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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00)화 (100/181)
  • 100화 

    내가 따지러 온 것처럼 안 보이나? 암살 어쩌고 하는 게 가벼운 이야기도 아닌데.

    하지만 아펠의 기분이 시종일관 좋아 보이니 내 쪽에서 화내며 묻기도 뭐했다.

    대답을 피할 것 같진 않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내가 갈팡질팡하고 있자 아펠은 내 팔을 끌어 제 침대에 앉혔다.

    나는 으레 그랬듯 아펠이 내 옆자리에 앉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펠은 한쪽 무릎을 꿇고 별안간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어라, 잠깐만. 이거 혹시…….

    “크레페, 나랑 정식으로 약혼해 줄래?”

    “…….”

    어색한 침묵이 방에 들어찼다.

    내가 두 눈을 멀뚱히 깜빡이자 한참 기다리던 아펠이 내 안색을 살폈다.

    나는 뒤늦게 손을 들어 내 뺨을 꼬집어보았다.

    “크레페?”

    “이거 꿈 아니지?”

    그러고 나자 아펠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무릎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답은 나중에 해줘도 괜찮아.”

    나는 그의 얼굴을 쫓아 고개를 들었다. 이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아니 아펠의 정신머리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고개를 세차게 젓고 아펠의 팔을 당겼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몽블랑 후작님이 범인이었던 거야? 우리 엄마를… 죽인?”

    “아, 후작이 암살죄로 잡혀 왔다는 얘기를 들었나 보구나. 하지만 틀렸어. 그 사람의 죄는 네가 아니라 내 어머니를 죽이려 한 거니까.”

    “뭐?”

    반사적으로 되묻고 나는 아까 보다 만 그림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핏기 없는 얼굴에 무표정한 여자는 매우 가녀린 체구를 갖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몸도 매우 약하다고 했다.

    그녀의 서거 후, 사인이 암살이었다는 의혹은 있었으나 사실상 근거 없는 헛소리로 치부되고 있었다.

    그런데 몽블랑이 황비를 암살했다고?

    “물론 거짓말이지만.”

    “야, 너 지금 이게 장난 같아?!”

    벌컥 화가 치밀었다.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면 차분히 설명할 생각을 해야지, 처음부터 끝까지 영문 모를 소리만 듣고 있자니 열불이 났다.

    나는 씩씩거리며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딴에는 위협하려는 것이었는데, 아펠은 도리어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부드러운 손길로 내 팔을 쓸었다.

    “그래도 증거는 충분해. 내가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거든.”

    “…준비?”

    그의 온건한 대응에 내 태도도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상황은 내 생각처럼 온건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펠이 날 진정시키며 짧은 말을 덧붙였다.

    “몽블랑 후작을 처형시킬 준비.”

    “…….”

    역시 꿈인가?

    순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꿈이 아니라면 악취미적인 장난일지도 몰랐다. 갑자기 처형이라니.

    나는 아직도 이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펠의 말을.

    “미안. 놀란 모양이네. 내가 황제가 될 준비…라고 말하는 게 나았으려나?”

    아펠은 자상하게도, 내가 원하는 ‘전부’를 설명하겠다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크레페, 잘 들어. 내가 널 좋아하는 건 알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닭살 돋는 말이나 할 때는 아닌 것 같았으나 아펠은 그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럼 내가 하는 행동이 너를, 아니 우리를 위해서라는 것도 믿어줄 수 있지?”

    “…….”

    이번 끄덕임에는 조금 망설임이 필요했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도 아펠의 의도에 나쁜 뜻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잠깐의 머뭇거림 끝에 고개를 숙였다.

    제 말에 동의한 거라고 생각한 듯, 아펠은 아이를 달랠 때처럼 자세를 낮추고 내 팔뚝을 토닥거렸다.

    “그럼 날 도와줄 수 있겠어?”

    “대답부터 해.”

    눈을 치키고 짧게 말했다.

    처음부터 얌전히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내가 그를 믿는 것과 이번 일을 눈감아 주는 것은 철저히 별개의 얘기였다.

    그러자 아펠은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시간이 지난 후, 말을 고른 그가 입술을 뗐다.

    “운명을 본 적이 있다고 했지?”

    순간 내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너도 신탁의 선가 뭔가 하는 걸 본 거야?!”

    그러자 아펠의 눈빛이 흔들렸다.

    “…예상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뭐가 적혀 있었는데? 몽블랑 후작님이랑은 무슨 상관이고?”

    나는 아펠의 팔을 마구 흔들며 질문을 쏟아냈다.

    그러나 검술로 다져진 듯한 선 자세는 흔들리는 낌새도 없이 곧았다.

    그 모습은 꼭 내가 뭐라 부추겨도 진실을 털어놓지 않겠다는 듯 보였다.

    의미 없는 확대 해석일 거라고 생각해도 불안감을 숨길 수는 없었다.

    곧 아펠이 손을 들어 내 뺨을 감쌌다.

    “그렇게 불안해하지 마. 너도 운명을 바꾸기를 원한다면서. 내가 보여준다고 했잖아.”

    “하지만 몽블랑 후작님은…….”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 그 사람도 알고 있을 테니까.”

    뭘?

    그런 생각이 번뜩 스쳤지만 물어볼 타이밍은 없었다.

    아펠은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는 내 어깨를 감싸고 방 밖으로 이끌었다.

    나는 아펠의 방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가족의 그림이 오래도록 각막에 남았다.

    * * *

    아펠을 조심하라던 크바스의 말, 문득문득 드러나던 그의 낯선 태도, ‘운명’이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과 머랭을 데리고 마탑에 찾아온 오래전의 그 밤.

    ‘그럼 앞으로는 내 운명으로 장난치지 마세요. 아니, 저 말고 다른 사람들이라도!’

