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에클레어가 마땅히 대꾸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곁눈질하고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뭐 하나 해보겠다고 시도 때도 없이 무리하질 않나, 어린애 주제에 목숨을 내던지려 하질 않나. 그러면서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생각도 안 하지.”
“…….”
저건 밤새워 마법진 공부를 했을 때랑 몬스터들이 습격했던 때를 말하는 건가.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에클레어가 나를 이렇게까지 좋게 봐주고 있었다니,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동의하기 이전에 민망함이 먼저 찾아왔다.
다행히 에클레어는 더 이상 낯 뜨거운 말을 덧붙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녀가 콧바람을 뿜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나는 모르겠다. 우리는 중도파라 애초부터 다른 귀족들이랑 접점도 별로 없었고. 너야 그 사람을 믿으니까 위험을 무릅쓴 거겠지만… 아니, 네가 믿을 정도면 좋은 사람이겠지.”
믿어? 좋은 사람?
에클레어가 스치듯 한 말에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분명 몽블랑 후작과는 내가 어릴 때부터 인연이 있었고, 편지나 선물을 주고받기도 했으며, 나는 그에게 생명을 빚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몽블랑을 구하려는 이유는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크레페!”
갈레트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슬슬 추워진다, 그만 돌아가자.”
“그럴까? 저녁도 먹어야 하고.”
에클레어가 난간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고 거들었다.
뒤이어 갈레트를 따라갔던 파타슈도 도착했다. 이상하게도 그는 전신에 모래를 뒤집어쓴 채였다.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돌아가 주시면 좋겠네요.”
파타슈가 불퉁해진 얼굴로 옷에 묻은 모래를 탁탁 털었다.
옆에 서 있던 바니유가의 기사가 말없이 팔 보호용 건틀릿을 벗었다. 그 안에서도 모래알이 후드득 떨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나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갈레트를 쳐다보았다.
그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갈까?”
“…으응.”
그래,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
내가 뻔뻔하게 생각하려 애쓰며 몸을 돌린 그때, 후웅 소리를 내며 묵직한 바닷바람이 내 모자를 벗겼다.
다급히 뒤를 돌아보자 다행히 내 바로 뒤에 있던 에클레어가 모자를 잡아준 모양이었다.
“자.”
에클레어가 내게 모자를 건넸다.
나는 내게 내밀어진 그녀의 손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모자를 받아 들고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고마워.”
진지하기까지 한 내 인사에 에클레어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됐어,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도와줄 테니까.”
그러고서 그녀는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을 앞장서 안내했다.
잠시 멈춰 있던 내가 걸음을 옮기며 한 손으로 모자를 눌러썼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갈레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오빠.”
“응?”
갈레트가 웃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모자를 누른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나…….”
내가 그와 눈을 맞추고 짧게 입을 열었다.
“오빠한테 얘기할 게 있어.”
마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야 했다.
【 고백 】
내 입장에선 결코 쉽지 않은 결심이었지만, 상황은 내 희망처럼 착착 풀리지 않았다. 바니유 공작가에 도착하자마자 젤라토가 날 찾았기 때문이다.
“크레페, 아버님이 잠깐 보자고 하시는데.”
“크레페를?”
에클레어가 내 입장을 대변하듯 말했다.
하지만 이유가 뭐든 간에 집주인의 부름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갈레트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을 조금 미뤄두기로 했다.
“응, 아직 식당에 계셔.”
젤라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도…….”
갈레트가 주섬주섬 칼라의 매듭을 풀고 환복할 채비를 했다. 그러자 젤라토가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저지했다.
“아냐, 크레페만 부르셨으니까 넌 옷 갈아입고 쉬어. 에클레어는 저녁 먹기 전에 푸딩이랑 좀 놀아주고, 저쪽 분은… 크흠, 욕실은 이쪽입니다.”
젤라토가 모래를 뒤집어쓴 파타슈를 안내하며 멀어졌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멋쩍게 모자를 벗었다.
“괜찮겠어?”
“응? 아, 물론이지. 다녀올게.”
걱정스레 묻는 갈레트에게 웃으며 대답해 준 내가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아침에 가본 길을 되짚어 식당에 도착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아까 전과 똑같은 자리에 바니유 공작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키슈와 몽블랑은 그의 양 옆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기다렸습니다.”
바니유 공작이 빙긋 웃으며 손짓했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나는 곧바로 빈자리를 찾아 앉는 대신 그렇게 첫마디를 뗐다. 사실 내가 불려 나온 이유에 대해 짐작되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몽블랑을 대놓고 탈출시킨 건 파타슈였고, 정치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면 나보단 몽블랑이 더 적합한 상대일 것이다.
또한 쉬제트가에서 제일 유명한 건 내가 아니라 갈레트였으며 바니유 공작가를 목적지로 삼은 것도 그였다.
그런데 갈레트를 빼고 나만 불러내다니?
“편히 앉으시지요.”
불편해하는 기색을 내비치자 공작이 재차 권했다.
나는 몽블랑과 키슈를 번갈아 보고 키슈의 옆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공작은 소싯적에 기사 작위를 받은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일선에서 은퇴하고 정계에서만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보와 별개로 공작의 팔뚝에는 여전히 두꺼운 근육이 드러나 있었기에, 미안하게도 나는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아빠랑 공작님이 싸우면 아빠가 질 것 같다고.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태자 전하와 사이가 각별하시다고요.”
