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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10)화 (110/181)

110화 

잠깐 비틀했던 그가 금세 자세를 바로잡고 주먹을 쥔 오른손을 가슴에 얹은 뒤, 허리를 조금 숙여 정식으로 예를 표했다.

“…두 분께는 면목 없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이든, 저를 동정하시기 때문이든, 제게 목숨을 빚졌다는 부채감 때문이든, 이제 저를 살리기 위해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목숨에 미련은 없으니, 지금이라도 황궁에 돌아가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구해주실 필요도, 도와주실 필요도 없습니다.”

긴말을 하는 동안에도 손가락을 말아 쥔 그의 손에서는 여전히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지고 있는 그 핏방울을 최면에 걸린 듯 바라보았다.

- 네가 믿을 정도면 좋은 사람이겠지.

에클레어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몽블랑을 믿어서, 그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를 도운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는 내 생명의 은인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죽음을 묵인한 사람이기도 했다.

몽블랑에게 가진 내 감정을 한 단어로 정의하기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죽음을 묵인할 수 없는 건…….

“웃기지 마요.”

내가 으르렁거리듯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진짜 후작님 살리려고 이런 짓을 저지른 것 같아요?”

향수? 동정심? 부채감? 아니면 단순한 친분 때문에?

아니, 내게는 그따위 것보다 직접적인 이유가 있었다.

몽블랑이 내 첫사랑이기 때문도, 그가 내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도, 그를 좋은 사람이라 생각해서도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변하지 않은 나의 바람.

미래를 바꾸는 것, 운명을 거스르는 것.

즉…….

“저는 아펠이 폭군이 되는 미래를 바꿀 거예요.”

아펠이 폭군이 되는, 그 망할 ‘운명’을 바꾸는 것.

그게 내 목표였다.

“그러니까 죽고 싶다고 멋대로 아펠을 끌어들이지 마세요. 쓸데없는 걱정 안 해도, 미래를 바로잡고 나면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든 난 상관도 안 할 테니까!”

“…….”

너무 직설적으로 말했나 싶은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따져보면 몽블랑이 내 생명의 은인이긴 했으니까.

하지만 순간적으로 든 걱정이 무색하게도, 잠깐 놀란 듯하던 몽블랑은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하! 그랬군요. 그래서…….”

그래서?

그다음에 이어질 말이 문득 신경 쓰였으나 몽블랑은 문장을 마치지 않았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던 사이, 몽블랑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재차 입을 열었다.

“실례했습니다. 그간 제멋대로 행동한 것에 대해 사죄드려야겠군요.”

“예?”

그는 속상해하기는커녕 짐짓 마음을 확실히 한 듯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건 내 쪽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몽블랑이 마저 말을 이었다.

“크레페 님의 생각은 잘 알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크레페 님의 목표를 위해 전적으로 협력해 드릴 것을 맹세합니다.”

몽블랑이 진지하게 말하며 재차 예를 취했다.

기사가 아니더라도 ‘맹세’라는 단어는 결코 가볍지 않았기에, 나는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네?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그럼 됐어요.”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눈치를 보고 있던 키슈가 슬그머니 다가와 몽블랑의 상처를 살폈다.

갈레트도 내 팔을 잡고 저를 보게 하더니, 내 뺨에 난 상처를 확인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치유 마법진을… 아니, 올라가서 연고라도 바르자.”

다리는 멀쩡했지만 갈레트는 고집스럽게 나를 부축하듯 바로 옆에 붙어 걸었다.

그의 호의를 거절하느라 괜한 기 싸움을 하기 싫었던 나는 얌전히 걸음을 옮겨 식당 문을 열었다.

“저, 이제 식사를 준비해도 괜찮으실까요?”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말을 붙였다.

멋쩍게 긍정하려던 찰나, 그녀의 시선이 내 뒤편으로 향했다.

나는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혼자 양심에 찔려 마구 헛기침을 했다.

갈레트가 나를 대신해 말했다.

“청소부터 부탁하지.”

* * *

역시 물어내야겠지? 엄청 비싸 보이던데. 쉬제트 백작가에 잔고가 얼마나 남았더라.

침실에 혼자 남은 내가 그런 생각에 몰두하는 동안 갈레트가 연고를 챙겨 올라왔다.

“미안해. 많이 아파?”

“응? 아냐, 그냥 스친 건데, 뭘.”

갈레트가 잔뜩 시무룩해져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평소보다도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갈레트가 말없이 연고를 내 뺨에 발라주었다.

마나의 영향을 안 받는 체질 덕에 마법에 의한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부서진 물건으로 인한 상처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더 심한 부상을 당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 해야 할 것이다.

“…마음 상했어?”

그가 먼저 입을 열 것 같지 않았기에, 내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뭐가?”

“오빠한테 말도 안 하고 후작님 도망치게 해서.”

“…….”

직설적으로 답하자 갈레트는 잠깐 말이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기도 했고, 연고를 바르는 데 집중하느라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몽블랑이 직접 엄마를 죽인 건 아니었던 만큼 내 원망과 분노를 온전히 감내할 의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냉정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엄마는 내게 너무나 중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아마 갈레트도 같은 마음으로 몽블랑을 원망하는 거겠지.

…수다 떨 기분이 아니려나.

그렇게 생각한 내가 금방 말을 돌리려던 그때, 갈레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삐쳤다. 대체 신탁의 서에서 뭘 봤던 거야?”

뭘 봤냐니.

“우리가 다 같이 불행해지는 내용?”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대충 얼버무리려는 것으로 보였는지 갈레트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진짜야?”