    ‘그래, 앞으로는.’

    그 모든 것들이 디몬과 나누었던 첫날의 대화와 섞여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아펠을 따라 걸었다.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본궁을 벗어나 황궁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나무들에 둘러싸여 잘 보이지 않던 탑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것은 이끼 낀 돌벽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다른 황궁의 건물들에 비하면 관리 안 된 티가 역력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 두 명이 아펠에게 약례하고 비켜섰다. 아마 이 안에 몽블랑이(어쩌면 키슈도) 있는 것 같았다.

    “가자.”

    “나 혼자 갈게.”

    나는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고 아펠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마탑 소속이 아닌 아펠의 앞에서는 못 할 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아펠이 입을 다물었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할 가능성은 충분하고도 넘쳤기에, 나는 내심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다지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아펠은 내 예상보다 쉽게 물러났다.

    “그래, 괜찮겠지. 현명한 사람이니까.”

    그는 나를 대신해 녹슨 문을 열고 예의 시린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기다릴게.”

    아펠이 싱긋 웃으며 짧게 인사했다.

    * * *

    탑의 1층에는 그곳을 감시하는 게 일인 듯한 사무원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황족 이외의 사람들이 응당 따라야 하는 절차라며 내게 수갑을 하나 건넸다.

    저는 죄인으로 들어온 게 아닌데요? 하는 의문을 담아 보자, 그녀가 건조하게 대꾸했다.

    “한쪽 손목에만 채우시면 됩니다.”

    뭐냐고 물어봤자 친절한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아서 나는 얼떨떨하게 그것을 오른쪽 손목(왼쪽 손목에는 아펠이 준 팔찌가 있으니까)에 채웠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눈치를 보다가 탑 중앙에 나 있는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

    아펠은 몽블랑 후작을 처형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이곳은 아마 감옥이거나 감옥으로 가기 전의 대기실, 그러니까 구치소 정도 될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안은 거의 방치되다시피 지저분했다.

    돌바닥 틈새에는 피인지 오물인지 모를 얼룩이 남아 있었고 곳곳에는 방문 대신 철창이, 창문의 모서리에는 먼지 쌓인 거미줄도 보였다.

    철창 너머에 있는 사람 한두 명이 눈에 밟히긴 했지만 그들은 거의 잠들어 있거나, 적어도 잠든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나는 소용돌이 모양으로 세워진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위층이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왜 그렇게 얌전하게 잡혀 왔어! 반항은 못 해도 반론은 해야지!”

    “네가 그러다 잡혀 온 거잖아.”

    “아무튼 변호를 해줘도…….”

    위층으로 고개를 배꼼 내밀자 키슈가 입술을 비죽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뻐근하다 못해 무거운 허벅지를 들고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크레페 님?”

    키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느라 지쳐 대답은 못 하고, 대신 비린 맛이 나는 침을 삼키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창살 너머에 낡은 침대와 책상, 의자와 창문 정도가 갖춰진 방에 갇혀 있었다.

    물론 그들의 양손은 수갑으로 구속된 상태였다.

    키슈는 그 와중에도 내가 불쌍해 보였던 듯, 그쪽 편에 있던 의자를 창살 틈새로 꺼내보려고 이리저리 돌리며 낑낑대다가 이내 포기하고 내려놓았다.

    “설마 혼자 오셨어요?”

    “끄응, 아펠은 밑에서 기다리겠대요.”

    “아펠… 태자 전하요?”

    아펠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이 더 있는 것도 아닐 텐데 키슈는 굳이 한 번 더 물어보았다.

    어느 정도 숨을 돌린 내가 왜 그러느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키슈가 갑자기 입이 찢어져라 함지박만 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두 분, 약혼하신 거 맞죠?”

    키슈가 창살 틈새로 검지를 내밀고 내 어깨를 쿡쿡 찔렀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아무튼 대답은 해주기로 했다.

    “아직 아니에요. 그것보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래요?”

    아까 전 세상 다급하게 끌려간 것치곤 여유로워 보이니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겠다.

    키슈는 어물거리며 뺨을 긁적이고, 침대에 앉아 있는 몽블랑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설명도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얌전히 죽음을 받아들일 거라고 전해주십시오.”

    “네?”

    어떠한 해명도 슬픔도 없는 그 말에, 나는 순간 귀를 의심하고 되물었다.

    그리고 그 말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뭐?! 야, 제정신이야?”

    키슈가 후다닥 침대로 가더니 몽블랑의 멱살을 잡고 짤짤거렸다.

    “난 우리 이쁜 아들 두고 못 죽어어! 적어도 발버둥이라도 치란 말야!”

    “걱정하지 않아도 키슈, 넌 안 죽을 거다. 여기 온 것도 날 변호하려다가 같이 끌려온 것뿐이고……. 넌 애초에 신탁의 서를 본 적도 없잖아.”

    “…….”

    키슈가 갑자기 손을 멈추고 내 눈치를 봤다.

    아무래도 내 앞에서 신탁의 서 어쩌고 하는 얘기를 꺼내기가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알고 있다’며 장황한 설명을 하는 대신 몽블랑에게 질문했다.

    “뭐가 적혀 있었는데 그래요?”

    “에?”

    키슈가 얼빠진 소리를 내며 몽블랑의 멱살을 틀어쥔 손을 풀었다.

    “크레페 님도 보신 거예요? 그럼 마법 서약을 할 수 있는 인재? 하지만 마나를 하나도 못 느낀다고 하셨는데? 이건 어쩌면 유례없는…….”

    쉴 새 없이 나불거리는 키슈의 입을 몽블랑이 손등으로 툭 쳤다.

    키슈가 분위기를 파악하고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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