“…….”
공작은 마치 훈훈한 말을 하는 것 같은 너그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별로 탐탁스럽지 않았다. 사실 식사 때부터 불편했다.
- 태자비가 될지도 모르는 분께 실례를 저지를 순 없지요.
태자비가 될지도 모르는 분이란다.
물론 아펠과 나의 관계는 공식 석상에 함께 자리했을 만큼 공인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상황은 그리 가볍게 여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왕당파인 쉬제트 백작가의 영애가 황비 시해 혐의를 받고 있는 몽블랑 후작을 도주시킴.
이 정도 헤드라인이라면 친분이고 정략이고 간에 당장 파혼당해야 마땅할 배신이었다.
실제로 원작에서 아펠은 크레페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자마자 파혼을 선언했고 말이다.
아니, 파혼이면 다행이게?
능지처참이나 멸문, 부관참시 따위의 온갖 살벌한 단어가 순식간에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애초부터 태자비라는 직위는 덕담처럼 오르내릴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공작 정도 되는 고위 귀족이 그 사실을 모를 리도 없으니, 내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도 당연했다.
비꼬는 건가?
그런 생각이 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듯, 공작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렇게 날카롭게 대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전하께서 전부터 크레페 님을 얼마나 아꼈는지는 알고 있으니까요.”
“네?”
공식적으로 아펠과 나의 만남은 이번 연회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단순한 소문으로라도 그런 말이 돌았을 리 없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키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혹시 마탑의 유령 이야기를 꺼낸 건가?
하지만 내 시선을 받은 키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내저었다. 소매가 흘러내리며 그녀의 손목이 드러났다.
아, 비밀 유지 서약이 있었지.
“플럼 바클라와의 이야기 말입니다.”
내가 더 추측할 것도 없이 공작이 정답을 공개했다.
아무래도 에클레어에게서 들었나 보구나, 하는 생각을 하자마자 그가 뒷말을 이었다.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면 정보력은 필수니까요.”
결국 독자적으로 입수한 정보라는 뜻이었다.
순간 할 말을 잃은 내가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쉬제트 백작령에서 접하기 힘든 해물 요리도 거부감 없이 즐기지 않으셨습니까. 태자 전하께서 몰래 챙겨준 것이 많았던 모양이지요?”
“…….”
이번 말은 오답이었지만 그건 사소한 문제였다.
이유야 어찌 됐든 장손인 갈레트도, 잠깐이지만 해안가에 살았다는 파타슈도 나만큼 해산물에 익숙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니까.
잠깐, 설마 그걸 떠보려고 만찬을 준비한 건가?
이제 와 생각하니 공작은 물론이고 키슈와 몽블랑까지 식사하는 내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만.
내가 맛있는 음식에 홀려서 냠냠거리던 동안 바니유 공작이 무슨 계산속이었을지 떠올리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그건 비약이지 않나요?”
“뭐, 그럼 어떻습니까.”
공작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태클을 걸었던 내가 민망해질 정도의 반응이었다.
나는 공연히 숨을 내쉬고 멋쩍은 얼굴로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키슈가 풋, 웃고는 내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요, 얘기는 잘 끝났으니까 걱정 마세요.”
잘 끝났다고?
“그럼 저를 왜 부르셨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그리 예의 있는 태도라 볼 수는 없었지만,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보다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예측되는 아펠의 동향이라거나 앞으로의 계획이라거나, 꼼짝없이 그런 진지한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내 예상은 빗나갔다.
“크레페 님이 에클레어의 룸메이트였다고 들었습니다만. 혹시 그 아이와 학교에 다니면서 겪은 에피소드 같은 건 없었습니까?”
“에피소드요?”
귀를 의심하며 되묻자, 갑자기 그가 동네 아저씨처럼 수더분하게 웃었다.
“딸애가 먼저 그런 얘길 해주는 성격이 아니라서…….”
* * *
나는 숙련된 이야기꾼처럼 온갖 포장을 하고 양념을 쳐서 에클레어의 대서사시를 읊어주었다.
입학 시험을 치르던 날에 내게 시비를 걸었다는 이야기나 크바스와 카눌레에게 라이벌 의식을 불태웠다는 이야기, 내 생일을 잘못 알고 엉뚱한 파티를 준비해 줬던 일부터 기사 수련회 때 내가 겪은 그녀의 활약에 이르기까지.
함께한 시간만큼 말할 것은 차고도 남았고, 공작 역시 그 긴 시간 동안 지루해하는 기색은커녕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귀를 기울였다.
그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바니유 공작의 목적은 처음부터 에클레어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라도 더 듣는 데 있었던 것 같았다.
기사 지망생인 에클레어가 정식으로 입단하고 나면 집을 떠나야 할 테니까 말이다.
“평생 젤라토 뒤만 따라다니는 어린애일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공작이 한탄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
이제 보니 기본 바탕이 되는 성격에 차이가 있을 뿐, 바니유 공작도 우리 아빠 못지않은 딸 바보인 모양이었다.
사실은 저도 언니가 평생 철없는 아이일 줄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