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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01)화 (101/181)
  • 101화 

    몽블랑은 그제야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가 나와 키슈를 번갈아 보더니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펠 전하는 저를 살려두지 않으실 겁니다. 그분이 황제가 되려면 저를 죽여야 한다고 예언서에 적혀 있었으니까요.”

    “왜요?”

    “…제가 그 이유를 말하면, 크레페 님과 키슈의 목숨도 위험해질 겁니다.”

    말하는 내용을 보건대, 아마 그건 알아서는 안 되는 정보인 듯했다.

    ‘현명한 사람이니까 괜찮겠지.’ 하던 아펠의 말이 떠올랐다.

    그럼 아펠한테 물어봐야겠네.

    어쩐지 똥개 훈련이라도 받는 기분이었지만, 그래서 이 상황이 해결된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후작님.”

    내 부름을 듣고 몽블랑이 고개를 들었다.

    어떤 표정도 없는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냉정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지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몸가짐을 바로하고 물었다.

    “제 어머니의 죽음을 방관하신 이유가, 그게 운명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죠?”

    몽블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담담하게 묻는다고 한 건데, 무거운 표정을 보니 이것도 내가 그를 탓하는 것처럼 들린 모양이었다.

    내가 곧바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후작님께서 저를 구하는 것도 운명이었나요?”

    “…아뇨. 그런 얘기는 없었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몽블랑의 생각이 뭐였는지에 대해서는 얼추 짐작이 갔다.

    마법사와 성직자는 거의 동의어라고 했다.

    아마 몽블랑은 자신의 운명이 적힌 책을 본 순간, 그것을 거스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 거스르려다가 실패한 것일 수도 있지. 운명에게는 자신을 유지하려는 성질이 있다고 했으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차치하고서라도, 몽블랑의 목표는 내가 예상한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였다.

    엄마 대신 나를 구했던 것도 ‘신탁의 서에 적혀 있지 않았던 사람들을 지키자’고 생각했던 거라면 앞뒤가 맞았으니 말이다.

    새삼 괘씸하긴 했지만 진범이 따로 있다니 몽블랑만 물고 늘어질 수는 없었다.

    오히려 몽블랑이 정말 처형당하면 나도 뒤끝이 씁쓸할 것 같고.

    “나가실 생각은 없는 거예요?”

    “저요! 저 있어요!”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키슈가 쌍수를 들고 외쳤다. 수갑 짤그랑거리는 소리가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순간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던 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일단 손 좀 줘보실래요?”

    키슈가 의아한 기색으로 수갑 찬 손을 내밀었다.

    나는 왼손의 팔찌를 쥐어 마나를 모으고 키슈의 수갑을 톡 건드렸다.

    쩔걱 소리가 나며 수갑이 풀리자, 키슈가 입을 쩍 벌렸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있어요. 의심받지 않으려면 이따가 다시 수갑을 차야겠지만…….”

    “어, 어떻게 한 거예요?”

    내 말을 끊고 키슈가 말을 더듬거렸다.

    그녀의 격한 반응에 조금 민망해진 내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어, 금속이 원래 마나가 잘 통하잖아요. 제 팔찌에 마나 흡수 마법진이 있어서…….”

    “하지만 이 수갑은 마나 억제용이라!”

    둘러대긴 힘들겠군.

    키슈는 당장이라도 날 대상으로 연구를 시작할 기세였다. 내가 못 알아들은 척 고개를 젓고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제가 아펠한테 얘기해 볼게요.”

    * * *

    “보고 왔어?”

    수갑을 반납하고 탑을 나오자마자 아펠이 웃는 얼굴로 날 맞아주었다.

    나는 그에게 대답하기 전에 문 옆을 지키고 선 기사들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아펠이 곧장 팔을 휘저어 우리 주변에 마법진을 띄웠다.

    얼핏 보니 우리 목소리가 새어 나가는 걸 막는 용도인 것 같았다.

    “말해도 돼.”

    그의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내가 입을 열었다.

    “운명을 바꾸는 걸 보여주겠다며. 몽블랑 후작님을 처형시키는 게 그 방법이야?”

