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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07)화 (107/181)

107화 

* * *

소매에 프릴이 가득 달린 블라우스에 밑단을 끈으로 조인 바지, 허리춤에 매단 가죽 주머니와 보온성을 위한 조끼, 단단한 가죽으로 만든 신발까지.

나는 저택을 나오는 내내 옷차림이 익숙지 않아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댔다.

파티에서 가족끼리 제복을 맞춰 입었을 때보다 어색한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이 차림은 평민, 정확히는 상인이 주로 입는 복식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괜찮아……?”

“괜찮다니까.”

에클레어가 내 걱정을 일축하고 칼라를 통과한 끈을 여며 목을 따뜻하게 했다.

그녀의 옷차림 역시 나와 별다를 바 없었다.

포니테일로 묶은 긴 머리나 허리 벨트에 검집을 차고 있다는 것만 빼면.

“자, 마지막.”

에클레어가 내 손에서 모자를 빼앗아 직접 씌워주었다.

그러고는 제 허리에 찬 검집을 툭툭 쳐서 잘 묶였는지 확인한 후, 뒤에 서 있는 기사들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아셨죠? 크레페는 제가 지킬 테니 두 분은 다른 두 사람한테 신경 써줘요. 한 분은 쉬제트 백작가의 갈레트 님이고 다른 하나는…….”

에클레어가 파타슈의 이름을 잊은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대답하려 입술을 뗀 그때였다.

“파타슈입니다.”

파타슈가 날 대신해 직접 답했다. 돌아보니 갈레트와 파타슈도 막 옷을 갈아입고 저택을 나온 듯했다.

역시나 두 사람도 우리처럼 보석 하나 안 달린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우리 크레페는 뭘 입어도 잘 어울리네!”

“오빠도.”

갈레트의 칭찬은 이제 그냥 평범한 인사말처럼 들렸다.

내가 웃으며 대꾸하자 갈레트가 후다닥 다가와 나를 얼싸안았다.

투둑.

“…놔줘.”

“으, 으응.”

갈레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풀었다.

나는 차마 짜증 내지 못하고 불편한 기분으로 몸을 씰룩거렸다.

어디 실밥이 뜯어진 것 같은데……. 혹시 맨살이 드러난 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맞춤옷이 아니라 하녀에게 급히 준비시킨 옷이기에 수선이 제대로 안 된 부분이 있는 듯했다.

불안해진 내가 몸 이곳저곳을 더듬어보던 그때, 에클레어가 나와 갈레트 사이를 가르고 끼어들었다.

“뭐, 좋아요. 갈레트 님, 그리고 파타슈.”

파타슈는 제게만 ‘님’ 자를 안 붙이는 에클레어를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에클레어는 그 시선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저희는 여자들의 시간을 가질 테니 그쪽도 남자들의 시간을 가지도록 해요. 호위는 저분들께 맡기고.”

‘남자들의 시간’이라는 단어에 갈레트와 파타슈가 반사적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엑.”

“윽.”

둘의 표정이 동시에 구겨졌다.

내가 분위기를 달래보기도 전에 에클레어가 내 팔을 끌고 저택을 나갔다.

* * *

“어때, 우리끼리 다니는 것도 괜찮지?”

에클레어가 밝게 말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나는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그 이유는 주변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도, 그녀의 의견에 반대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알았으니까 제발 천천히 가아!”

종아리 근육이 당기는 게 금방이라도 쥐가 날 것 같았다.

신발 밑창은 평소 신던 것보다 딱딱했고 주변에 인파도 많았다.

수련회 이후로 이렇게 많은 평민들에게 둘러싸이긴 처음이었다.

거기에 낯선 길이라는 부담감까지 합쳐져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물론 제일 큰 이유는, 벌써 몇 시간째 앉을 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데 있었지만.

“여기가 촌구석도 아니고, 외성에서 그렇게 겁을 내?”

“겁을 내는 게 아니라니깐…….”

솔직히 말하면 내 차림새부터 피부에 와 닿는 공기까지,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긴 했으나 이 길이 애초 생각만큼 위험하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에클레어가 항상 오가던 것처럼 익숙하게 길을 안내했기 때문이다.

“아휴, 이제 좀 소화된다.”

에클레어는 헥헥거리고 있는 내가 보이지도 않는지 두 팔을 높이 뻗고 스트레칭을 했다.

“으으, 좀 쉬었다 가면 안 돼?”

“이제 진짜 다 왔어!”

그 목소리는 처음 출발할 때만큼이나 활기찼다.

그게 어찌나 얄밉던지, 나는 당장에라도 팔찌를 발동하고 에클레어의 뒤통수를 때리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고생했다.

아무리 그래도 도피 중인데, 인파가 넘쳐나는 외출길에서 마법을 쓸 순 없지.

하지만 그 다짐이 내 체력을 상승시켜 주는 것은 아니었다.

“으아아, 난 몰라!”

결국 나는 시장 한복판에서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사람처럼 큰 소리를 냈다.

두 손으로 양 무릎을 짚어 버티고 있으려니, 갈레트가 끙끙거리며 제 앞을 가로막은 기사를 밀쳐내고 내게 다가왔다.

“누가 우리 크레페를 그렇게 힘들게 했어, 응?”

“제발 밖에서는 그러지 마요.”

“아니, 내 동생 내가 챙기겠다는데 왜…….”

파타슈의 태클을 갈레트가 곧바로 맞받아쳤다.

갈레트가 정색하고 나서면 파타슈도 저런 식으로 맞받아칠 수는 없겠지만, 키슈가 없는 자리에서도 갈레트는 그에게 권위를 내세우진 않았다.

혹시 갈레트도 즐기는 건가?

합리적 의심이 고개를 치켜들 때쯤, 두어 걸음 앞에 있던 에클레어가 돌아왔다.

