하는 건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듣지 못했다.

    나는 새삼 한숨을 내쉬며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비 오네.”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내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겨울옷 같지 않은 차림이었는데도 따뜻한 것을 보니 바니유가의 서재에는 보온 마법이 걸려 있는 모양이었다.

    감기 걱정은 접어두기로 하고, 나는 턱까지 괴고 본격적으로 창밖의 풍경을 구경하기로 했다.

    아펠의 생일인 늦가을도 지나 이제는 완연한 겨울이었다.

    나무는 어두운 고동색, 돌담은 탁한 회색.

    눈 오면 볼만하겠네.

    문득 그 풍경을 떠올린 내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갈레트가 빙긋 웃으며 말을 붙였다.

    그는 옆자리에서 마법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옆에 앉은 내가 보기엔 마법 공부라기보다는 낙서에 가까웠다.

    “응? 아아, 마탑에서 아펠이랑 눈을 퍼 먹었던 게 생각나서.”

    “…동생 키워봤자 소용없다더니.”

    대답을 들은 갈레트가 허탈하게 중얼거리고는 보란 듯 어깨를 움츠리며 종이에 펜을 끼적였다.

    물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수식들이었다.

    한글로 내 인생 공략집을 쓸 때 나를 옆에서 지켜보던 카눌레의 기분이 이런 것이었겠구나.

    오냐오냐해 줬다가 갈레트의 투정이 더 심해질 것이 우려되었기에 나는 그를 못 본 척, 멍하니 비 내리는 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괜찮은 걸까?”

    “물론이지. 공작님도 그러셨잖아. 오히려 섣불리 움직이는 게 위험할 거라고.”

    갈레트가 공책을 넘기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속 모르는 대답에 나는 입술을 샐쭉거렸다.

    그야 나도 답답해서 그런 거지, 상황을 몰라서 한 말이 아니었으니까.

    우선 몽블랑과 키슈의 도주 소식은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었고 그들에 대한 수배령도 내려져 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당장이라도 아펠을 찾아가려 두 팔을 걷어붙였는데, 갈레트의 말마따나 내게 그 정보를 전해준 공작이 나를 극구 말렸다.

    아펠을 만나기 전에 몽블랑의 무죄를 증명할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정이야 모를 것도 아니었고, 우리를 숨겨주고 있는 이상 이 일은 바니유 공작과 젤라토, 에클레어까지 연관되어 있었기에 나는 그 만류를 뿌리치지 못했다.

    여차하면 다 같이 공범으로 처벌받는 건가? 아니, 이미 공범이겠지.

    “그래도 내가 저지른 일인데, 너무 한가하면 양심에 찔린단 말이야.”

    “어린애는 그런 걱정하는 거 아니에요~”

    갈레트가 피식 웃으며 한 손으로 내 양 뺨을 꾹 눌렀다.

    나는 아직도 나를 애 취급하는 그가 얄미워 인상을 찌푸렸다.

    “우뿌는 걱쭝 안 돼?”

    그에게 뺨을 눌려 발음이 엉망이었다.

    내가 붕어 주둥이로 말하자 그제야 갈레트가 손을 놓아주었다.

    “이미 저질러진 일인데 걱정해서 뭐 해. 앞으로 어떻게 할지나 정해두면 되지.”

    그가 가볍게 손을 털고 다시 펜을 잡았다.

    “어떻게 할지, 너는 벌써 정한 것 아냐?”

    “그거야, 뭐…….”

    그야 몽블랑의 탈출을 도운 시점에서 내 갈 길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갈레트에게 그 사실을 확인받은 내가 김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갈레트가 여봐란듯이 마주 웃었다. 제법 듬직한 모습에 장난스러운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참 나, 언제 이렇게 컸어?”

    카눌레라면 당장 인상을 찌푸렸겠지만, 갈레트는 울컥하는 표정을 짓더니 도로 펜을 내팽개치곤 내 머리를 꽉 껴안았다.

    “누가 할 말인데! 으휴, 크면 오빠랑 결혼할 거라면서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게 엊그제 같건만…….”

    확인차 말해 두자면 그런 적 없다.

    나는 제멋대로 기억을 조작한 갈레트에게 새삼 충격을 받아 내심 고개를 저었다.

    “두 분은 여전하시네요.”

    서재 문이 열리며 파타슈가 등장했다.

