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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06)화 (106/181)

106화 

“크레페!”

“끄악!”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침대 한쪽이 푹 들어갔다.

깃털을 촘촘히 채운 매트리스가 트램펄린처럼 출렁인 것과 동시에 내가 비명을 내질렀다.

“일어났어?”

내 비명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해사한 미소를 지은 에클레어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워낙 갑작스러운 등장이었기에 나는 순간 둘 중 어느 쪽이 꿈이었는지를 고민해야 했다.

“으, 으응, 덕분에.”

“나 오빠한테 말 듣고 진짜 깜짝 놀랐어! 이렇게 금방 다시 만날 줄은 몰랐는데. 관광 온 거야?”

관광이라기보다는 범죄자의 도피 여행에 가깝지만.

“구경시켜 주려고?”

“당연하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지자 에클레어가 어린애처럼 들뜬 얼굴로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내가 그녀의 힘에 이끌려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시종일관 밝은 그녀의 반응을 보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좋은 꿈을 꿔서 그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눈을 비볐다.

“응? 무슨 꿈을 꿨는데?”

에클레어의 질문에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오빠들이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아펠이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엄마랑 아빠를 본 것 같기도 하고…….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만큼, 다들 본 것 같다고 생각하면 본 것 같았고 아닌가 생각하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꿈에서의 느낌만은 생생했다.

포근하고 안락하고 행복한, 가능하다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았던 느낌 말이다.

“으음, 그냥 좋은 꿈.”

내 어휘력 부족이 이때만큼 아쉬웠던 적이 없었다.

짧게 설명하고 입을 다물자 에클레어가 까르륵 웃었다.

“그게 뭐야, 잠 덜 깼어?”

“그런가 보다.”

나도 자세히 얘기하는 대신 배시시 웃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에클레어가 내게 잠옷에 왜 흙이 그렇게 묻었냐며 타박하고는 내 팔을 끌어 재촉했다.

“빨리 씻고 나가자. 옷 입어!”

“아.”

옷은커녕 신발도 없다.

* * *

내가 몽블랑 후작을 최종 보스로 여기던 때, 그를 이기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크렘과 친해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에클레어와 친해지는 것이었다.

몽블랑 후작도 결코 어중이떠중이 같은 위치가 아니었으니, 그보다 위에 있는 ‘바니유 공작가’가 가진 이름값이 어느 정도였는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햇빛이 내리쬐는 지금 시간에 와서 내 감탄은 더욱 깊어졌다.

바니유 공작가도 분명 쉬제트 백작가와 같은 무가(武家)라고 들었건만, 인테리어의 화려함은 나란히 놓고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일단 우리 집 1층에는 분수대가 없으니까.

“와…….”

실내에 분수대라니, 내가 이런 집에서 자랐더라면 세상만사 하찮아 보였을지도.

…라고 생각하는 나는 인성이 덜된 걸까.

“크레페?”

“으응.”

어쩐지 작아지는 기분으로, 2층에 머물렀던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온 햇빛은 내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각도를 바꾸어 색색으로 물들었고, 분수대 중앙에 장식된 돌고래 모양 조각상도 덩달아 무지개색으로 빛났다.

이런 대저택을 흙 묻은 잠옷에 슬리퍼 차림으로 누비는 게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다행히 에클레어와 함께 있는 내 행색을 지적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손님이 오셨군요.”

정원을 지나 식당에 들어서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식당의 제일 안쪽, 상석에 앉은 장년의 남자가 꺼낸 말이었다.

그의 왼쪽에는 젤라토가 앉아 있었고 오른쪽은 빈자리였다.

재차 확인할 것도 없이 저 남자가 젤라토와 에클레어의 아버지, 바니유 공작인 듯했다.

“어, 쟤…….”

“저……!”

그때 에클레어와 파타슈의 감탄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파타슈는 회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옆에 선 에클레어를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에클레어가 바니유 공작가 사람인 걸 몰랐나?

