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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96)화 (96/181)

96화 

【 외전 - 마탑 수련생 피오르 】

“야, 우리 기숙사 복도 너무 음산하지 않냐?”

“또 그 소리야?”

몽블랑이 가볍게 핀잔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의 자리는 피오르의 바로 뒤였다.

피오르는 제게 맞장구쳐 줄 생각이 없는 몽블랑을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한 번도 쫀 적 없다고?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박혀 있다가 혼자 기숙사 지하 방으로 돌아올 때도? 귀신이라도 나오면?”

“마법사는 성직자야.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무서워할 이유는 없어.”

“딱히 무섭다고는 안 했는데.”

하여간 앞뒤 꽉 막힌 녀석.

피오르는 그렇게 덧붙이려다 말았다.

지금은 마탑 동기로서 여차저차 반말하며 맞먹고 있는 상황이긴 했지만, 사실 몽블랑은 슈트루델 신성 제국의 지엄하신 후작님의 뒤를 이을 미래의 대귀족이었으니까.

피오르는 그 사실을 되새기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스물이 넘은 장성한 청년이 돼서 계속 귀신이나 유령 얘기 따위를 하고 있기에도 쪽팔렸다.

몽블랑은 이미 이 화제에서 관심이 식은 듯 들고 온 책을 펼쳤다.

“뭐야, 내일모레 시험인데 공부 안 해?”

“마법사가 신을 공부하는 게 공부지.”

몽블랑이 딱 잘라 말하고 성전을 읽기 시작했다.

더 이상 말 걸지 말라는 분위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아 피오르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내 코가 석 잔데. 몽블랑이 공부 안 하면 라이벌 한 명 줄어서 좋은 거고.

피오르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다시 칠판을 향해 앉았다.

슬슬 주변의 수련생들에게서도 따가운 눈총이 느껴지기 시작했으니 집중하기엔 좋은 타이밍이었다.

공부하기 싫어서 잠시 딴짓을 했을 뿐, 낼모레 시험인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피오르는 그제야 공부를 다짐하고 아침부터 도서관에 들러 대출해 온 책을 쌓아놓았다.

그러나 그 다짐이 자괴감으로 변하는 건 금방이었다.

『마법진의 구성 원리와 공식의 관계 1』

『마력 섬유에 자수 놓기 꿀팁 모음』

『자수 놓는 법―중급자용』

『DIY: 손수건 리폼하기』

마법 책보다 자수 놓기 책이 더 많다니.

피오르가 새삼 그 사실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법진을 이해하고 만드는 데에 적성이 있었다. 그러나 마력의 성질이나 양 자체는 그리 특출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다른 사람들만큼 마법을 쓰려면 마법진이 필수였다.

진로도 마법 물품을 만드는 쪽으로 잡는 게 그에게 맞는 길이었다.

알고는 있지만, 내가 자수 배우러 마탑에 들어온 건 아닌데 말이야.

피오르는 결국 한숨만 푹푹 내쉬며 책에 손을 뻗었다.

일단 시험을 보고, 손수건이라도 만들어서 과제물을 제출하고 나면 연말 논문을 작성할 차례였다. 노닥거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집중력은 다시 흐트러졌다. 쾅 소리와 함께 큰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페가수스 논문 나랑 같이 쓸 사라아암!”

시끌벅적하게 키슈가 등장했다. 피오르가 반사적으로 그쪽을 쳐다보았다.

새빨간 눈동자를 빛내던 키슈가 피오르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그의 책상을 내리쳤다.

“관심 있어?”

“페가수스에?”

“그래! 멸종했다고 알려진 신수, 전설의 동물! 어때, 관심이 막 생기지?”

“무슨…….”

워낙 뜬금없는 주제였기에 되풀이한 것뿐이었지만, 키슈는 연신 눈을 반짝이며 피오르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피오르가 차마 딱 잘라 말하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자, 그 사이를 비집고 다른 수련생의 항의가 들어왔다.

“아무튼 번갈아서 시끄럽게. 너넨 시험 안 봅니까?”

