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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97)화 (97/181)
  • 97화 

    “아, 키슈. 저번에 나한테 권유한 거 아직 유효해? 논문에 내 이름도 올려주겠다고 한 거.”

    “응. 너도 많이 도와줬으니까. 근데 싫다며? 갑자기 왜, 마음 바뀌었어?”

    “으응… 그렇게 됐어. 부탁할게. 내 논문 쓸 시간이 안 될 것 같아서.”

    피오르가 머쓱하게 헛기침을 했다.

    “큼, 마법진 설계 필요한 일 생기면 또 도와줄 테니까.”

    “그래애.”

    “고, 고마워.”

    “어휴, 이랬다저랬다 하긴. 아무튼 내 아이는 너희처럼 멀대 같은 놈들로 안 키울 거야. 꼭 사랑스럽고 애교 많은…….”

    혼잣말인지 아닌지 모를 투덜거림이 이어졌다.

    말이 알을 낳는다는 논문에 이름 올리기 쪽팔리다는 말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기에 피오르는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일에 집중했다.

    그도 자신이 과제물에 이렇게 오랜 시간을 투자할 줄은 모르고 있었다.

    자수 놓는 게 생각보다 재미있더란 말이지.

    “…….”

    곧 주변이 조용해졌다.

    피오르는 적막한 공기가 어쩐지 부담스러워 괜히 안경을 고쳐 썼다.

    그때 높다란 책장 너머에서 키슈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오르, 이리 와봐.”

    “응?”

    갑작스런 부름을 들은 피오르가 책장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키슈가 얼빠진 사람 같은 얼굴로 피오르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발치에는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지하 계단이 나 있었다.

    피오르도 놀라긴 했지만 마탑에서 지낸 짬밥이 있었다.

    마탑의 도서관과 이어진 비밀 계단. 이건 분명 마법 서약을 하는 제단으로 내려가는 길일 것이다.

    그러나 표정을 보니 키슈는 아직 감을 못 잡은 모양이었다.

    피오르가 그녀에게 제 예상을 털어놓으려 입을 열었다.

    “이거 아마…….”

    “야! 내가 한 말이 진짜였나 봐. 인체 실험! 대박!”

    키슈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피오르의 양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 말을 들은 피오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가보자!”

    아니, 대체 왜?

    대체 왜, 굳이, 구태여 내려가 봐야 하는가.

    피오르는 몇 번이고 그 질문을 꺼내려다가 말았다. 이제 겁쟁이 취급받는 것도 신물이 날 지경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키슈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마탑에서 무, 무무무슨 인체 실험이야?”

    “인체 실험이든 산 제물이든 뭐든! 와, 설렌다, 설레!”

    키슈는 원래부터 오만 가지 것에 호들갑을 떨곤 했다.

    그녀의 발걸음에 불안이나 망설임 따위는 전혀 없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계단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두꺼운 문을 열었을 때, 피오르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봐. 그냥 제단이잖아. 소문으로 들었던 거랑 똑같이 생겼네. 지하에 있는 줄은 몰랐지만.”

    아까 전에 말을 더듬었던 건 잊어주기를 바라며, 피오르가 잘난 척 안경을 치켰다.

    하지만 키슈는 피오르를 돌아보지도 않고 공간 한가운데에 있는 제단으로 곧장 걸어갔다.

    “여기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됐으니까 올라가자. 함부로 건드렸다가 한 소리 듣기라도 하면…….”

    “푸핫!”

    키슈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피오르의 잔소리를 무시하고 제단 위에 있던 것을 들어 그에게 표지를 보였다.

    “이거 봐. 제목 웃긴다, 그치?”

    『어화둥둥 우리 아들』.

    말마따나 우스운 제목이긴 했다. 피오르가 킥 웃으며 다가왔다.

    “뭐야, 그게.”

    “몰라. 여기 있었어.”

    키슈가 가볍게 대꾸하며 책을 훑었다. 그리고 곧 그녀의 얼굴이 굳어갔다.

    피오르는 키슈의 그런 얼굴을 처음 보았다.

    뭔가 싶어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내용을 함께 보려는데, 키슈가 갑자기 탁 소리 나게 책을 덮었다.

