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 * *
내가 별궁에 머물고 있긴 했지만, 그건 내가 별궁의 곳곳을 싸돌아다닐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별궁은 ‘ㄷ’ 자로 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 내가 들락날락하거나 머물거나 하는 곳은 3분의 1 정도 되는 공간뿐, 나머지 3분의 2가 되는 부분은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굳이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가령 아펠의 어머니, 황비가 서거하기 전에 쓰던 침실 같은 곳을 구경해 봤자 실례밖에 더 되겠는가.
그래서 나는 별궁에 이런 공간이 있는 줄 지금 처음 알았다.
아펠은 내가 처음 들어와 보는 입구로 들어와선 크바스에게 자리를 지키도록 하고 이내 익숙하게 코너를 꺾어 거대한 문 앞에 섰다.
문을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조각이나 거대한 크기를 보고, 나는 순간 내가 연회장이 있는 건물로 들어온 줄 알았다.
아펠은 조금의 흐트러진 기색 없이 평온한 모습으로 나를 내려놓고는 문을 열었다.
문은 소리 한 점 없이 조용히 열렸다.
내 키의 두 배는 될 듯한 커다란 창문과 그 너머에 있는 발코니, 그리고 창문 양옆에 달린 하늘하늘한 흰색 커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상아색 바닥에는 커튼 너머로 새어 들어온 달빛이 펼쳐져 있었다.
딱.
아펠이 손가락을 튕기자 천장에 매달린 마법등이 은은하게 빛났다.
한밤중의 무도회장.
그 환상적인 분위기에 이끌린 내가 넋을 놓고 입을 벌렸다.
아펠이 한 걸음 물러나 내게 허리를 숙였다. 은회색 머리칼이 빛을 받아 날카로운 검처럼 윤기가 났다.
“한 곡 추시겠어요?”
그는 새파란 눈을 치켜뜨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눈빛에는 장난기가 스며있었다.
그가 내민 손을 얼떨결에 마주 잡자, 그는 대답을 들은 것처럼 내 팔을 당기고 허리를 안았다.
“아펠, 나랑 얘기하러 온 거 아니었어?”
“나는 데이트하러 온 건데?”
아펠이 가볍게 맞받아치며 스텝을 밟았다.
그의 리드는 능숙했고, 나는 그를 따라 발을 움직이기만 하면 됐다.
단둘뿐인 자리인 만큼 음악은 없었기에 아펠은 연주를 대신해 콧노래를 불렀다.
내가 몰래 빠져나가기까지 한 것과는 반대로 아펠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때? 예쁘지? 어머니가 쓰시던 사교장이야.”
내 숨이 차오르려 할 때쯤 아펠이 날 의자로 이끌었다. 달빛이 비쳐오는 발코니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였다.
나는 그가 이끄는 자리에 앉아 아펠을 올려다보았다.
“어머니의?”
“응.”
아펠이 대답하고는 나와 나란히 앉았다.
그가 가족 이야기를 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는 외향적이고 활발한 분이었대. 이 사교장도 그때쯤 마련된 거고.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모습은 달랐어.”
아펠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 입을 다물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기에, 내가 슬쩍 등을 떠밀었다.
“어땠는데?”
“글쎄…….”
아펠이 말문을 열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날 쳐다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딘지 멍한 눈빛으로, 달빛 아래에서 하늘거리는 커튼을 쳐다보며 말했다.
“날카롭고, 불쌍했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불쌍하다’는 표현을 쓰는 건 어떤 경우일까?
‘나도 너만 아니었으면…….’
빛바랜 기억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나 때문에 불행해졌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던 그녀였지만, 나는 이제 ‘나 때문에 산다’던 그녀의 말도 진심이었을 거라고 믿는다.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전생의 엄마.
“아펠.”
내가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아펠이 날 마주 보았다.
나는 짧게 숨을 마시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내 멋대로 아펠의 과거를 재단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알아야 할 것은 알려주고 싶었다.
“네가 머랭을 데리고 마탑에 왔던 날, 기억해?”
아펠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은 내가 디몬과 처음 만난 날이기도 했다.
디몬과의 일을 마탑 소속이 아닌 아펠에게 발설할 순 없었지만, 내가 할 말이 그것과 연관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아펠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 옆에 있어주겠다고 했지?”
내가 묻자 잠깐 눈을 크게 뜬 아펠이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랬지.”
그는 오히려 내가 그날의 일을 이렇게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듯했다.
아펠은 내 손등을 감싸 쥐고 마치 기도하는 사람처럼 나직하게 말했다.
“괜찮아, 크레페. 다 괜찮을 거야. 나 여기 있잖아. 너도 내 옆에 있어줘.”
‘괜찮아, 크레페. 다 괜찮을 거야. 나 여기 있잖아. 너도 내 옆에 있어줘.’
한 단어, 한 글자도 달라지지 않은 말에 놀랄 여유는 없었다. 내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나도 너랑 행복해지고 싶어. 그러니까…….”
“나는 네가 있어야 행복해질 수 있어.”
