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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98)화 (98/181)
  • 98화 

    【 2부 - 몽블랑 몬테 비안코 】

    머리가 지끈거렸다. 설마 디몬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도 아닌 몽블랑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이 상황에 혼란스럽다 못해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럼 크레페 님은 신탁의 서를 본 적이 없다는 겁니까?”

    몽블랑이 재차 물었다. 아무래도 이 아저씨는 내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는 내가 한 번도 생각한 적도, 원작에서 읽은 적도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초조함과 긴장, 약간의 희망과 그보다 더 큰 불안이 담긴 눈빛이었다.

    “저는 아무것도…….”

    나는 말끝을 흐렸다.

    따지고 보면 내가 마탑에 머문 건 겨우 몇 개월 남짓이었다. 그 나이에 신탁의 서가 뭔지, 마법 제단이 뭔지 알 게 뭐냐.

    몽블랑은 그 당연한 의문도 떠올리지 못하는 건가?

    대체 뭐가 그리 불안해서?

    그렇게 자문하자마자 내 정신이 날카로워졌다. 잊고 있던, 아니 잊었다고 생각한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나는 그 말을 입 밖에 내기 위해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내 기색이 심상찮음을 눈치챈 듯 몽블랑이 나와 몇 걸음 떨어져 섰다.

    내가 머랭을 데리고 돌아온 그때, 몽블랑은 내가 어릴 때 썼던 『내 인생 공략집』을 보고 있었다.

    내가 봐도 된다고 한 서류 사이에 섞여 있었으니 그에 대해 따져 물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몽블랑은 다짜고짜 내게 그 미래를 어떻게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마치…….

    “알고 계셨군요.”

    “…….”

    마치, 자신도 그 미래를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몽블랑은 내 짧은 말에 어떤 부정도 하지 못했다.

    대체 언제부터 어디까지? 무엇을 얼만큼?

    파고들자면 물어볼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지금은 긴 이야기를 나누기에 그리 좋은 때가 아니었다.

    이곳은 밖이었고, 연회의 음악은 아직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그래, 아펠. 분명 그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펠의 차분하고 고요한 눈빛을 떠올리자 마음이 조금이나마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긴 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고, 똑바른 눈빛으로 몽블랑을 마주 보았다.

    “엄마를 죽게 만든 게 후작님인가요?”

    “…아뇨.”

    대답과 달리 그는 마치 죄를 선고받는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몽블랑도 곧 내 기다림을 눈치챘다.

    “믿기 힘들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저는 범인이 아니에요. 저는 단지…….”

    몽블랑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가 떨림을 멈추려는 듯 주먹을 그러쥐었다.

    “방관했을 뿐입니다.”

    “왜요?”

    짧게 묻자 그가 입을 다물었다. 역광을 받은 그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몽블랑이 내 눈을 마주 보았다.

    청색이 감도는 잿빛의 눈동자는 아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한색(寒色)이었다.

    몽블랑은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것 같은, 담담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게 운명이니까요.”

    “…….”

    분노보다는 허탈감이 먼저 밀려들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거짓말일지도 모르지.

    나는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냉정히 따져보면 그가 한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지금 당장 그 정답을 알아낼 필요는 없었다.

    내가 알고 있던 운명과 현실이 달라진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이제 와서 그에게 사실을 말하라고 따져 묻기보다 내가 스스로 알아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내가 몸가짐을 바로 하고 말했다.

    “후작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제가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때가 안 좋으니 나중에 이야기하지요.”

    “…예.”

    몽블랑이 작별의 예를 갖추고 연회장을 향해 돌아섰다.

    나도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긴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그를 붙잡는 대신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대체 뭐야!

    시간이 지날수록 답답함이 몰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태연한 얼굴로 몽블랑을 보긴 힘들 것 같아서, 나는 결국 연회장 대신 별궁의 내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 후 나는 곧바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흑역사를 만들고 온 사람처럼 이불을 걷어차다가, 이내 엉망진창이 된 머리를 내밀고 씩씩거렸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냐.”

    문득 자괴감이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 보듯 주위를 맴돌고 있던 머랭이 폴짝 뛰어 내 옆에 몸을 말고 앉았다.

    나는 침대에 대자로 누워 캐노피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막 들었던 몽블랑의 목소리가 다시금 내 귓전에 아른거렸다.

    ‘방관했을 뿐입니다.’

    야속한, 어찌 생각하면 증오스럽기까지 한 발언이었다.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크레페의 시점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였다.

    보통 웹 소설에 들어가 있는 외전도, 다른 인물 시점의 이야기도 전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하지 못한 거다, 몽블랑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원작 크레페가 바보였어. 원작이! 아니…….”

    나도 바보야.

    이제 와 돌아보면, 몽블랑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굳이 그가 자신의 방관을 내게 고백할 이유는 없었다. 거짓말을 할 거였다면 애초부터 이 미래 어쩌고 하는 말도 안 했겠지.

    그럼 몽블랑은 왜…….

    똑똑.

    그때,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머랭이 귀를 쫑긋하고는 곧바로 침대를 내려갔다.

    나도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창문 밖에는 나를 걱정해서 온 듯한 아펠이 서 있었다.

    “뭐야, 멀쩡한 문 놔두고 왜 창문을 두드려.”

    괜히 입술을 삐죽이며 창문을 열어주었다.