    아펠이 눈을 내리깔고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얌전히 납득할 거란 생각은 처음부터 안 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답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펠을 설득하는 게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몽블랑이나 아펠은 아직 모르고 있겠지만, 운명을 바꾸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갈레트가 이날 이때까지 멀쩡히 살아 있는 것만 봐도.

    그러니 여기선 내가 아펠을 설득하기에 최적의 인물이라고 해야겠지.

    그 사실을 되뇐 나는 어린아이 달래듯 아펠의 등을 토닥이며 계속 조잘거렸다.

    “내가 자세한 얘기는 못 해. 근데 우리 이러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거라구. 나중에는 나도… 그, 약혼 얘기 받아들일 것 같고.”

    이 분위기에는 그리 안 맞는 사족이었다. 나는 괜한 말을 했나 싶어 잠깐 민망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 사이에 아펠이 입을 열었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야.”

    “네가 본 운명이 뭔데?”

    “내가 널 죽이는 미래.”

    갑자기 훅 들어온 미래 스포일러에 말문이 막혔다.

    “그, 그럼 안 죽이면 되잖아!”

    “…….”

    당황한 티를 너무 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펠은 뭐라 대답하는 대신 피식 웃었다.

    그러고 아펠은 본궁을 향해 걸음을 뗐다. 마법진이 우리의 움직임을 따라왔다.

    마법진의 좌표를 공식화한 것과 끊임없이 마나를 주입할 수 있는 마력 중 어느 것에 더 놀라야 할까.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황제가 되면 끝날 일이니까.”

    “그럼 후작님을 처형시키는 거랑은 관계없지 않아?”

    “크레페, 그 사람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 날 설득해 달래? 자길 탈출시켜 달래? 그런 말 안 했지?”

    아펠이 교묘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러나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기에 나는 우물쭈물하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마법진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지시하신 일을 끝냈습니다.”

    크바스가 아펠에게 다가와 예를 갖추고 말했다.

    “탑으로 보내놓도록.”

    “예.”

    뭐를? 누구를?

    알 수 없는 대화에 그들을 번갈아 보다가, 나는 아펠이 다시 마법진을 띄워주기를 기다렸다.

    크바스만 멀어지면 계속 그를 설득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펠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크바스 경, 크레페를 별궁으로 데려다줘. 몽블랑 후작의 처우가 결정될 때까지 경이 옆을 지켜주었으면 좋겠군. 위험할 수 있으니 거기서 나오지 말고.”

    “예.”

    “뭐? 야, 잠깐…….”

    그거 완전 감금 아니냐!

    “금방 끝날 거야.”

    기가 막혀 입을 뻐끔거리는 날 보며 아펠이 부드럽게 웃었다.

    크바스가 곧바로 내 팔을 붙잡았다.

    “아펠! 멋대로 하지 마! 나 가만히 안 있을 테니까!”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크바스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고서 내 발로 걸어 별궁으로 돌아가려 했다.

    크바스는 갑작스러운 명령에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내 감시역이겠지.

    입술을 비죽이며 그를 곁눈질했다. 그러나 크바스는 내 시선을 맞받아치는 대신 다른 기사와 눈짓을 주고받고 있었다.

    내가 얼결에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여자를 연행해 가던 기사 두 명이 있었다.

    기사들이 내 경로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여자의 팔을 끌어당겼다.

    여자의 품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그때, 여자가 나를 알아본 듯 큰 소리로 외쳤다.

    “크, 크레페 님!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

    “소란 피우시면 안 됩니다.”

    날 아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낯선 얼굴이었다.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기사들은 그녀를 끌고 탑이 있는 방향으로 멀어졌다.

    나는 뒤늦게 그 자리에 다가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것을 주워 들었다. 붉은 잎과 흰 장미가 수놓아진 검은색의 손수건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 쓰여 있는 글씨는…….

    “가시죠.”

    크바스가 재촉하듯 내 등을 떠밀었다. 문득 그가 얘기했던 ‘조심하라’던 목소리가 뇌리에서 되풀이됐다.

    【 몽블랑 구출 작전 】

    별궁이라는 이름만 보면 본궁 옆에 딸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사실상 별궁에도 있을 건 다 있었다.

    침실, 식당, 서재, 집무실, 접대실 등등.

    당연히 이곳에 머무는 게 그리 불편할 이유는 없었다.