파타슈의 옆자리에 앉은 키슈가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파타슈가 민망해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는 이미 키슈와 몽블랑, 파타슈와 갈레트까지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상태였다.

“아, 실례했습니다.”

에클레어는 아직 이 상황에 대해 제대로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파타슈에 이어 몽블랑의 얼굴도 빤히 보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빈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나는 곧바로 오른 주먹을 왼쪽 가슴 위에 올리고 살짝 허리를 숙였다.

“인사가 늦어 면목 없습니다.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라고 합니다. 경황없는 새벽, 기꺼이 문을 열어주신 뷔슈 드 노엘 바니유 공작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공적인 방문이 아닌 사적인 자리였으나, 이만저만한 실례를 저지른 게 아니니만큼 나는 최대한 예법을 지켜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기꺼이? 문을 열어?”

공작이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기꺼이 문을 열어주어 감사하다’는 말은 일종의 관용구였다. 공작이 그걸 모를 리도 없었다.

혹시 나한테 면박을 주려는 건가?

“크흠, 아버님?”

내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젤라토가 점잖게 제지했다.

공작이 손을 내젓고 재차 입을 열었다.

“하하, 책하려는 게 아닙니다. 태자비가 될지도 모르는 분께 실례를 저지를 순 없지요. 앉으시길.”

“…….”

공작이 빈자리에 손짓했다. 갈레트의 옆자리였다.

“미안, 크레페. 편히 앉아.”

젤라토가 분위기를 중재하며 말했다.

…그래, 내가 불청객인 건 맞으니까.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무안한 기분을 미소로 대신하고 갈레트의 옆으로 다가갔다. 식사 시중을 드는 하녀가 의자를 빼주었다.

내가 거기 앉자 곧 음식이 준비됐다.

“우와…….”

참지 못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가 느낀 찝찝한 기분은 그냥 착각이었구나 싶을 정도의 호화로운 메뉴가 식탁을 채우고 있었다.

“바니유 공작령의 특산물이야. 맛있게 먹어.”

에클레어가 도도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신경을 쓰는 둥 마는 둥 곧바로 스푼을 들었다.

애피타이저는 게살을 넣은 수프였다. 스톡도 해산물을 이용해 우려낸 듯, 입안에 넣기 전부터 바다 내음이 짙게 느껴져 저절로 군침이 돌았다.

내가 태어난 쉬제트 백작령부터 어릴 때 들어간 마탑, 학교가 있는 커스터드 자작령에 이르기까지. 나의 행동반경은 모두 내륙에 속해 있었다.

때문에 내가 제일 자주 먹은 해산물은 기념일에나 나오는 생선구이가 전부였고, 보존 마법을 쓸 여유가 없을 때는 그조차도 먹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 떡이냐.

맑은 해물탕처럼 시원한 맛이 나는 수프를 게 눈 감추듯 들이켜고 나니 갈레트가 묘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내려놓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내륙에서만 지냈던 만큼 해산물을 이용한 요리가 입맛에 안 맞는 듯했다.

“내가 먹어도 돼?”

“응? 아, 물론이지.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의외의 말을 들은 듯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던 갈레트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내가 곧바로 손을 뻗어 그의 그릇을 가져왔다.

식사 예절에 맞는 행동은 아니었으나 어차피 사석이겠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그리운 맛에 엄격한 예절 같은 건 안중에 없었다.

뒤이어 나온 메인 메뉴는 버터를 발라 구운 조개관자, 그리고 마늘과 함께 조리한 랍스터였다.

심지어 1인 1랍스터.

빨갛게 익은 껍데기와 칼집을 내놓은 가운데로 보이는 뽀얀 색 황홀한 자태에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이건…….”

파타슈가 미간을 찌푸리고 제일 가까이에 있는 포크를 들었다.

딱딱한 껍데기를 어떻게든 열어보려는 모양이었지만, 서툰 솜씨로는 먹기 어려운 재료였다.

물론 내게는 문제가 아니었지만!

