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05)화 (105/181)

105화 

나는 서둘러 브라우니를 공간 이동용 포트 위로 이끌었다.

키슈와 파타슈, 갈레트가 날 따라 낮은 턱을 올라왔다.

“목적지는요?”

키슈가 마법진을 전개하며 물었다. 하지만 내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애초 계획대로라면 파타슈가 범인임을 들키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했으니 이제 몽블랑의 자택과 키슈의 연구실은 물론, 그들과 친한 관계인 피오르의 공방까지 수색이 들어올 것이 뻔했다.

몸을 의탁해 온 사람을 쉽게 내치지 않으면서도 몽블랑과의 연관성이 적고, 동시에 황궁에서 쉽사리 수색할 수 없는 곳.

게다가 지금 바로 좌표를 찍고 갈 수 있을 만한 곳은…….

“나도 몰라요!”

“네에?!”

키슈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며 마법진이 사라졌다.

“으악! 아, 아무 데나 가요, 일단!”

내가 악 소리를 내자 금방 마법진이 발동했다. 그러나 이번엔 키슈의 마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발밑에 떠오른 것은 연한 금빛으로 일렁이는 마법진이었다. 나는 잠깐 그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 눈을 껌뻑거렸다.

다른 게 아니라, 떠오르는 마법진이 원형이 아니라 다각형이 여럿 겹쳐진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공간 이동 포트를 정상적으로 이용한다면 나올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동할게!”

내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갈레트가 외쳤다.

그의 왼쪽 귓불에 매달린 황색 토파즈 귀걸이가 요동치고 있었다.

어느새 눈을 감은 그는 마치 주문을 외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윽고 기사들이 문을 열어젖힌 것과 거의 동시에 주변이 흐려졌다.

곧이어 도착한 곳에는 난생처음 보는 집무실이 있었고…….

“가, 갈레트? 여긴 갑자기 무슨 일이야?”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젤라토도 있었다.

“크레페까지… 아니, 같이 오신 분들은?”

갑작스러운 이동에 나는 양 무릎을 굽혀 어정쩡하게 서핑하는 자세를 취한 채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젤라토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의자 등받이에 걸쳐져 있던 로브를 내려 내 발등을 덮어주었다.

아, 그래. 내가 아직 맨발이었구나.

“감사합니다…….”

뒤늦게 떠올리고 멋쩍게 발가락을 꼬물거렸다.

“늦은 시간에 미안해. 우선 잘 곳을 좀 빌려도 될까?”

우릴 이곳으로 이동시킨 갈레트가 대표로 말했다.

“그, 그래. 아니, 일단 아버님께 말씀부터 드리고 올게.”

젤라토는 아직도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가 문을 나가려던 찰나 장애물처럼 앞을 가로막고 선 브라우니와 눈이 마주쳤다.

“…….”

브라우니의 듬직한 위용에 압박감을 느낀 듯, 젤라토는 몸을 옆으로 비키더니 게걸음을 걸어 방문을 나섰다.

그동안 키슈와 파타슈는 브라우니에게 바짝 붙어 서서 몽블랑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젤라토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키슈가 곧바로 걸쇠를 잠그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래서 여기가 어딘데요?”

“하하…….”

내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키슈나 파타슈의 입장에선 별안간 이동 마법으로 납치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바니유 공작가의 저택이에요.”

갈레트가 키슈에게 설명했다.

“황궁에서 바로 수색해 올 만큼 만만한 곳도 아니고, 하루 정도는 묵어도 괜찮을 거예요.”

몽블랑과의 연관성이 적고, 동시에 황궁에서 쉽사리 수색할 수 없는 곳.

그러고 보면 바니유 공작가는 내가 꼽았던 그 조건들에 거의 부합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여기 좌표는 어떻게 알고 왔어? 온 적 있어?”

내가 묻자 파타슈도 묻고 싶은 말이었다는 듯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고선 갈레트를 쳐다보았다.

갈레트가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마탑 포트에 좌표 책이 있잖아. 전에 근처 좌표를 본 기억이 있어서 마법진을 수정해 봤어.”

“음, 잠깐만요.”

키슈가 갑자기 한 손을 들고 끼어들었다.

“크레페 님의 반응을 보니 갈레트 님은 원래 저희를 도울 약속이 없었던 거죠?”

“하나뿐인 동생이 한밤중에 외간 남자랑 만나겠다는 걸 놔둬요?”

갈레트가 콧방귀를 뀌었다.

‘하나뿐인 동생’이라는 말은 명백한 오류였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아무도 그 오류를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대신 키슈는 다른 곳에 태클을 걸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올 걸 예상하고 포트에서 기다렸다가, 마탑이 폐쇄되기도 전에 봤던 좌표를 기억해서, 몽블랑을 숨겨도 당분간 안전할 만한 곳을 곧바로 떠올린 다음, 기사들이 올라오기도 전에 계산을 끝내고 다각진을 전개했다고요?”

그녀가 하나하나 손꼽은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말이 안 되는 업적이었다.

하지만 갈레트는 여전히 별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꾸했다.

“대충 이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은 했거든요.”

그 말을 듣고 파타슈가 질린 얼굴로 나와 갈레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두 분은 서로 대화할 필요도 없겠네요. 이 정도면 통찰력이 아니라 텔레파시 수준인데.”

갈레트 덕분에 나까지 천재 취급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런 감탄은 내가 갈레트를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기도 했기에, 나는 그저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일단 아저씨부터 어떻게 하자.”

갈레트가 소파로 손짓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아직도 아저씨라고 부르는구나.