“아유, 선배님! 물론 시험도 중요하지만 더더욱 중요한 건 논문과 과제 아닙니까! 평가에 따라 우리 출셋길이 바뀔지도 모르는데.”

키슈가 능청을 떨며 피오르의 대각선 뒤에 떨어진 수련생에게 다가갔다.

“듣자 하니 선배님 집안이 한가락 하신다면서요? 혹시 저희 연구에 자금을 좀 보태주시면…….”

“얼씨구?”

키슈가 알랑거리며 그를 추켜세웠다. 그도 딱히 키슈의 말이 불쾌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선배라고는 해도 삼촌뻘에 가까운 나이 차였다.

아직 이십 대인 키슈와 피오르, 몽블랑은 마탑의 인원들 중 제일 어린 축에 속했고, 그만큼 마법사로서의 미래도 밝았다.

친해져서 안 좋을 상대가 아니었기에 그도 자연히 경계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

“크흠, 정확히 무슨 논문인데?”

결국 그가 못 이기는 척 물었다.

키슈는 기다리던 질문을 들었다는 듯 어깨를 펴고 당당히 대답했다.

“페가수스는 사실 알에서 태어난다고요!”

“…….”

순간 자습실이 적막에 휩싸였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키슈와 피오르의 등을 떠밀어 쫓아냈다.

“…나가서 놀아라, 꼬맹이들아.”

그러고서 문이 닫혔다.

피오르가 닫힌 문을 향해 뒤늦게 외쳤다.

“아, 아니, 나는 왜?!”

* * *

“아무튼 다들 머리가 꽉꽉 막혔다니까?”

“…….”

키슈는 아직도 흥칫뿡 콧방귀를 뀌고 있었다.

피오르는 일단 그녀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겠다 싶어서 도서관 옆에 있는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아무튼 선배고 스승이고 할 것 없이 막나가는 저 성격 때문에 분명 손해 볼 날이 있을 거다.

피오르는 그녀를 보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너라면 믿겠냐? 말이 알에서 태어난다는데.”

“말이 아니라 페가수스!”

키슈가 곧바로 정정했지만 피오르는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인지 알 수가 없었다.

페가수스가 문헌에 나타난 것도 한참 전 일이고, 이제 와서는 그 신수가 실존하는지 아닌지도 논쟁거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알에서 어쩌고 하는 가설을 논문 주제로 삼는다니.

“피오르, 너는 도와줄 거지?”

“평생 놀림당할 일 있냐?”

“말 너무 심한 거 아니야?”

키슈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피오르도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말해 버린 스스로를 뒤늦게 깨닫고 머쓱하게 안경을 고쳐 썼다.

“뭐, 네 전적이 여간 화려해야지. 선생님 몰래 실험하다가 연구실을 폭파시켜 버리질 않나, 마법 서약을 한 사람을 상대로 근거 없는 스캔들을 퍼뜨리질 않나, 기숙사 복도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도…….”

“그땐 참 재밌었지.”

뻔뻔한 말을 들은 피오르가 질린 표정을 했다.

곧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뭐, 몽블랑이라도 꼬셔보든가.”

“좋아.”

그 대답을 한 건 키슈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은 피오르와 키슈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휴게실에 찾아온 몽블랑이 태연히 걸어 그들 옆에 섰다.

“내가 지원할게.”

“무슨 소리야? 연구비를 대주겠다고? 이 정신 나간 가설에? 돈 많아?”

피오르가 뒤늦게 당황해 물었다.

“어머, 피오르! 슈트루델 제국의 후작님이 되실 분께 그 무슨 무례한 말버릇이니?”

키슈가 통 안 어울리는 말투로 얘기하며 피오르의 팔을 잡아당겼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 몽블랑이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목소리를 낮췄다.

“대신 조건이 있어. 피오르, 너한테도. 뭐, 네겐 부탁이 되겠지만.”

“음?”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피오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키슈는 그 조건이 뭐든 무조건 받아들이겠다며 병아리처럼 보챘다.

그리고 얼마 후, 피오르는 그들을 따라 논문의 공저자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 * *

돌로 만들어진 벽과 바닥, 창문 하나 없는 마탑의 복도는 어딘가 을씨년스러웠다.