내가 직접 랍스터를 먹어본 적은 없어도 TV 속 맛집 프로나 여행 프로에서 랍스터 먹는 모습을 본 적은 있었다.

나는 막힘없이 랍스터 중앙을 비틀어 나눴다. 먹음직스럽게 익은 다홍색의 살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후우.”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살덩이를 입바람으로 식히고 조심스럽게 베어 물자 새우처럼 살짝 단단하고 탱글탱글한 식감이 이로 느껴졌다.

하지만 어금니로 씹자 처음의 단단함은 온데간데없고, 금세 촉촉한 육수가 배어 나오며 부드러워졌다.

은은하게 마늘과 버터 향이 났다.

하, 미쳤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오물거리며 두 손을 바지런히 놀려 이번에는 집게발 해체에 들어갔다.

작게 부서진 틈새를 잡아 벌리자 어육으로 만든 게맛살과 똑 닮은 것이 집게발 모양 그대로 쑤욱 빠져나왔다.

포크를 쓰는 대신 껍데기를 손잡이처럼 들고 매콤한 소스에 살덩이를 콕 찍었다.

그리고 입안에 남은 것을 야무지게 씹어 삼킨 후 곧바로 그것을 베어 물었다.

집게발은 몸통과 달리 첫 느낌부터 부드러웠다.

제대로 힘을 주기도 전에 살덩이가 결을 따라 부드럽게 찢어졌다.

“으으음!”

입에서 녹는구나!

먹는 중에도 침샘이 마구 자극될 정도의 진미에, 나는 바니유 공작을 경계하던 것도 잊고 맛을 음미하는 데 푹 빠졌다.

한참 배를 채우고 나서 뒤늦게 다른 이들을 살피니, 파타슈도 나를 따라 먹는 방법을 배운 듯 서투르게나마 맛있게 먹고 있었다.

갈레트도 이번엔 입맛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고.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빼앗아 먹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쉽구나.

조금은 배은망덕한 생각을 하다가 문득 눈을 돌리자 바니유 공작은 물론이고 키슈와 몽블랑도 어쩐지 내 쪽을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내가 너무 열심히 먹었나?

뒤늦게 민망해진 내가 랍스터 내장을 긁어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물론 랍스터는 이미 빈 껍데기가 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후식으로 나온 씁쓰름한 젤리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코끝에 맴도는 향을 보니 칡이나 홍삼 같은 뿌리식물이 원재료인 것 같았다.

나나 갈레트는 그 쓴맛에 못 이겨 금방 스푼을 내려놓았고, 반대로 파타슈는 생각보다 괜찮다는 듯 눈썹을 들썩이더니 디저트 그릇을 싹 비웠다.

바니유 공작은 모두가 식기를 내려놓을 때까지 느긋하게 상황을 살피다가, 몽블랑이 마지막으로 포크를 내려놓은 후에야 냅킨으로 손을 닦았다.

그것을 신호 삼아 대기하고 있던 하녀와 시종이 하나둘 그릇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럼 저희는 못다 한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냅킨을 내려놓은 공작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저희’에 내가 들어가 있을까 싶어 주변인의 눈치를 보았으나 아무와도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에클레어, 그동안 네가 손님들께 영지 안내를 해주는 게 어떠냐.”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에클레어가 화색을 띤 얼굴로 답하고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나는…….”

“괜찮아요.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세요.”

키슈가 내 대답을 가로채며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그들끼리 할 말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기에, 나도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나와 한 세트인 듯, 갈레트도 공작에게 예를 표하고 몸을 일으켰다.

공작이 그러라 하자 키슈가 이때다 싶었는지 파타슈에게 화살을 돌렸다.

“너도 다녀와.”

“…….”

파타슈는 눈빛으로 반항하는 듯 잠시 무반응을 고수했으나, 당연히 키슈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금방 올게요.”

결국 파타슈가 항복을 선언했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하지 않은 그들의 모습에 내심 웃음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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