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 *
“그럼 두 분이 누명을 썼단 말이야?”
갈레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몸을 내밀자 그의 왼쪽 귀에 매달린 귀걸이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니, 누가? 왜?”
“나야 모르지.”
모르긴커녕 범인은 아펠이고 이유는 운명을 거스르겠다는 포부 때문이었지만, 나는 굳이 그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나는 내 앞에 쌓인 네 번째 빈 그릇을 옆으로 치우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펠이랑 얘기만 좀 해봤으면 좋겠는데, 여기서 나갈 수가 없으니 문제야. 저…….”
“저놈 때문에?”
내 눈짓을 파악한 갈레트가 곧바로 말꼬리를 이었다.
테이블 옆에 각 잡고 서 있던 크바스가 들으라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래, 저놈 때문에.
나는 말을 삼키고 도도하게 찻잔을 들었다.
“그릇 치우겠습니다.”
타이밍 좋게 시녀가 들어와 테이블을 정리했다.
내가 손을 들고 말했다.
“크렘브륄레 추가요.”
“…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머리가 복잡하면 원래 단 게 땡기는 법이라고요. 심지어 크렘브륄레는 너무 작잖아!
물론 지금 그런 변명이나 할 때는 아니지만.
나는 아무도 듣지 못할 해명을 하다 말고 고개를 털었다.
시녀가 식당을 나가자 갈레트가 자리를 옮겨 내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아니, 황태자면 단가? 왜 사람을 감금을 시키고 그런대.”
갈레트의 말이 곧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손님맞이가 가능할 정도니 완전한 감금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별궁이 아무리 넓고 얼마나 화려하든지 간에 맘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건 마음 한구석을 항상 불편하게 했다.
“태자 전하십니다. 말을 조심해 주십시오.”
시녀가 나간 지 얼마 안 돼서인지 크바스가 존대를 했다. 그러나 갈레트는 그쪽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가서 얘기해 볼까?”
“아펠한테?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그냥 부딪쳐 보는 거지. 미래의 처남이 되고 싶다면서 설마 날 박대하겠어? 나는 아직도 네가… 너한테… 너를…….”
갈레트가 갑자기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거렸다.
그러고 보니 연회장에서 아펠과 공식 교제 발표를 하고 갈레트와 그 이야기를 한 번도 나누질 못했구나.
나는 그 옆으로 의자를 바짝 당기고 갈레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못 봐주겠네.”
마치 카눌레 같은 추임새를 말하며 크바스가 혀를 찼다.
갈레트와 내가 동시에 그에게 눈총을 주었다.
크바스가 입을 다문 것을 확인한 후 갈레트가 다시 내게 말했다.
“사실 상황이 심상치 않긴 해. 자그마치 황비를 독살했다는 죄목이잖아. 증거도 다 나왔다던데.”
그를 토닥이던 내 손이 움츠러들었다. 아펠이 말한 대로, 정말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까?
몽블랑이 죽을 때까지?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갈레트가 불쑥 물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펠과 이야기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니, 정말 그것만으로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
나는 품에 넣어뒀던 손수건을 꺼냈다. 며칠 전에 별궁으로 오는 길에 주운 것이었다.
붉은 잎과 흰 장미가 수놓아진 검은색 손수건. 그 밑에 적혀 있는 페디엇이라는 이름.
‘페디엇 백작이라는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데?’
‘널 안 좋게 말했어.’
아펠과 그런 대화를 나누고, 나는 페디엇가가 날 암살할 계획이라도 세우고 있는 줄 알았다.
원작의 크레페에게 닥쳤던, 수많은 고난이 그런 식이었듯 말이다.
그러나 탑으로 끌려가던 여자가 떨어뜨린 이 손수건을 확인하고, 나는 그녀를 어디서 보았던 건지 기억해 냈다.
‘어쩜 태자 전하께서 관심을 보이자마자 저렇게…….’
그게 전부였다.
나를 에스코트해 준 크렘을 버리고 곧장 아펠을 선택했다는 오해.
사실 자세한 사정을 모른다면 그런 오해를 하는 것도 당연했다.
내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이 그녀 한 명뿐인 것도 아닐 터였다.
그러나 그녀를 탑으로 끌고 온 기사나 아펠의 태도를 떠올려보면, 분위기상 그녀가 설교나 들으러 잡혀 온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크레페?”
애꿎은 손수건만 바라보며 아무 말 않고 있자, 갈레트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치켜들고 손수건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갈레트를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브라우니가 필요해.”
“네. 곧 준비하겠습니다.”
막 크렘브륄레를 가져온 시녀가 다시 트레이를 끌고 식당을 나갔다.
나는 할 말을 잃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크흠. 어, 어쨌든.”
괜히 멋쩍게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이번 보름밤에…….”
아니지.
나는 말을 멈추고 크바스를 곁눈질했다. 그는 마르크가 으레 그러했듯 그림자처럼 곧게 서 있었다.
내게 조심하라는 언질을 준 적이 있긴 했지만 그 역시 황실 기사단의 일원이었다. 함부로 말을 흘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옷자락을 당겨 신호하자 갈레트가 내게 귀를 가져다 댔다.
“마탑으로 나와달라고 전해줘.”
내가 갈레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거긴…….”
갈레트가 조금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유는 알 만했다. 마탑은 이미 출입 금지였던 데다, 심지어 파타슈는 마탑에 정식으로 들어가 본 적도 없었으니까.
