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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99)화 (99/181)

99화 

“그럴 수도 있지. 넌 최선을 다했어. 널 슬프게 하는 운명을 바꾸려고 한 거잖아.”

아펠이 딱 잘라 말하며 내 어깨를 감쌌다.

나는 눈물을 참으려 괜히 웃었다. 그의 말은 꼭 내 사정을 전부 알고 하는 말 같았다.

실제로 아펠도 엇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을 것이다. 원래 마법에 재능이 있는 이들은 예지몽을 꾼다고 하니까.

아펠이 내게 관심을 가진 것도 그 예지몽 때문이랬지.

나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중얼거렸다.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당연하지. 진심으로 원한다면.”

공상 같은 질문과 이상적인 대답.

서늘한 공기에 묻어나는 겨울의 들꽃 향기, 그의 체취가 코를 간질였다.

아펠이 위로하듯 나를 품에 안고 작게 속삭였다.

“내가 보여줄게.”

보여준다고?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아펠은 왜 그러느냐는 듯 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내가 뭐라 묻기도 전에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몽블랑 후작의 말이 사실인지 알아보면 되겠지.”

아펠이 가볍게 말하며 옷을 털었다. 그러자 머랭이 재빠르게 의자에서 뛰어내리고는 제 주인인 아펠의 발치에 쪼르르 달라붙었다.

아펠은 문고리를 잡은 채 싱긋 웃었다.

“조금만 기다려. 오래 안 걸릴 거야.”

* * *

몽블랑은 범인을 알고 있다? + 몽블랑은 운명을 알고 있다? = 몽블랑도 서약을 하며 자신의 운명이 적힌 ‘신탁의 서’를 본 적이 있다?

어쩌면 아펠도?

새로 갱신된 정보를 이용해 몇 가지 가능성을 정리하다가 펜 끝으로 내 턱을 꾹꾹 눌렀다.

아펠한테 그 이야기를 더 자세히 물어볼 걸 그랬구나.

“끄응.”

뒤늦은 후회를 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사실 처음에는 별걱정이 없었다. 어차피 금방 아펠과 대화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마 그로부터 삼 일째 되는 지금까지 아펠의 코빼기도 못 볼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바쁜 와중에도 저녁 식사 때만큼은 꼬박꼬박 나와 함께했던 아펠이기에 이 상황은 예상 밖이었다.

하긴, 우리 엄마를 해친 범인이 누군지 알아본다고 했으니 바쁘기도 하겠지만…….

“에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펠이 안 오면 내가 가지, 뭐.”

나는 메모하던 공책을 덮고 책상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그저께를 마지막으로 연회도 끝난 참이었다. 애초부터 연회 기간 동안에만 별궁에 머무르기로 되어 있었으니 이제 쉬제트가로 돌아가 봐야 했다.

작별 인사도 할 겸 왔다고 하면 쫓아내진 않으려니…….

그때 타이밍 좋게 별궁 바깥이 소란스러워진 것이 느껴졌다.

혹시 오랜만에 아펠이 오는 건가 싶어(아니라면 내가 본궁까지 찾아갈 생각으로) 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한 흐린 하늘에 매서운 바람.

야외 테이블을 쓸 수 있던 얼마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확연히 추워져 있었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별궁 초입으로 향했다.

내 방에서도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듯이, 그리 머지않은 곳에서부터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대부분은 갑옷을 입은 기사였고, 나머지는 아직 영지로 돌아가지 않은 일부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개선장군을 기다리는 마을 사람들처럼 길게 늘어서 있었다.

모르는 귀족에게 함부로 말을 걸기 뭐해서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게 무관심한 사람들 속에 섞여, 나는 길게 늘어선 행렬을 따라 걷다가 기사들 중 가까스로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덩… 아니, 크바스 님.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위험합니다, 크레페 님. 별궁으로 돌아가 계시지요.”

아직 생경한 말투에 대해 언급할 틈도 없이, 사람들의 웅성임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기사들의 갑옷 틈새로 눈동자를 굴렸다.

어라? 저 사람은…….

“키슈 님?”

오늘 이곳에서 볼 줄은 몰랐던 얼굴이라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키슈가 그 중얼거림을 들은 듯 나를 돌아보았다.

“크레페 님!”

키슈가 날 발견하자마자 내게 달려들었다. 그 기세가 대단해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크레페 님이 말씀 좀 해주세요!”

“무, 무슨 일이에요?”

“몽블랑이…….”

키슈가 그 이름을 꺼내려던 차였다. 내 옆에 서 있던 크바스가 키슈의 어깨와 팔을 잡고 끌어냈다.

“이탈하면 도주죄가 추가됩니다. 나중에 말씀하시죠.”

어지간히 급한 일인 것 같았지만 키슈는 황실 기사인 크바스에게 반항하지 못하고 등을 떠밀려갔다.

그녀가 멀어지며 외쳤다.

“태자 전하께 전해주세요! 몽블랑이 암살 같은 걸 했을 리가 없다고!”

* * *

‘조금만 기다려. 오래 안 걸릴 거야.’

삼 일 전, 아펠이 내 방을 떠나며 남겼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당시에는 선문답 같았지만, 키슈가 말한 암살 이야기와 연결시켜 보면 답은 명백했다.

아펠이 알아낸 것이다, 우리 엄마를 죽인 범인이 몽블랑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대체 어떻게? 무슨 증거로?

역시 몽블랑이었구나, 하는 생각보다 그런 의문이 더 먼저 들었다.

나는 서둘러 본궁으로 향했다.

“아펠 님을 뵈러 왔습니다.”

짧은 용건을 꺼내자마자 본궁의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의 분위기가 술렁였다.

