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애써 미소 짓자, 공작도 듣고 싶은 얘기는 다 들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게 말해 주어 감사합니다. 시장하실 텐데 곧 저녁을 준비시키도록 하지요. 아마 한두 시간쯤 걸릴 겁니다.”
그러고서 공작은 오늘까지 처리해야 할 서류가 남아있다며 양해를 구하고 먼저 식당을 나갔다.
나는 문이 닫히는 것까지 본 후에야 마음을 놓고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그래도 신고당할 일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네요.”
물론 완전히 마음을 놓긴 이르겠지만, 적어도 대놓고 경계해야 했던 아침보다는 나았다.
에클레어가 날 돕겠다던 게 거짓말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러게요.”
키슈가 맞장구를 쳤다.
나는 잠시 말없이 키슈를 쳐다보았다.
도주부터 지금까지 워낙 정신이 없었다 보니 이렇게 조용한 분위기는 오래간만이었다.
“…공작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키슈는 우리들이 깊이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했지만, 그래도 아예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음, 일단 공작님께선 계속 중립에 서실 것 같아요. 사정을 얘기하면 조사는 도와주신다고 하던데… 정작 몽블랑이 말을 안 해서 별 진전은 없었네요.”
다행히 키슈는 가볍게 털어놓았다.
민감한 얘기도 아니다 보니, 같이 도망치는 신세에 알아두면 좋을 정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키슈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으휴! 저 녀석도 참, 대체 무슨 비밀이 그리 많은지… 아니, 그건 크레페 님도 마찬가지였죠?”
키슈는 잊고 있었다는 듯 화살을 내게 돌리고 의자까지 움직여 나를 향해 앉았다.
“신탁의 서라든가 죽음을 방관했다든가, 그게 다 무슨 얘기래요?”
내가 별말을 다 했구나.
몽블랑이 투옥된 탑에서 키슈를 무시하고 얘기한 부작용이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던 내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입을 떼려던 그때, 식당의 문이 열렸다.
나는 바니유 공작이 깜빡 잊고 간 게 있었나, 하며 돌아보았으나 입장한 건 그가 아니었다.
“크레페? 얘기 다 끝난 거 맞지?”
옷을 갈아입고 온 갈레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마 얘기가 끝났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내가 나타나지 않자 걱정돼서 찾아온 모양이었다.
“아…….”
평소의 키슈였다면 갈레트의 저런 습성을 기특하다는 듯 동조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갈레트 님, 죄송한데 잠깐 저희끼리 얘기하면 안 될까요?”
키슈가 곤란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양해를 구했다.
“아뇨, 괜찮아요.”
내가 끼어들어 저지했다.
나의 ‘괜찮다’는 말에 키슈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물론 내게도 갈레트의 방문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를 돌려보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그에게도 고백하기로 결심한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으니까.
내 대답을 들은 갈레트는 이런 분위기가 어색한 듯 한 번 고개를 갸우뚱하곤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로 다가왔다.
껌딱지 같은 그의 행동이 유별나게 느껴질 만도 했으나, 키슈는 곧바로 자리를 양보하곤 맞은편으로 가 몽블랑의 옆자리에 앉았다.
“안 좋은 얘기 들은 건 아니지?”
갈레트가 걱정스레 내 손등을 감싸 쥐었다.
안 좋은 얘기라…….
에클레어와 십여 년간 겪었던 일을 모조리 정리해 이야기해 주느라 입이 아프다는 말을 할까 잠깐 고민했다.
물론, 그런 얘기나 하려고 갈레트를 들라 한 건 아니었지만.
나는 맞은편에 앉은 몽블랑과 키슈를 쳐다보았다.
“그냥 지금 말할게요.”
타이밍 좋게도 이곳에 있는 건 모두 마탑 생활을 했던 사람뿐이었다.
그 말인즉, 내가 마탑에서 겪은 일을 이들에게는 털어놓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턱을 들고 갈레트와 눈을 맞췄다.
“신탁의 서를 봤어, 인생 서고라는 곳에서.”
“서, 서고라고요?”
키슈가 금방이라도 식탁을 넘어올 듯 상체를 기울였다.
그 기세에 놀라서 키슈를 돌아봤던 갈레트가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신탁의 서를? 소예언서말이야?”
정확히 하자면 신탁의 서를 본 것보다 디몬과 만난 게 더 충격적인 소식이겠지만, 나는 본론을 꺼내기 위해 그 얘기는 좀 더 묻어두기로 했다.
“응. 지금까지 말 안 해서 미안해.”
“아니, 미안할 거야 없지만…….”
갈레트가 말끝을 흐렸다.
그로서는 갑자기 저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당황스러울 것이다.
나는 마탑을 나온 후로도 종종 신탁의 서나 디몬과 관련된 설화에 대해 나름의 조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혹시나 쓸 만한 정보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빙성 있는 얘기를 찾기는 어려웠다.
애초에 표본이 많은 것도 아니고 경험한 것이 진짜였다는 증거도 없었다.
구전되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대부분 임사 체험을 했다는 식의 개인적인 경험담에서 그쳤을 뿐, 그러다가 개인이 사이비 종교를 만들었다는 식의 기록도 심심찮게 발견될 정도였다.
어쩌면 갈레트에게도 내 말이 뜬구름 잡는 걸로 들리려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와 반대로 키슈는 내 말이 착각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세상에, 그럼 갈레트 님만 빼면 여기 사람들 다 신탁의 서를 봤던 거네요? 이렇게 흔한 일이었다니…….”
