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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03)화 (103/181)

103화 

파타슈도 덩달아 민망한 듯 목을 가다듬고 고쳐 말했다.

“갈레트 님이 저한테 말을 전하려다가 걸릴 수도 있잖아요.”

“파타슈 님 아직 통학하지 않아요?”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러자 파타슈가 도리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네, 그런데요?”

“키슈 님이랑 몽블랑 님이 탑에 갇혔으니 집이나 연구실엔 파타슈 님 혼자일 거잖아요. 하지만 피오르 님이 파타슈 님을 혼자 두실 성격도 아니고…….”

“…….”

“파타슈 님이 피오르 님 공방에서 지내고 있다면 갈레트 오빠가 공방에 오가는 게 이상해 보이진 않을 텐데요?”

내 반문에 파타슈는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는 그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피오르 님과 따로 지내고 계신 거예요?”

“…아뇨. 피오르 님의 공방에서 머물고 있었어요.”

그럼 된 거 아닌가? 뭐가 문제라는 거지? 하는 생각을 담아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파타슈는 한숨만 내쉬고 말을 돌렸다.

“아무튼, 저는 왜 부르신 건데요?”

겨우 본론을 꺼낼 시간이 왔다.

나는 파타슈에게 꼭 해야 할 말만을 추려서 얘기해 주었다.

몽블랑은 누명을 썼고, 이대로 가면 그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

설명을 들은 파타슈는 인상을 찌푸리고 잠시 동안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고민하는 듯했다.

나는 혹시라도 그가 내 말을 믿어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 더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며 입씨름할 필요는 없었다.

“제가 뭘 해야 하죠?”

나는 곧바로 답하는 대신 파타슈의 팔을 이끌고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품에 안긴 브라우니가 기린처럼 고개를 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밤중의 숲은 불빛 없이 어두웠고 이따금 을씨년스러운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맨발로 밟는 낙엽의 감촉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저절로 신경이 곤두섰다.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느낀 듯 파타슈도 입을 다물고 조용히 나를 따라왔다.

한참을 들어가자 높은 담벼락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 담이 마탑과 황궁을 가르는 표식이었다.

그 너머로는 본궁과 탑의 지붕이 빼족하게 튀어나와 있었는데, 본궁의 지붕 꼭대기에 커다란 달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허리를 숙여 조용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말했다.

“이 담을 넘으면 바로 앞에 몽블랑 님과 키슈 님이 갇혀 있는 탑이 나와요. 저기 지붕 보이죠? 저는 황궁으로 돌아가 탑을 지키는 기사들의 주의를 끌 테니, 파타슈 님이 브라우니랑 같이 두 분을 빼내주세요.”

“황궁에 잠입을 하라고요?”

파타슈가 눈을 땡그랗게 떴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냐는 의문을 담아 그를 마주 보자, 파타슈가 제 키의 세 배도 넘는 담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날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위치는요? 창문이 있는 거죠?”

말이 잘 통할 것 같군.

내가 싱긋 웃었다.

이곳 슈트루델의 황궁은 본궁이 있는 중앙부를 기점으로 높은 담장이 궁터 전체를 둥그렇게 둘러싼 모양이었다.

그중에서 몽블랑이 갇혀 있는 탑은 북서쪽 구석에 위치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북쪽의 담을 넘으면 마탑과 이어지는 숲이 있었다.

그게 바로 여기란 말이지.

나는 바닥에서 나뭇가지를 주워 들고 치맛자락을 모아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서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설명했다.

“제가 탑에 올라가 본 적이 있어요. 두 분은 탑 제일 꼭대기에 있고, 창문은 이쪽 방향이에요. 거대화한 브라우니는 못 지나가지만, 사람 한 명이나 미니 버전 브라우니는 통과할 수 있고요. 아, 두 분이 차고 있는 수갑이 마나를 억제하는 마구라니까 참고해요.”

“…발 괜찮아요?”

파타슈는 그제야 내가 맨발이라는 걸 깨닫고 물었다.

내가 대답 대신 멋쩍은 미소를 짓자 브라우니가 내 발등에 누워 등을 비비적거렸다.

나름의 위로이겠거니 싶어 피식 웃고는 브라우니를 바로 세웠다.

파타슈가 뒤늦게 내게 로브를 벗어주려는지 쇄골 부근의 매듭을 풀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이제 돌아갈 건데.”

급히 만류하자 파타슈의 손이 멈췄다. 하지만 그대로 납득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파타슈가 다시 물었다.

황궁에서 이곳까지, 비밀 통로를 이용하면 그리 먼 길도 아닌데 뭐가 문제겠나 싶어 나는 가볍게 그럼요, 하고 대답하며 그의 질문을 넘기려 했다.

하지만 그가 맘에 걸려 하는 것은 단순히 내 발 건강뿐이 아닌 듯했다.

“저야 키슈 님, 아니 어머니 덕분에 피오르 님이나 몽블랑 님과도 친분이 두터웠지만… 아무리 누명이라고 해도 황족 시해는 대역죄잖아요. 크레페 님이 두 분을 탈출시키면 불똥이 튀지 않겠어요? 그다음 작전은 있는 거죠?”

“…….”

그 질문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긴 내가 파타슈를 이해시킬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정해진 운명이라는 게 있고, 내가 그걸 거스를 수 있었으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아펠을 설득하려 한다는 사실을.

덧붙여 파타슈랑 브라우니가 실은 아펠의 심복이었다는 것도 말이야.

내가 새삼스러운 사실을 떠올리며 웃었다.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제가 같이 도망갈 것도 아니니까.”