내가 아펠의 교제 상대라는 걸 알고 있는 만큼 멋대로 끌어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을 확신한 나는 왼쪽 소매를 살짝 걷고, 아펠에게서 받은 팔찌를 감싸 쥐었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다시 외쳤다.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가 아펠 슈트루델 태자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왔습니다! 왔습니다! 왔습니다…….

확성 마법을 쓴 것처럼 큰 목소리가 메아리로 퍼졌다.

나와 제일 가까이 있던 기사는 참지 못하고 귀를 막았다가, 메아리가 다 끝난 후에야 큰 소리를 냈다.

“황궁에서 마법 물품을 쓰는 건 법도에 어긋납니다! 그 팔찌는 압수…….”

“황족이 곧 법도지. 저건 보통 마법 물품이 아니라 ‘펜리르의 영혼’이고.”

그건 내가 한 대답이 아니었다.

나는 아펠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치맛자락을 들어 예를 표했다. 내 목소리를 들은 아펠이 본궁 앞까지 친히 행차한 것이었다.

“소, 송구합니다.”

내게 큰 소리를 냈던 기사가 자리를 비켰다.

나는 아펠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아펠은 평소 나를 볼 때와 다를 바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는 겨울바람이 스쳤고, 뿌연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은 그의 잿빛 머리카락을 은빛으로 빛냈다.

“들어가도 되지?”

나는 웃지 않고 물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주죄니 암살죄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이었다.

당당하게 나가지 않으면 도리어 쫓겨날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 각오와 별개로 아펠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날 본궁에 안내했다.

“하하, 당연하지. 들어와.”

* * *

여기 들어오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딱 한 번, 내가 별궁에 머물기로 한 다음 날에 아펠이 내게 직접 본궁을 안내해 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본궁에 딸린 식당에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그러니 오늘은 두 번째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긴장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별궁은 화려하고 안락하게 꾸며져 있던 것과 달리 이곳은 웅장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황제가 앓아누워 있기 때문인지 전체적인 분위기도 조용하고 침울했다.

아펠이 별궁에서 저녁을 먹으려 하는 게 이해될 정도라고 해야 하나.

상황과는 그리 맞지 않는 깨달음에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나는 내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아펠을 올려다보았다.

삼 일 동안이나 내 만남을 피하고 있었던 사람답지 않게 그의 표정은 왠지 밝아 보였다.

“들어가서 얘기할까?”

아펠이 화려한 방문 앞에 멈췄다.

몽블랑이 범인으로 잡혀 왔다 했으니 아마 그와 삼자대면을 하게 되겠지, 하는 생각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래도 죄인으로 잡혀 오긴 했지만 후작이나 되는 지위이니만큼 어두침침한 지하 감옥 같은 곳 대신 이곳에 구금되어 있는 모양이었…….

“자.”

내 생각이 다 정리되기도 전에 아펠이 문을 열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방 안을 둘러보았다. 예상과 달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심지어 이곳은 마치…….

“네 방이야?”

“응. 누굴 초대한 건 처음이지만.”

아펠이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에스코트하듯 내 손을 이끌었다.

얼떨결에 방에 들어가자 그가 문을 닫았다.

“와, 진짜 장난 아니다.”

나는 그 방에 들어가자마자 사방을 둘러보았다. 참을 수 없는 감탄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러나 아펠은 내가 뭐에 그리 놀라는지 감도 못 잡은 모양이었다.

“뭐가?”

“너…….”

완전 일중독이었구나?

그 말이 턱밑까지 올라오다 말았다.

황태자의 방이니 막연히 화려하고 웅장한 것만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와 달랐다.

책상에 가득 쌓여 있는 책과 서류, 화려한 침대 주변을 둘러싼 책장과 장식장, 장식장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들어차 있는 고문헌과 마법 물품, 또 책. 그리고…….

“저 그림에 있는 게 너야?”

내가 아펠을 돌아보고 물었다.

“맞아.”

그의 긍정을 듣고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발코니로 나가는 통로 옆에, 화려한 액자에 담긴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이곳이 아펠의 방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그의 어린 시절을 그린 그림이었다.

우리 쉬제트 백작가도 특별한 날에 종종 화가를 불러 그림을 남기곤 했다.

모두 제복을 입은 가운데 나 혼자만 시폰 드레스를 입었던 그날의 그림도 아직 갈레트 방에 걸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그림처럼 정숙하고 냉랭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묘사해 보자면, 그림의 가운데에는 슈트루델의 황제일 아펠의 아버지가 위치해 있었다.

검회색의 머리칼을 가진 그는 손잡이 부분에 늑대, 아니 펜리르를 본떠 조각한 왕좌에 앉아 있었으며 표정은 없었다.

그 뒤에 서 있는 건 짙은 갈색 머리의 여자였다.

그녀의 피부는 핏기가 거의 없이 창백했고, 귀족이라면 으레 하는 머리 장식이나 귀걸이, 목걸이 같은 것도 없었다.

또한 그녀 역시 조각상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고 서 있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배경부터 옷까지 온통 채도 낮은 색으로 가득한 그림에서 그의 머리색과 눈 색만 유일하게 밝은 색이었다.

겨우 다섯 살이나 됐을까 싶은 저 어린아이가 바로 아펠이었다.

아마 황족의 위엄을 해치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제 엄마의 치마를 꽉 잡은 아이의 손아귀를 보자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얘기는 안 할 거야, 크레페?”

아펠이 장난기가 묻어나는 말투로 얘기하며 내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크흠, 그래. 대체 무슨 일인데?”

나는 뒤늦게 정신을 추스르고 헛기침을 했다.

“어디부터 설명해 줄까?”

아펠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 분위기에 대체 어떻게 저런 웃음이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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