    “왜?”

    “피오르, 너 마나 증폭진 암산 되지? 여기 띄워줘.”

    갑작스러운 부탁이긴 했지만 키슈의 태도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방금 전의 굳은 표정도 눈의 착각이었나 싶어, 피오르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키슈의 부탁대로 그녀가 가리킨 허공에 증폭진을 띄웠다.

    “땡큐.”

    키슈가 짧게 말하고 손가락을 들었다.

    “야, 자, 잠깐.”

    피오르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키슈의 마나 속성은 불꽃이었다. 위험해서 평소엔 거의 쓰지 않는 종류.

    그녀의 손가락 끝에 떠 있던 증폭진에 불이 번지며 곧 화염이 일었다.

    “에잇.”

    키슈가 짧은 기합을 외치며 들고 있던 책을 던졌다.

    “키슈! 위험하게……!”

    피오르의 나무라는 말은 제대로 끝나지 못했다.

    책이 불타는 대신, 그야말로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뭐야? 뭐 한 거야?”

    피오르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애꿎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별거 없네. 신이라도 소환될 줄 알았는데.”

    키슈가 손을 탁탁 털고 혼잣말을 했다.

    “뭐, 뭐였는데?”

    “내 예언서 같아서 불태웠어.”

    “뭐?!”

    뭐? 뭐? 뭐? 뭐?

    넓은 공간에 피오르의 외마디가 메아리쳤다.

    키슈는 그 메아리가 다 끝날 때까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 * *

    피오르가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자마자 몽블랑이 첫마디를 뗐다.

    “『어화둥둥 우리 아들』?”

    “그래, 제목이 웃긴 건 우리도 아는데…….”

    “그게 신탁의 서라는 건 어떻게 알아?”

    피오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몽블랑이 끼어들었다.

    피오르는 질문을 듣고 키슈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젯밤의 일이 별것도 아니라는 듯 평소처럼 자리에 앉아 논문에 필요한 연구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내 어릴 때 얘기랑 예지몽 내용이 적혀 있는 걸 봤거든. 자세히는 안 봤지만.”

    예지몽.

    그건 뛰어난 마법사의 재목에게만 나타난다고 알려진 현상이었다.

    피오르도 예지몽 같은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보통 꿈이 그렇듯 내용은 그리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내용의 구체성이나 상징성 등은 개인차가 있다고 하지만, 피오르는 내심 자신에게 예지몽 같은 능력이 없기를 바랐다.

    안 좋은 내용의 꿈이라도 꾸면 그 걱정을 평생 떨칠 수 없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와 별개로, 키슈도 예지몽을 꾼 적이 있다는 건 처음 듣는 말이었다.

    피오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사적으로 물었다.

    “무슨 꿈?”

    “나한테 아들 생기는 꿈! 그래서 몇 페이지 보자마자 이거 혹시 내 예언서인가? 했지.”

    키슈가 책을 탁탁 펼치더니 고개를 들고 싱긋 웃었다.

    “다행이지? 하마터면 제목으로 인생 스포일러당할 뻔했는데, 마침 아는 내용이었다는 게.”

    피오르는 그녀의 사고방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넋 나간 사람처럼 입을 벌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몽블랑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대단하네. 신탁의 서를 봤다는 건 너도 마법 서약을 할 만한 인재라는 뜻이잖아.”

    “서, 서약할 거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피오르가 물었다.

    서약이라니, 아직 정식 마법사도 아닌 연구생, 수련생이 하기엔 너무 이른 고민이었다.

    그가 알기로 이런 상황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키슈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신탁의 서를 태워버린 게 결격 사유만 아니라면?”

    그녀의 대답에 망설이는 기색은 한 치도 없었다.

    키슈는 책상에 쌓인 책을 두 팔 가득 끌어안고 흐뭇하게 웃으며 책 표지에 뺨을 문댔다.

    “으음, 역시 난 마법이 좋아. 신의 말씀이나 마법사의 명예 같은 데는 관심 없다구. 서약을 해서 읽는 눈을 얻으면 외국어도 읽을 수 있다며? 그럼 연구도 더 쉬워질 거 아냐.”