    손을 내밀자 아펠이 내 손을 맞잡더니, 긴 다리를 올려 내 허리 정도 되는 높이의 창틀을 딛고 훌쩍 넘어왔다.

    “옛날 생각나서 좋잖아.”

    그가 해사하게 웃고는, 나와 맞잡은 손을 들어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를 밀어냈다. 그러자 아펠이 갸우뚱하며 다시 말을 걸었다.

    “무슨 일 있어?”

    “…….”

    “크레페?”

    내가 별말 하기도 전에 이상한 기색을 느낀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시치미를 뗄 분위기가 아닌 것을 깨닫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앉았다.

    “그냥 내가 좀 바보 같아서.”

    짧은 푸념을 하며 나는 엉망이 된 머리 장식을 풀었다. 장식에는 작은 보석이 구슬처럼 엮여 있었다.

    나는 아펠을 마주 보는 대신 그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뭐가?”

    아펠이 가만히 물었다.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항상 똑같았다. 이제 괜찮겠지 생각하면 사건이 터졌고, 방심하면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앞으로 또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다른 누구보다 나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내가 대답 대신 입을 다물자 아펠이 무릎을 굽히고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보석보다 파랗고 투명한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순간 몸을 굳히며 눈을 꽉 감았는데, 아펠은 태연히 내 손에서 머리 장식을 가져다가 협탁에 올려놓았다.

    키, 키스하려는 줄…….

    나는 민망함에 달아오른 뺨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흠, 흠.”

    아펠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속상한 일이 있었어?”

    “…….”

    “아까 몽블랑 후작이랑 같이 나갔지? 그 사람 때문에 그래?”

    어린아이 달래듯 하는 그의 태도를 보자 조금 우스웠다. 내가 볼 때 어린애는 아펠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 어린아이가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게 싫었다. 아니, 내 주변의 누구에게든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처럼 대답했다.

    “아냐, 아무것도.”

    “그럴 리가 없잖아.”

    “걱정 끼치기 싫어서 그래.”

    “걱정하게 해줘.”

    아펠의 대답은 마치 내 말을 예상했다는 듯 막힘이 없었다.

    나는 그 태도에 놀라 아펠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아펠이 팔자 눈썹을 하고 옅게 웃었다.

    “다그치는 것처럼 보였다면 미안. 하지만 너 어렸을 때부터 네 얘기를 잘 안 했잖아. 마탑에서도 그랬고.”

    “…너도 마찬가지면서.”

    개미 기어가는 소리로 반항 아닌 반항을 했다.

    아펠이 작은 소리로 웃고 내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지금도 못 할 얘기야?”

    “그건 아니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평생 못 할 이야기에 가까웠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언제든, 누구에게든 말할 수 있었다.

    직접 디몬을, 신을 만났다는 헛소리를 누가 믿어주겠어?

    “마탑에서.”

    “응.”

    하지만 내 각오는 단 네 글자 만에 무너졌다.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다거나 한 건 아니고, 마탑에 들어가면서 한 비밀 유지 계약 때문에 구체적인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것 같았다.

    마법이 안 통하는 몸이라지만 직접 서명한 건 역시 거스를 수 없나 보구나.

    희미한 기억을 되짚어보면, 그건 ‘마탑에서 알게 된 것을 마탑 소속 외의 인물에게 발설하지 말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아마 몽블랑이나 키슈, 피오르 같은 사람들에게는 마탑 소속이니 편히 얘기할 수 있겠지만 아펠은 정식 마법사가 아니라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디몬이나 마탑의 지하와 관련된 일을 빼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거 말야.”

    “응.”

    “그때, 몽블랑 후작님이 같이 있었대. 그래서 난 계속 그 사람이 범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그걸 어떻게 믿어?”

    ‘그것만으로 범인이라고 확신했단 말이야?’ 하는 말이 더 어울릴 법한 상황이었다.

    아펠의 말은 한편으론 매정해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론 무조건적인 내 편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어찌 보면 그냥 순수한 의문인 것 같기도 했다.

    그 태도가 몽블랑에 대한 적의인지 황족으로서 습관화된 경계심인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

    나는 잠깐 그의 시선을 피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펠의 발치를 맴돌던 머랭은 어느새 내 의자 위에 올라가 몸을 둥글게 말고 웅크려 있었다.

    몽블랑을 어떻게 믿냐고?

    “운명을 봤으니까.”

    건조하게 말했다. 아펠을 마주 보지 않아도 곁눈으로 그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차근차근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굳이 마탑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지 않아도 내 이야기를 하는 건 쉬웠다.

    내가 나의 운명이 적힌 원작을, ‘신탁의 서’를 읽은 건 마탑에서가 아니라 전생에서였기 때문이었다.

    악역인 줄 알았던 몽블랑이 나를 왜 구해줬을까?

    그러면서도 엄마의 장례식 때는 왜 내 눈을 피했을까? 꼭 찔리는 데라도 있는 사람처럼.

    그 의문의 해답은 단순했다. 몽블랑의 말이 진실이고, 원작의 크레페는 오판을 하고 있었다 생각하면 모순점은 없었다.

    죽을 사람은 운명대로 죽게 두고, 대신 죽을 운명이 아닌 어린아이는 구한다.

    그게 몽블랑의 행동 원리였던 것이다.

    “아무튼, 그 운명이라는 것 때문에 착각했나 봐. 보이는 게 다가 아닌데.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으면서, 그걸 지금까지 몰랐던 내가 너무 바보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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