    얼굴엔 질린 표정이 반이었고 체념한 표정이 나머지 반이었다.

    나는 멋쩍게 갈레트를 밀어내고 헛기침을 했다.

    “크흠, 키슈 님이 보내신 거예요?”

    “그렇죠.”

    파타슈는 학교가 아니면 글자를 보지 않았기에, 키슈가 그의 등을 떠밀어 서재에 보내는 일은 자주 있었다.

    이번에도 파타슈는 뻔뻔스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납득하지 못했다. 공부하러 왔다던 그의 품에 브라우니가 안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쀼!”

    삑삑이 인형 같은 콧소리를 내며 브라우니가 공중을 박차고 내게 날아왔다.

    나는 럭비공 받듯 녀석을 안고 거의 반사적으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브라우니는 왜요?”

    “아, 공작님께 페가수스에 대해 말씀드리고 오는 길이에요. 이제 한배를 탄 사이니까.”

    이렇게 바니유 공작의 정보력이 +1 되는 건가.

    그러잖아도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공작발(發) 정보에 그의 소식통이 경탄스럽던 찰나였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곤 브라우니를 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럼 공작님이랑 얘기는 끝난 거예요?”

    “저한테 얘기할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브라우니 보호자 자격으로 간 거죠.”

    파타슈가 가볍게 대꾸하고 갈레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쉬제트가의 도서관처럼 넓은 서재를 쭉 둘러보고는, 바로 앞에 손을 뻗어 책상에 있던 책 한 권을 슬쩍 펴보았다.

    갈레트가 가져다 놓은 서적이었고, 당연히 무지하게 어려웠다.

    파타슈가 인상을 찌푸리며 표지를 팍 덮었다.

    “풋.”

    파타슈가 날 쳐다보았다.

    “아, 죄송해요.”

    짧게 사과하자 파타슈가 못 본 척하겠다는 듯 시선을 내리고 손톱으로 책상을 톡 쳤다.

    브라우니가 쫄래쫄래 다가가서는 배를 보이고 누웠다.

    서재에 온 것치고는 읽을 책 한 권도 가져오지 않은 그의 가벼운 양손(브라우니가 들려 있긴 했지만)이나, 들어오자마자 펼쳐진 책장도 무시하고 앉아선 브라우니를 부르는 행동이나.

    공부 싫어, 책 싫어, 하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양 때문에 자꾸만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하지만 웃으면 실례일 테니까…….

    “크흠. 여러모로 죄송하네요. 저 때문에 학교도 못 가시고.”

    “저는 공부 안 하니까 살 것 같은데요, 뭐.”

    파타슈의 무뚝뚝한 말투와 달리 그의 손은 재롱부리는 브라우니를 이리 빙글 저리 빙글 돌리느라 바빠 보였다.

    어릴 때부터 변하지 않은 그의 무심한 태도에 어쩐지 위안되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우리 얘기가 퍼진 것도 아니고.”

    파타슈가 뒷말을 이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아펠은 몽블랑과 키슈에 대해서 수배령을 내렸지만 누가 두 사람을 탈출시켰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역시 크레페 님을 보호하기 위해서겠죠?”

    파타슈가 질문했으나 굳이 확인시켜 주기엔 낯부끄러워 어설프게 미소 지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따로 덧붙일 말도 없었다.

    다행히 파타슈도 대답을 구하는 대신 다음 말을 이었다.

    “어쩐지 조금 이상하긴 했어요. 도망쳐 올 때도 꼭 우릴 일부러 보내준 것 같았거든요. 아마 그것도 크레페 님 덕분에…….”

    “…….”

    파타슈의 말을 듣다 말고 생각에 빠졌다.

    - 그런데 플럼이 너희를 못 막았다고?

    - 아펠 슈트루델을 믿을 수는 있어?

    아니, 떠올리지 말자! 괜히 불안해지기만 하지.

    스스로에게 되뇌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브라우니가 날 쳐다보며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는 게 보였다.

    파타슈가 헛기침을 하고 위로했다.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벌써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겠어요.”

    “감사…….”

    “됐다!”

    내 말을 끊고 별안간 갈레트의 환호성이 들렸다.

    “새로운 마법진이 나왔어! 시험하러 가자. 빨리!”

    “또?”

    나는 파타슈와 대화하던 것도 잊고 갈레트에게 난색을 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