“하긴 두 분은 약혼하셨다고 했죠? 설마 태자 전하께서 약혼녀를 어찌할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파타슈는 여전히 걱정을 떨쳐내지 못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말을 듣자 문득 아펠의 목소리가 뇌리에 스쳤다.

‘내가 널 죽이는 미래.’

나는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쳐내고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달이 탑 꼭대기에 걸릴 때 시작해요.”

“아, 잠깐만요.”

자리를 뜨려던 나를 파타슈가 불러 세웠다.

“이건 필요 없는 거죠?”

그러고서 파타슈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가 유산지에 싸인 뭔가를 꺼냈다. 짙은 갈색의, 진짜 브라우니였다.

“브라우니가 필요하다는 말만 들었으니…….”

본인이 말하면서도 민망한 듯 파타슈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아니죠? 그럴 줄 알았는데 진짜 혹시나 했어요. 갈레트 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가져가라고…….”

“됐어요. 있으면 좋지, 뭐.”

횡설수설하는 그를 위해, 나는 그가 가져온 브라우니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 * *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작전 회의를 마친 후 나는 다시 비밀 통로로 들어왔다.

파타슈에게도 말했다시피 어차피 내가 그들과 함께 도주할 생각은 아니었다.

몽블랑을 빼돌리는 건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일 뿐, 황궁 측에서 몽블랑을 수색하는 동안 내가 아펠을 설득시키는 게 주목표였다.

아니, 적어도 몽블랑의 혐의가 누명이라는 걸 증명할 수만 있다면…….

혹시라도 주변을 순찰하는 기사가 있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문을 젖히고 건물을 나왔다.

그런 후 흙이 묻은 발바닥을 몇 차례 털어내고는 후다닥 별궁으로 향했다.

내가 머무는 별궁을 기준으로 오른쪽은 비밀 통로가 있는 건물이었고 왼쪽은 몽블랑이 갇혀 있는 탑이었다.

먼저 별궁에 들러 신발을 챙겨 신고 탑으로 가 기사들의 주의를 끌면 되겠지.

경로상으로도 완벽한 작전이었다.

지난번에 보니 탑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기사는 단 두 명뿐이었기에 난이도도 그리 높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내 방의 창문이 있는 뜰에 들어섰을 때, 나는 이 작전이 생각만큼 쉽게 이뤄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어디 다녀와?”

내가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자 아펠이 먼저 내게 다가왔다.

그는 얇은 튜닉과 편한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어깨에 걸친 로브를 빼면 나와 다름없는 실내복 차림이었다.

“뭐가 그렇게 급했어.”

아펠은 내 행색에 놀라워하는 기색도 없이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투로 말하고는 제 로브를 벗어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나는 아펠의 뒤편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그와 동행한 듯한 크바스가 서 있었다.

이번 보름밤.

갈레트에게 그 말을 꺼냈을 때, 크바스도 분명 듣고 있었다.

“말한 거예요?”

“…….”

크바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딱히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부지불식간에 짧은 적막이 찾아왔다.

별안간 머랭이 찾아와 크바스의 발치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라도 하듯 천진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아펠은 내 말이나 크바스 쪽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듯, 이내 걱정 어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맨발이잖아. 또 흉이라도 지면 어쩌려고.”

‘또’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몇 년이나 지난 변방에서의 일을 떠올린 것 같았다.

발이 더러워졌을 뿐 상처가 난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덤덤히 치유 마법을 쓰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아펠.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아, 신발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겠구나.”

아펠이 갑자기 내 종아리 뒤로 팔을 뻗고는 다른 쪽 팔로는 내 어깨를 감싸며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으악!”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아펠의 목을 꽉 껴안았다.

“하하, 불안해하지 마. 안 떨어뜨릴 거니까.”

아펠이 웃거나 말할 때마다, 그의 목과 닿은 팔에서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이건, 그 말로만 듣던 공주님 안기? 신혼부부 안기?

갑작스런 사태에 순간 상황을 잊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콧대와 턱선은 선명했고 눈썹은 짙었다.

그의 속눈썹에는 푸르스름한 달빛이 내려앉아, 그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한낮의 파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세상에, 이 각도에서도 굴욕 없는 미모라니.

때에 맞지 않는 감탄사가 새어 나올 뻔했다.

“아, 아니, 나, 너한테 할 말이…….”

“꼭 여기에서 얘기할 필요는 없잖아. 안으로 들어가자.”

“…….”

그런 말까지 듣고 나니 억지로 그를 뿌리치는 것도 수상쩍게 보일 것 같았다.

“…내려줘. 내가 걸어갈게.”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나는 신혼부부 같은 포지션에 괜히 민망해져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부끄럼 타는 게 티 났는지, 아펠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누가 맨발로 나오래?”

그렇게 말하며 아펠은 날 안아 든 채로 걸음을 옮겼다.

딱히 힘들어하는 기색도 없었기에, 나는 괜한 실랑이로 시간을 끄는 대신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하늘에 뜬 달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움직이는 속도를 보면 아직 한 시간 남짓 여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 안에만 헤어지면 되겠지.

체념인지 다짐인지 알 수 없는 생각을 하고, 나는 문득 아펠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가 크바스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크바스는 말없이 제 발치를 따라오고 있던 머랭을 들더니 녀석을 까뒤집고는 한 팔로 안았다.

아기 강아지 같은 머랭이 솜털이 난 배를 보이며 포근히 안겨 있었다.

그러고서 크바스가 머랭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내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너.’

“…….”

나는 허리를 스르륵 웅크리고 아펠의 어깨를 벽 삼아 크바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빠, 빨리 가자.”

내가 아펠의 옷자락을 당기며 속삭였다. 아펠이 쿡쿡 웃으며 날 안은 팔에 힘을 줬다.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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