그건 정해진 답을 말하듯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어쩌면 내가 알고 싶어 하던 단서가 그 대답 속에 숨어있을지도 몰랐다.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말에 내가 눈썹을 움찔한 그때,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벌써 시간이…….
내 상황을 모르는 파타슈가 일을 개시한 게 분명했다.
작전에 대한 것을 깜빡 잊고 있던 내가 아차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내 한쪽 손은 아펠에게 붙잡힌 채였다.
“어딜 가려고?”
“전하, 탑 쪽에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크바스가 들이닥쳤다.
아펠은 크바스와 나를 번갈아 보다가 의자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내가 직접 가보지.”
“나도…….”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여기서 기다려.”
아펠이 말하자 크바스가 내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뒤이어 아펠의 발밑에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곧 그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
나는 망연자실하게 두 손을 늘어뜨렸다.
여차하면 날 제압하려던 크바스가 경계심을 풀고 헛기침을 했다.
“몽블랑 후작과 친했나 봐?”
나는 대답하지 않고 발코니로 나갔다.
크바스가 나를 따라 나오며 이런저런 말을 붙였다.
내가 상심할 것을 우려한 듯했지만, 사실 나는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있었다.
이제 와 말하자면, 애초 내 작전은 아주 조용하고 은밀한 것이었다.
내 생각에 제일 이상적인 결말은 그들이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고,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며 시치미를 떼는 그런 것이었는데, 이렇게 소란스러워진 이상 그 꿈은 멀리 사라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만히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내가 파타슈를 끌어들였으니까.
그 사실을 되뇌며 나는 크바스 몰래 내 팔찌를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코니의 난간을 넘어 밑으로 뛰어내렸다.
“야, 야!”
크바스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전에도 언급했듯이, 탑은 별궁에서 서쪽 방향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쪽으로 달음박질했다.
“마법 물품?”
크바스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나는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바로 옆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널 못 따라잡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문을 통과하자, 뭔가에 차단이라도 된 듯 크바스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내가 방금 들어온 문 너머를 돌아보았다. 크바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마법이 걸려 있었구나.
내가 뛰어 들어온 곳은 비밀 통로가 있는 건물이었다.
입구에서 이렇다 할 마법진을 본 건 아니었지만, 이 건물을 지키는 인원이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 수상쩍음을 느끼긴 충분했다.
탑으로 도망쳤다면 분명 아펠을 만나기도 전에 크바스에게 저지당했겠지.
그걸 생각하면 괜찮은 선택이었나.
“…일단 가봐야겠다.”
고요한 공기에서는 여전히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으나, 나는 공포심이나 압박감 따위를 느낄 틈도 없이 안쪽을 향해 마저 다리를 재촉했다.
같이 떠날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지만, 달리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 얼떨결에 도망자 】
도서관, 즉 마탑 본관에 도착한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연구동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어차피 안전한 도주를 위해선 공간 이동 포트를 써야 했으니 파타슈도 곧 그쪽으로 올 게 뻔했다.
물론 담을 채 넘어오기도 전에 붙잡혔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이번 계획은 이미 실패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러니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믿고 이동 포트로 가서 다음 목적지에 대한 좌표 계산을 미리 마쳐놓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다음 목적지라니, 대체 어디로?
당장 생각나는 답은 없었지만 나는 무작정 포트가 있는 방의 문을 열고 벽에 붙은 책장으로 향했다.
리시버가 있는 좌표가 적힌, 일종의 전화번호부 같은 책이 분명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원하는 책을 찾기도 전에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크레페!”
내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방 한구석에 쳐진 커튼을 걷고 갈레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아니, 왜 오빠가 여기서 나오는 거야!
과거의 언젠가가 떠오르는 등장이었다.
이 급박한 상황에 나는 ‘오빠’라는 두 글자도 제대로 맺지 못하고 순간 정신 줄을 놓을 뻔했다.
“뭐야, 파타슈랑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
상황을 모르는 갈레트가 때에 맞지 않는 질문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금방 문으로 파타슈가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왜 여기……!”
그는 포트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나를 보고 크게 놀란 듯했지만 쓸데없는 질문을 꺼내진 않았다.
잡담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엔 충분했다.
아슬아슬하게 기사들을 따돌린 모양이구나.
그리고 파타슈의 뒤를 이어 거대화된 브라우니가 푸르릉거리며 문을 통과했다. 마지막으로는 화색을 띤 키슈가 입장했다.
“크레페 님!”
“후작님은요?”
“여기 있잖아요.”
키슈가 짧게 말하며 눈짓을 했다.
나는 그제야 브라우니의 등에 업혀 있는 몽블랑을 발견했다.
“다, 다치신 거예요?”
“아뇨, 제가 기절시켰어요!”
키슈가 해맑게 답변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애꿎은 입술만 뻐끔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털었다.
“도망치려고?”
갈레트의 질문에 이어 창밖으로 기사들이 들이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디든 가야 돼! 잘못하면…….”
잘못하면? 잘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무리 누명이라고 해도 황족 시해는 대역죄잖아요. 크레페 님이 두 분을 탈출시키면 불똥이 튀지 않겠어요?’
순간 파타슈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되풀이되며 무서운 상상이 스쳤다.
하지만 망설이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