    “…너도 참 대단하다.”

    피오르가 작게 혼잣말했다.

    키슈가 아차 한 얼굴로 진지하게 타일렀다.

    “아무튼, 그러니까 어제 일은 비밀로 해줘. 내가 신탁의 서를 불태운 거 말야. 피오르, 너는 공범이니까 협조해 줄 거지?”

    부탁치고는 뻔뻔한 말투였다.

    피오르는 언짢은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어차피 아무도 안 믿을걸, 그런 미친 짓.”

    “몽블랑, 너는?”

    키슈가 답을 듣자마자 몽블랑을 올려다보았다. 피오르도 덩달아 몽블랑을 주시했다.

    그는 키슈의 대답 중에 걸리는 부분이라도 있었는지 눈을 내리깔고 한 손으로는 책상에 쌓인 키슈의 책을 만지작거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그의 하얀 머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피오르는 그것이 꼭 만년설 쌓인 눈밭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게. 대단하구나.”

    누구에게 말하는지 모를 중얼거림이었다.

    그 대답이 뭐라고, 피오르는 저도 모르게 긴장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몇 년이나 부대끼며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건만, 그는 아직도 가끔 몽블랑을 대하는 게 어려울 때가 있었다. 몽블랑의 태도가 권위주의적인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내 고개를 든 몽블랑이 그들을 보며 싱긋 웃었다. 날카로운 눈매의 청회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좋아. 비밀로 할게.”

    본인으로서도 그 이유는 알지 못하고 있었으나, 아무튼 피오르는 그의 미소를 본 후에야 긴장을 풀고 긴 숨을 내쉬었다.

    “하아, 역시 난 서약 못 하겠다. 무서워서.”

    “…….”

    “…….”

    세 명뿐이던 연구실에 갑작스러운 적막이 찾아왔다.

    피오르가 뒷머리를 마구 흩뜨리다 말고 키슈와 몽블랑을 번갈아 보았다.

    “뭐야. 왜?”

    “무섭다고?”

    “인정한 거야?”

    몽블랑과 키슈가 연달아 물었다.

    피오르가 뒤늦게 제 말실수를 깨닫고 입을 닫았다.

    그러자 키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실해 놓은 연구실 문을 열고 그녀가 복도를 향해 외쳤다.

    “피오르는 겁쟁이래요오!”

    “야, 너 지금 나이가 몇인데 유치하게……!”

    * * *

    몽블랑이 피식피식 웃으며 마탑의 계단을 올랐다.

    기숙사용 탑의 4층에 있는 1인실. 연구생은 좀처럼 얻기 힘든 지상층 독방이었다.

    ‘어화둥둥 우리 아들?’

    아까 들은 제목을 떠올리자 거듭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는 익숙하게 문 위에 손을 올렸다. 마법진이 작동해 저절로 문이 열렸다.

    책상 하나와 옷장 하나, 그리고 침대 하나.

    지내던 저택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단출한 살림살이들이었으나, 그가 이곳에서 지내기 시작한 것도 몇 년째였다.

    새삼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몽블랑은 품에 끼고 있던 성전을 책상에 놓고 한쪽에 세워 정리한 책들을 쳐다보았다.

    딱 한 권이 들어갈 넓이의 구멍이 나 있었다.

    - 하지만 대단하네. 신탁의 서를 봤다는 건 너도 마법 서약을 할 만한 인재라는 뜻이잖아.

    문득 자신이 아까 저지른 말실수가 뇌리를 스쳤다.

    피오르 덕분에 아무것도 아닌 듯 지나가긴 했으나 여차하면 들킬 수도 있었다.

    ‘너도’라는 말에 숨어 있던 뉘앙스를 말이다.

    몽블랑이 책 사이의 빈 공간을 보다 말고 방금 내려놓은 성전의 맨 뒷장을 펼쳤다.

    거기에는 마구잡이로 휘갈겨 쓴 필체로 마탑의 폐쇄, 황비의 서거 등 몇 가지 사건이 적혀 있었다.

    모두 몽블랑이 직접 기록한 것들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자신의 ‘신탁의 서’ 내용을 잊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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