키슈가 의자에 다시 엉덩이를 붙이며 중얼거렸다.
새로운 정보를 얻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키슈 님도 보셨어요?”
“으음, 그걸 봤다고 해야 하나, 못 봤다고 해야 하나.”
키슈는 멋쩍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이고 말했다.
“어쨌든! 서고까지 들어갔다니, 그건 진짜 놀랐다고요. 신탁을 받은 성녀도 아니고!”
어쩐지 얼버무리려는 것처럼 보였기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몽블랑은 그녀의 옆에서 어쩐지 괴로운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그에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갈레트가 대답을 재촉했다.
“네 예언서에서 뭘 봤길래 그래?”
“…….”
그 질문에 내가 반사적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나는 ‘갈레트가 죽는 미래를 보았다’며 피오르에게 도움을 구한 적이 있었지만, 사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내가 그보다 일찍이 지켜내고 싶었던 건…….
“나만 본 건 아닌 것 같더라.”
나는 씁쓸하게 웃고 몽블랑을 쳐다보았다.
“제가 얘기할까요?”
내 목소리가 이렇게 차가울 수도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내 시선 끝에서 몽블랑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마땅히 대답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고, 그런 모습이 낯선 것도 아니었다.
그는 오늘 내내 묵언 수행을 하는 사람처럼 숨죽이고 있었으니까.
- 얌전히 죽음을 받아들일 거라고 전해주십시오.
탑에서 들은 목소리가 아직 생생했다.
아무 결심도 없이 나온 말인 것 같지도 않았다. 그건 누구보다 그와 가까이 지냈던 키슈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몽블랑을 탈출시키기 위해 그를 기절까지 시켰다는 걸 보면.
그런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그의 존재감은 마치 유령처럼 흐릿했다.
빛나는 듯한 흰머리와 시린 눈동자도 금방 안개로 사라져 버릴 사람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첫인상에서 느낀 위압감이나, 그로 인해 느꼈던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었다.
어쩌면 이번에도 몽블랑은 시체처럼 침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그러지 않으리라 믿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체감으로는 억겁의 시간인 것 같던 수 초 후, 몽블랑이 바짝 마른 입술을 뗐다.
키슈가 몽블랑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반응을 보니 그녀도 모르고 있던 듯했다. 오직 나만 알고 있던 것이다.
몽블랑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소예언서에는 갈레트 님의 어머니, 수플레 님의 최후에 대해 쓰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죽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묵인했고요.”
“뭐?! 야, 너…….”
키슈가 갈레트보다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몽블랑은 갈레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몽블랑의 청회색 눈동자는 담담한 것 같기도, 체념한 것 같기도 했다.
갈레트의 시선을 피하거나 눈살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잘못을 고백하는 사람답지 않은 뻔뻔한 표정에 욕설을 퍼붓는 대신, 갈레트는 가만히 팔을 뻗었다.
그의 귀걸이가 흔들렸다.
갈레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순식간에 그의 손끝에서 물감이 번지듯 다각진이 피어났다.
마법진은 그의 귀걸이와 같은 호박색이었고, 맹렬히 회전하는 마나는 기계처럼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악!”
몽블랑의 옆자리에 있던 키슈가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갈레트의 마나는 유리로 만든 거미줄처럼 가늘고 날카로웠다.
농도가 옅은 대신 섬세하고 화려했으며, 파타슈와 달리 바람 그 자체를 닮아있진 않았으나 그 흐름만큼은 거대한 마나 폭풍과 다름없었다.
“오빠!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나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갈레트는 내 쪽을 보지도 않았다.
몽블랑 뒤에 있던 거대한 조각상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빠지직거렸다.
“가, 갈레트 님, 잠깐만…….”
키슈가 뒤늦게 그의 마나에 대항하기 위한 마법진을 짜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넉넉해 보이지는 않았다.
곧 쨍그랑 소리를 내며 조각상이 부서졌다.
파편이 몽블랑을 향해 쏟아지려는 그때였다.
“진정하라니까!”
내가 갈레트의 팔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마법진에 균열이 가며 조각상의 작은 파편 하나가 총알처럼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뺨에 피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내게 상처가 났기 때문인지 갈레트는 곧바로 마나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게 냉정을 되찾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왜 막는 거야!”
갈레트가 벌컥 화를 냈다.
마주 화를 내기엔 그의 표정이 괴로워 보였기에, 나는 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가만히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
갈레트가 입술을 깨물고 팔에 힘을 풀었다.
나는 그의 팔을 놓아준 후 몽블랑을 향해 뒤돌아섰다.
몽블랑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 앉아 있었고, 주변에는 조각상이 부서지며 생긴 날카로운 파편이 가득했다.
그 파편 때문인지 마법 때문인지, 그의 소매는 조금 찢어져 있었으며 단정하던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헝클어진 채였다.
나는 테이블을 지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실수하신 겁니다.”
몽블랑이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의자에서 넘어질 때 손을 잘못 짚은 듯 바닥에는 핏자국이 점점이 남아 있었으나 그에게 아파하는 기색은 없었다.
“전하께서 저를 왜 그냥 보내줬는지 생각하면…….”
몽블랑이 말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가 제대로 서기도 전에 손을 치켜들었다.
짝.
공허한 소리가 퍼졌다.
몽블랑 뒤편에서 키슈가 눈을 동그랗게 뜬 것이 보였다. 내가 직접 몽블랑의 뺨을 때릴 줄은 예상치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몽블랑은 그녀만큼 놀란 것 같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