피오르는 문득 목덜미가 오싹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키슈에게서 마탑의 지하에 인체 실험 연구소가 어쩌고 하는 괴담을 들은 뒤로, 피오르는 이런 한밤중에 어두운 복도를 지나다니는 게 영 꺼림칙했다.

물론 지금은 본인에게서 지어낸 이야기였다는 확답을 들은 후였지만, 아무튼 으스스한 건 으스스한 거니까.

“아, 아무튼 스승님은 왜 이 시간에 도서관 정리를 시키는 거야?”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직종인데 어쩌겠어.”

키슈가 끙 소리를 내며 두 팔 가득 쌓아둔 책들을 턱으로 눌렀다.

피오르도 양팔이 무겁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더 불평하는 대신 발걸음을 재촉해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문 앞에 섰다.

어두운 곳에서 보니 한층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문이었다.

문을 열 생각도 않고 멈춰 선 그에게 키슈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 무서워서?”

“아니! 넌 왜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그러는 거야?”

피오르가 무릎을 들어 허벅지와 벽으로 책 더미가 무너지지 않게 버티고, 문에 손을 대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열었다.

키슈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들어가 책상 위에 더미를 올렸다.

피오르도 그 옆에 책들을 내려놓았다.

“휴, 빨리하고 가자.”

키슈가 이마의 땀이 다 마르기도 전에 팔을 걷어붙였다.

피오르는 책 더미를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정말일까? 인생 서고 얘기.”

“그건 내가 지어낸 거 아니다아?”

키슈가 얄밉게 말꼬리를 늘이며 책 정리를 시작했다.

피오르는 그 말이 꼭 자신을 순진한 겁쟁이라 여기는 것처럼 들려 잠시 눈을 흘기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믿기 힘들잖아. 사람한테 다 정해진 운명이 있다니. 그럼 우리가 우리 의지대로 결정하고 바꿀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야?”

“개똥철학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너도 정리나 하셔.”

아무래도 키슈는 이 화제에 진지하게 답변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피오르는 대답을 요구하는 대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이런 대화로 답이 구해질 만한 일도 아니었고.

하지만 몽블랑은 나 같은 고민을 했을지도 모르겠구나.

피오르도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서가를 정리했다.

몽블랑이 키슈에게 내걸었던 조건은, 전설로 내려오는 인생 서고와 개인의 운명이 적힌 신탁의 서(소예언서라고도 불리는), 그리고 고위 마법사가 되기 위한 서약에 대해 가능한 많은 정보를 알아다 달라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는 마법을 배우기 위해 교단에 몸담는 일이 대다수였으나, 그와 달리 몽블랑은 처음부터 독실한 교인이었다.

피오르나 키슈는 어렴풋이 몽블랑이 마법 서약에 대해 관심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기에, 별 놀라움 없이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근데 한 나라의 후작이 후사를 안 봐도 되나?”

“양자를 들이려나 보지.”

키슈의 혼잣말 같은 질문에 피오르가 대꾸했다.

키슈도 가볍게 ‘뭐, 그렇겠네.’ 하고 정리를 계속했다.

피오르는 몽블랑이 왜 직접 정보를 찾지 않는지 대충 감이 왔다.

고위 귀족의 후계자인 자신을 어려워하는 마법사들이 많아서일 것이었다.

피오르와 키슈, 몽블랑은 마탑의 막내 라인으로 선배나 스승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곤 했고, 그러면서 마탑의 이런저런 소문을 듣는 일도 많았지만 간 크게 몽블랑을 부려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처럼 말이지.

피오르는 몽블랑을 쏙 빼고 자신과 키슈에게만 잡일을 떠맡긴 선배들을 떠올리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아무튼 빽 없는 사람은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다니까.”

“어허, 우리 예비 후작님 욕하는 거 아냐. 덕분에 논문도 잘 진행되고 있다고~”

키슈가 장난스럽게 대꾸하고는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딱히 몽블랑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오히려 키슈가 더 얄미웠다), 피오르는 언짢은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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