“음, 대충은.”

무책임한 답을 들은 갈레트가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그 표정이 어쩐지 카눌레와 닮아서, 나는 드물게도 그들이 친형제가 맞기는 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미래를 봤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확히 하자면 나는 신탁의 서를 본 적이 없었다. 내가 크레페의 삶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전생에서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디몬과 만난 서고에서 『포동포동한 여주는 인기가 없나요』라는 제목의 책을 본 기억은 있지만 내용을 제대로 본 적은 없으니까.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어차피 운명을 바꾸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아마 세부적인 내용은 달라져도 마침내 다 같이 불행해지는, 피폐물의 진행은 그대로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20년 묵은 미련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하하호호 지지고 볶는 로판물에 들어왔어야 했다니깐!

“으휴.”

갈레트가 속상하다는 듯 옅은 한숨을 내쉬며 연고 뚜껑을 닫았다.

나는 그가 더 상심하기 전에 금방 말을 돌렸다.

“근데 치유 마법은 못 쓰는 거야?”

“응? 아니, 너 마법 안 통하잖아.”

그러고 보니 갈레트와 카눌레는 내 체질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굳이 연고를 찾아온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순간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내가 곧바로 고개를 갸우뚱하고 중얼거렸다.

“아펠이 나한테 치유 마법 써준 적 있는데…….”

“그랬어?”

갈레트가 내 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그의 마나는 기름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 듯 겉돌기만 할 뿐, 내게 별다른 변화를 불러오진 않았다.

“안 되는데?”

“그냥 오빠가 마법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 아니고?”

“어쭈.”

갈레트가 장난스럽게 맞받아치며 내 멀쩡한 쪽 뺨을 콕 찔렀다.

물론 나의 놀리는 말에도 여유롭게 대처할 만큼, 그의 마법 실력은 객관적으로 출중했다.

바니유 공작가로 우리를 이동시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원래 귀족가에는 마법으로 인한 암살을 대비하기 위한 보안 마법진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적 여유도 없는 상황에, 심지어 혼자서 그걸 뚫어버리다니.

확실히 마나의 절대적 양이나 밀도를 보면 아펠이 그의 우위에 있는 건 사실이겠지만…….

역시 우리 오빠야!

“헤헤.”

어쩐지 장성한 아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에 참지 못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체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마법을 팍팍 쓰는 거야? 역시 천재는 다른가 봐.”

새삼스레 기분이 좋아져 잔뜩 띄워주는 말을 했다.

갈레트가 어릴 때처럼 미소 짓고는 갑자기 귀에 하고 있던, 한쪽뿐인 귀걸이를 풀었다.

“너도 해볼래?”

“뭔데?”

그가 마법을 쓸 때마다 눈에 띈 것을 보면 평범한 장신구가 아니라 마법 물품일 것이다.

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것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귀걸이는 세로 양 끝이 뾰족하게 커팅 된 큼지막한 토파즈로, 보는 각도에 따라 투명한 노랑부터 어두운 주황까지 다양한 색으로 보이도록 가공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봐도 마법진은 보이지 않았다.

“스승님이랑 같이 연구한 마구(魔具).”

갈레트가 짧게 대답하며 내게 귀걸이를 채워주었다.

귀를 뚫지 않아도 착용이 가능한 듯 딸깍 소리를 내며 귓불이 무거워졌다.

“어떻게 하는 거…….”

질문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이 핑 돌았다. 마치 머릿속에 컴퓨터 수십 대를 밀어 넣은 것처럼 수많은 정보가 물밀듯 쏟아졌기 때문이다.

“어, 어지러워!”

나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후다닥 귀걸이를 떼어냈다.

갈레트가 덩달아 당황한 듯한 얼굴을 하고 귀걸이를 다시 가져갔다.

“어지러웠어?”

“으으, 이게 뭔데?”

“그동안 내가 배운 마법진을 기록해 둔 거야. 요령만 익히면 쉬운데…….”

귀걸이를 도로 채운 그가 보란 듯 검지를 폈다. 그의 손끝에서 거미줄처럼 얇은 마나가 춤추듯 움직이더니 금방 기하학적인 모양을 만들어냈다.

일종의 계산기? 데이터베이스 관리 프로그램 같은 건가?

아직도 속이 메슥거렸기에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배를 쓸어내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그럼 나도…….”

내 몸을 겉도는 마나를 체내에 흡수하고 증폭시킨 후 다시 방출하는 흐름.

만일 그 복잡한 과정을 공식화해서 쓸 수 있다면 내 체질로도 강한 마법을 사용하는 게 가능해질 것이었다.

그뿐인가, 마나를 쓰다가 갑자기 기절하는 일도 없겠지!

“만들어 줄까?”

말만 하라는 듯 갈레트가 곧바로 대꾸했다.

“…아냐.”

하지만 나는 곧 침음하며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갈레트보단 내게 더 효용 가치가 있을 것 같긴 했지만, 내가 저것을 잘 쓸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저것을 같이 연구했다던 피오르도 귀걸이를 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아마 갈레트만 쓸 수 있는 물건이라 그런 게 아니었을까…….

“그분은 마탑에서 만난 거지?”

갈레트가 물었다.

나는 딴생각에 빠져있느라 그가 말하는 ‘그분’이 누군지 곧바로 떠올리진 못했으나, 애초부터 그가 존대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금방 눈치채고 대답했다.

“응, 맞아. 처음엔 아펠이 황족인지도 몰랐는데, 어쩌다 보니 금방 친해졌어. 몇 개월 못 보고 헤어지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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