    덧붙여 원래 내 성격도 나다니는 걸 그리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평소 생활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디저트 가져왔습니다.”

    무뚝뚝한 어투로 입장한 시녀가 접시와 찻잔을 몇 개 내려놓고 곧바로 식당을 나갔다.

    오늘의 메뉴는 가나슈를 채운 롤 케이크와 크렘브륄레와 홍차로군.

    “또 먹냐?”

    “어허, 돌쇠야. 또 드시나요, 마님? 이라고 해야지.”

    “뭐라는 거야?”

    크바스가 이해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내가 별궁에 갇혀 있는 동안 내 말동무를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쿵짝이 안 맞아서야, 원.

    나는 홍차를 마시려다 말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영문을 모르는 와중에도 본인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건 이해했는지, 크바스의 표정은 영 불쾌해 보였다.

    물론 내 알 바 아니지만.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나는 홍차를 입에 대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녀가 문에서 비켜서자, 그녀의 뒤로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오빠!”

    “크레페!”

    갈레트가 반갑게 다가와 어화둥둥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니, 안아 들려 했지만 내 뒤꿈치만 바닥에서 살짝 떨어지는 정도로 그쳤다.

    음, 슬퍼지는 묘사는 그만두자.

    “저쪽에 앉아. 오빠 몫도 준비해 놨어.”

    내가 갈레트에게 내 맞은편 자리를 손짓했다.

    말마따나 내가 준비한 식기는 처음부터 2인분이었다. 식탁이 넓어 조금 멀어 보이긴 했으나 대화를 나누기엔 충분했다.

    “연회만 끝나고 온다더니!”

    갈레트가 옅은 원망이 묻어 나오는 말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내 대답에 한숨이 섞여 나왔다.

    나는 갈레트의 시선을 마주 보는 대신 포크를 들었다.

    두껍게 자른 롤 케이크를 덜어 입에 넣자 쌉싸름한 카카오 향이 입안에 퍼졌다.

    크림과 섞여 한층 묵직하게 느껴지는 초콜릿 맛은 그것을 꿀꺽 삼키고 나서도 혀 위에 남아 있었다.

    크으, 이 썩는 맛!

    꼬옥 감았던 눈을 뜨고 따끈한 홍차를 한 입 마시자 입안이 깔끔하게 씻겨 내려갔다.

    뒤늦게 갈레트와 눈이 마주쳐 고개를 갸웃했다.

    “왜?”

    “누구 동생이길래 그렇게 귀여워?”

    “…카눌레 오빠 동생이다.”

    괜히 민망해져 그렇게 대답했다. 아까는 얼싸안을 정도로 반가웠는데 이젠 그냥 부끄러웠다.

    나는 나도 모르게 크바스 눈치를 보고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대놓고 질린 표정 짓지 않아도 자제할 거라구.

    “아무튼, 피오르 선생님은 좀 어떠셔? 오빠도 아직 그쪽 공방에 있지?”

    “난 벌써 돌아왔지. 근데 나한테 매일같이 연락이 오긴 해. 키슈 님이랑 몽블랑 얘기 좀 알아오라고.”

    “…….”

    속 터진다, 속 터져.

    나는 욕이라도 치밀 것 같은 마음을 억누르고 스푼을 들었다.

    아기 손바닥만 한 종지에 담긴 크렘브륄레를 가져와 윗면을 쿡쿡 찌르자, 불에 그슬려 살짝 단단해진 설탕이 탁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마치 곧 깨질 것 같은 나의 멘탈과도 같구나.

    나는 설탕 밑에 담긴, 푸딩처럼 부들부들한 커스터드도 한입에 호로록 마셔버렸다.

    별궁에 감금된 내게 허락된 일이라곤 소처럼 일하고 개처럼 먹는 것밖에 없었다.

    감금치고는 호화로운 메뉴라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이긴 했지만.

    “이것도 먹을래?”

    갈레트가 내 눈치를 보며 제 크렘브륄레를 내 앞으로 밀었다.

    나는 거절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서 곧바로 윗부분을 스푼으로 팍팍 부쉈다.

    내 전투적인 태도에 갈레트는 사정을 설명해 달라는 듯이 크바스를 슬쩍 쳐다보았다.

    “뭘 봐?”

    크바스가 짧게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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