별다른 조치가 없다면 마탑의 일원이 아닌 사람은 해당 구역에 손만 들이밀어도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리곤 했다. 언젠가 마르크가 당했듯이.
하지만 나는 이미 파타슈와 마탑 안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우리가 만났던 곳이라고 하면 알 거야.”
내가 짧게 덧붙였다.
* * *
물론 갈레트는 내가 마탑에 있는 동안 파타슈와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내가 그런 말을 하자마자 새삼스럽지도 않은 적의를 드러내며 씩씩거렸다.
물론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는 위로나 양해를 구하는 말 대신 눈에 힘 빡 주고 그를 제어했다.
그래도 부탁한 일은 해줬겠지?
크바스의 대응은 몰라도, 갈레트가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건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이런 생각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스스로가 조금 민망하군.
어쨌든, 갈레트는 자신을 두고 파타슈에게 볼일이 있는 듯한 내게 조금 삐친 듯했지만 내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브라우니가 필요한 이상 파타슈 외의 다른 사람이 날 도와줄 수도 없고.
“…….”
자는 척 침대에 누워 있던 내가 슬그머니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문에 조용히 귀를 가져다 대자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물론, 그렇다고 이쪽으로 나가는 건 자살 행위겠지만.
나는 까치발을 하고 조심스럽게 창가로 향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함지박만 한 달이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갈레트를 만난 지 이틀이 지난 오늘.
오늘이 바로 얘기해 둔 보름날이었다.
나는 머랭을 위해 남겨놓았던 틈새로 손가락을 넣고 창문을 열었다. 당연히 달칵 소리도 날 일이 없었다.
이걸 선견지명이라 해야 하려나?
의도치 않은 스스로의 현명함에 감탄하며 나는 조심스레 창문을 넘어갔다.
서늘한 밤공기를 머금은 흙 알갱이가 내 맨발바닥에 느껴졌다.
발소리가 걱정돼 신발도 안 신은 터라 거친 감촉까지 선명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머랭이 안내해 줬던 비밀 통로가 있는 건물로.
* * *
감금 생활 중에 손님을 부를 수도 있었던 것처럼, 사실 내게 직접적인 제약 같은 건 없었다.
크바스도 낮에만 껌딱지처럼 붙어 다닐 뿐 밤에는 다른 기사와 교대를 했고, 그 기사는 내 방까지 들어오지도 않았다.
역시나 별궁을 따로 감시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나는 별다른 방해 없이 비밀 통로가 있는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으으.”
신발…….
돌바닥에 발을 내딛자 그 한기에 저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잠깐 멈춰서 몸을 웅크리고 주저앉았다.
초겨울이 가까워지는 날씨에 내 차림은 로브 하나 걸치지 않은 얇은 원피스, 정확히는 실내용 슈미즈 드레스 단벌 차림이었다.
그나마 드레스가 길어서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시려오는 맨발가락을 꼬물거리다가 이내 조심스러운 걸음을 내디뎠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이곳은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온 듯 고요했다.
머랭도 없이 혼자라는 사실을 되새기자 새삼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털어 무서운 생각을 뿌리치고 기억을 더듬어 계단을 찾아 내려갔다.
내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손에 닿는 난간의 감촉이 전보다는 깨끗하게 느껴졌다.
이어 나타난 문을 열고 마탑의 도서관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본관 건물을 나가 연구동 뒤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파타슈 님!”
“헉!”
그는 길도 없는 숲 한가운데에 서서 뭘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은 채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목까지 가리는 마법사용 로브를 입은 모습이 마치 괴한처럼 보였으나, 그도 헉 소리를 내는 걸 보니 어두운 밤공기에 괜히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키가 크고 마른, 후드를 쓴 남자.
나를 향해 선 그를 보며 나는 순간 그의 모습이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 나온 폭군의 앞잡이와 비슷해 보여 몸을 움찔했다.
곧 로브의 옷자락을 젖히고 브라우니의 얼굴이 뿅 튀어나온 덕분에 허탈해졌지만.
“삐!”
“브라우니도 안녕! 잘 있었지?”
공중에 두둥실 떠 오는 녀석을 꽉 안아 인사했다.
파타슈는 얼굴을 가리던 후드를 벗고 어딘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귀신 보듯 뜯어보았다.
“어, 어떻게 오신 거예요?”
“파타슈 님이 하실 말씀이에요?”
내가 피식 웃으며 맞받아쳤다.
마탑의 경비가 그리 삼엄하지 않다는 건 몽블랑과 마주친 연회 날에 이미 알게 된 바였다.
게다가 예전에 파타슈와 마탑에서 본 장소가 바로 이 숲이었다.
그때 경보가 작동하지 않은 걸 보면 키슈가 미리 수를 써놓은 게 분명했다. 파타슈가 이용할 수 있는 개구멍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진짜 구멍을 파고 기어들어 왔다는 건 아니고, 마법으로 뭔가 수를 쓴 거겠지.
“키슈 님이 말씀하셨나 봐요?”
파타슈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그 내용을 직접적으로 들은 적은 없었지만 설명하자면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대충 긍정하는 대답을 했다.
“네에, 뭐.”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불러내시면 어떡해요. 갈레트 님이 제게 말을 안 전하면 어쩌려고.”
“갈레트 오빠가 제 부탁을 안 들어준다고요?”
반사적으로 풋, 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파타슈와 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너무 뻔뻔했나.
뒤늦게 생각한 내가 헛기침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