나는 부디 그 원인이 내 첫사랑 어쩌고 했던 일에 있지 않길 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우니?”

내가 브라우니에게 손짓해 녀석을 소파 근처로 안내했다.

키슈와 파타슈가 함께 힘을 합쳐 몽블랑을 브라우니 위에서 내리고 소파에 편히 눕혔다.

그러고 나자 제 몫을 다한 브라우니가 다시 미니 사이즈로 뿅(실제로 이런 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변신해 파타슈의 품에 안겼다.

“바니유 공작님은 왕당파이신가요?”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던 키슈가 나와 갈레트를 향해 물었다.

“아뇨, 중립이에요.”

내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간 영주 실무를 처리하고 있던 만큼 다른 귀족들의 동향도 대충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는 왕당파도 공화파도 아닌 바니유 공작의 행보를 썩 탐탁지 않게 보는 듯했으나, 그런 만큼 우리의 존재를 아펠에게 발 빠르게 이를 걱정은 덜했다.

“다행이네요.”

키슈도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럼 저와 몽블랑이 공작님께 직접 말씀드릴게요. 크레페 님이나 갈레트 님은 굳이 이 사태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발을 들여놓지 않기에는 애초 그들이 도주하도록 부추긴 것이 나였다. 심지어 키슈에게는 마땅한 죄목도 없었는데.

그러나 키슈는 내 대답을 제대로 듣기도 전에 파타슈를 향해 말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아직 학교도 졸업 안 한 어린애가 참견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도와줘서 고맙다거나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다거나 그런 말은 없었다.

파타슈는 매정한 말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대놓고 말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물론 나는 키슈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지만.

“그래요, 열아홉이면 어린애지.”

내가 한마디 거들자마자 파타슈가 반론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근데 후작님은 왜 기절시켰어요?”

“글쎄, 끝까지 자길 놓고 가라고 버팅기지 뭐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이놈 정신머리를 싹 고쳐놓을 테니까!”

키슈가 팔을 걷어붙이며 씩씩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가벼운 태도와 별개로 내 마음은 심란했다.

따지자면 몽블랑이 쓴 누명을 벗겨내기 위해 우리가 위험을 감수한 건데 정작 본인은 탈출을 거부했다니.

나야 애초부터 이들이 몸을 피하는 것만 도와주려다가 얼떨결에 같이 도망친 쪽에 가까웠지만 파타슈나 키슈, 더 나아가 갈레트는 상황이 달랐다.

아무래도 일이 더 커지기 전에 황궁으로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당장이라도.

하지만…….

“하움.”

“하하, 졸려?”

나름 참는다고 참은 건데, 내가 하품을 삼키자마자 갈레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민망한 기분에 입을 다물고 있자, 갈레트가 허리를 숙여 내 맨발에 묻은 흙을 젤라토의 옷으로 툭툭 털더니 그대로 내게 등을 보였다.

“자.”

누가 봐도 제 등에 업히라는 뜻으로 보였다.

…조금 민망한데.

“빨리. 맨발로 갈 거 아니지?”

갈레트가 재차 말했다.

그 말에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나는 얌전히 그의 등에 업히기로 했다.

그래, 적어도 공주님 안기보단 덜 쪽팔리니까.

“아버님께 말씀드렸…….”

마침 젤라토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그가 말을 멈추자마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듯했으나, 젤라토의 시선은 내 쪽이 아니라 소파로 가 있었다.

“몽블랑 후작님?”

그러고서 젤라토는 설명해 달라는 눈빛으로 갈레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키슈가 갈레트의 앞을 막아섰다.

“제가 말씀드릴게요.”

“그럼 나는 누구 따라가면 돼? 안내해 줄 거지?”

갈레트가 짐짓 뻔뻔하게 물었다.

한숨을 내쉰 젤라토가 하녀 한 명을 호출해 우리의 안내를 지시했다.

“고마워.”

“고맙습니다…….”

갈레트의 뒤를 이어 내가 움츠러드는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했다.

“으휴, 내일 얘기해. 아무튼 못 보던 사이에 능구렁이가 돼선.”

젤라토가 갈레트를 보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쪽 분은…….”

파타슈에게도 머물 곳을 알려주려던 젤라토가 멈칫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있던 말은 어디 갔어?”

파타슈에게 안겨 그의 옆구리에 주둥이를 처박고 있던 브라우니가 움찔했다.

“크흠.”

등에 업혀 있던 내가 발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갈레트가 무게에 못 이겨 한 차례 휘청하더니 급하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키슈 님, 파타슈 님, 두 분이 알아서 둘러대 주실 거라고 믿어요!

* * *

연보라색의 등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이었다.

잔디는 이슬을 머금어 반짝이고 있었고, 브라우니는 꽃밭 위를 구르다 말고 꿀벌 한 마리와 눈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쉬제트가의 뒤뜰에 지어진 가제보 안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는 에이미가 준비해 준 디저트가 가득했다.

나는 손잡이가 붙은 시럽 잔을 들어 팬케이크 위에서 기울였다.

메이플 시럽이 두툼한 팬케이크의 단면을 타고 미끄러지며 침샘이 아릴 만큼 단 향이 퍼졌다.

팬케이크의 표면은 글레이징을 한 듯 먹음직스럽게 반들거렸다.

내가 참지 못하고 곧바로 포크를 들었다.

한 차례 바람이 일며 작은 꽃잎이 사락거렸다. 보드라운 꽃잎이 내 뺨을 스친 그 순간,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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