“으휴, 다 왔다니까? 도착해서 쉬어.”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그 손을 마주 잡는 대신 가는눈을 뜨고 반박했다.

“…그 말이 지금 몇 번째인지 알아?”

“정말로 진짜야, 정말! 완전!”

물론 에클레어는 눈도 깜짝 안 했다.

아마 ‘정상까지 5분밖에 안 남았어요’가 입에 밴 등산객의 심정 같은 거겠지.

“끄응…….”

결국 나는 에클레어의 손을 붙잡고 다시 허리를 세웠다.

내가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그녀는 사탕발림에 넘어간 내 모습이 재밌는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래, 놀러 온 기분이긴 하다.

비릿한 생선 냄새와 소금기 묻어있는 바람.

이건 마치…….

“앗.”

딴생각에 빠진 내게 경종이라도 울리듯 돌풍이 불었다.

나는 머리에 쓴 플랫 캡이 날아가지 않도록 세게 눌렀다.

에클레어는 바람이 불어온 바로 그 골목으로 나를 데려갔다.

골목을 통과한 그녀가 곧 기세등등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어때! 멋있지?”

그녀의 까만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투명해 보였다.

사람들 소리에 묻혀있던 파도 소리가 고막을 때리고 공기 중에 퍼졌다.

그렇구나. 특산물이라며 랍스터가 나올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크레페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바다였다.

“…바람이 좀 차네.”

썩 감상적이지는 않은 첫마디를 꺼내며 내가 어깨를 움츠렸다.

에클레어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조끼라도 벗어줄… 아.”

에클레어가 말하다 말고 멈췄다.

하긴 사이즈가 맞을 리 없지.

“우와, 이게 바다구나!”

이제 별 대미지도 없는 생각을 하던 그때, 격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제 막 골목을 빠져나온 갈레트의 목소리였다.

“세상에, 정말 땅이 안 보이네? 저기 끝까지가 다 물인가 봐! 얼마나 깊을까? 진짜 멋있다, 그치?”

내게 동의를 구하는 모습을 보니 내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평소보다 호들갑을 떠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너무 매정하게 반응했나.

뒤늦게 반성한 내가 한껏 목소리를 높일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갈레트의 다음 말을 듣고, 나는 아연실색하며 그를 뜯어말릴 수밖에 없었다.

“먹어봐도 돼? 가열하면 소금이 나온다던데, 마법으로 불이라도 붙여볼까? 아, 혹시 물속에 폭발진을 띄우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어떻게 되긴, 에클레어네 집에서 쫓겨나겠지!

* * *

파타슈는 갈레트와 달리 그리 감격스러워하진 않았다.

키슈에게 입양되기 전에 살았던 마을이 해안가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 갈레트는 생전 처음 보는 바다 때문에 흥분했는지 바닷물로 이것저것 실험을 해본다며 멀어졌는데, 앞뒤 가리지 않는 저 학구열을 보니 어디에 키슈의 영향을 받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파타슈 님, 오빠가 사고 칠까 봐 걱정되는데 감시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괜찮긴 하지만… 크레페 님은 오빠분들을 꼭 동생처럼 대하시네요.”

카눌레가 여기 없어서 다행이다.

상황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하며 웃자, 파타슈가 옅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그러고서 파타슈가 갈레트를 따라 걸었다.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뒤에서 에클레어가 말을 꺼냈다.

“도망 온 거야?”

“응?”

갑작스러운 질문이었기에 나는 그 내용을 곧바로 이해하진 못했다.

내가 되묻자 에클레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빠가 중립이라고 수도 소식에도 느릴 것 같아? 몽블랑 후작 말이야.”

그건 둘만 남기를 벼르다가 꺼낸 말처럼 직접적이었다.

나는 순간 당황해 주변부터 살폈다. 하지만 이쪽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어 보였다.

이곳은 휴가지도, 시장통도 아닌 적적한 항구였다.

구름 낀 하늘은 흐릿했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는 시간대였기에 사람들은 대부분 식사를 하러 돌아간 듯했다.

먼 해안가에서 들려오는 뱃사람들의 입항 소리와 파도 소리, 그리고 이름 모를 바닷새들의 울음소리뿐인 공간에서, 에클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으휴. 태자비 자리가 코앞인데, 어쩌다가 이런 일에 휘말려선.”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모를 순 없었다.

내가 대꾸 없이 헤헤거리며 웃자, 에클레어가 날 빤히 보다가 다른 질문을 꺼냈다.

“…플럼이랑 얘기는 했어?”

그래도 바깥이라 아펠 대신 플럼이라는 호칭을 쓴 모양이었다.

나는 아까보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가볍게 대답했다.

“해야지.”

“여기까지는 마법으로 이동한 거랬지?”

“응.”

“너, 예전에 변방에서 플럼이 마법으로 괴물들 치워준 건 기억나?”

변방은 에클레어와 아펠이 처음 만난 장소였다.

그날의 일은 아빠가 어떻게든 둘러댄 상태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에클레어도 앞뒤 사정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맥락과 별개로, 불현듯 말을 꺼낸 에클레어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런데 플럼이 너희를 못 막았다고?”

“…….”

경황이 없어 깊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에클레어가 입을 다물고 바다로 눈을 돌렸다.

“난 네가 걱정이야. 옛날부터 뭐든 잘할 것처럼 얄밉게 굴던 주제에 툭 하면 울고, 여차하면 기절하고, 금방이라도 픽픽 쓰러질 것처럼 힘들어하고.”

“내가 언제…….”

나는 반박하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학생 때 엄마 얘기를 하며 펑펑 울었던 것, 검술 시간에 기절했던 것이 한꺼번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힘들어한 거야 여기까지 오는 길에서도 그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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