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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95)화 (95/181)
  • 95화 

    나를 헐뜯는 말을 했던 여자도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부채를 펴 얼굴을 가렸다. 검은 바탕에 붉은 이파리, 흰 장미가 수놓아진 것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펠의 옷자락을 당겼다.

    “아펠? 화난 거 아니지?”

    “응?”

    아펠이 다시 날 쳐다보았다.

    그는 방금 전의 표정이 내 눈의 착각이라도 된 듯 미소 짓고 있었다.

    그래, 별일 없겠지.

    나도 그를 향해 마주 웃었다. 어차피 아펠이 이렇게까지 살벌하게 대응한 이상, 이제 내게 시비를 걸 만한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난 따로 인사하고 올게.”

    오늘도 아펠은 다른 귀족들의 끝없는 인사를 듣고 있어야 했다.

    아직 정식으로 약혼한 관계도 아니니만큼 나는 먼저 아펠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피했다.

    “응, 알았어.”

    아펠이 그렇게 대답하며 자상한 손길로 살짝 내 손을 스쳤다.

    그의 의젓한 태도가 초조해 보이던 어제의 모습과 겹쳐 조금 짠한 기분이 들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을 담아 나도 그의 단단한 손등을 토닥여준 후에 걸음을 옮겼다.

    “후작님? 오랜만이네요.”

    내가 향한 곳은 몽블랑 후작의 앞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잠시 긴장한 듯하던 몽블랑은 내 인사를 듣자마자 작게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크레페 님.”

    지하에서 마주친 게 바로 어제였지만 그건 우리만의 비밀이었으니까.

    나는 그와 가볍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사실 아펠을 따라온 이유 중에는 몽블랑을 보기 위한 것도 있었다.

    어제 깜빡하고 물어보지 못했던 게 있었기 때문이다. 파타슈에게서 부탁받은, 브라우니에 대한 질문 말이다.

    나는 가볍게 손을 말아 입가의 웃음을 가리고 말했다.

    “저 브라우니 굽는 법에 대해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크흠. 나가서 얘기하실까요?”

    혹시 모를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나는 그를 별궁까지 안내했다.

    어제 열심히 싸돌아다녔던 덕분인가, 내 집은 아니지만 내 집처럼 돌아다니는 게 한층 편해진 기분이었다.

    아무튼 나는 파타슈에게서 들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지금쯤 브라우니 혼자서도 거대화가 가능해야 할 텐데 왜 안 되는지 모르겠다고.

    물론 그 해법이 곧바로 나올 거라는 생각은 안 하고 있었으나, 몽블랑은 짚이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트라우마가 생긴 게 아닐까요?”

    “트라우마요?”

    “예전에 루아 요새에서 위험한 일이 있었잖습니까.”

    몽블랑이 잠깐 헛기침을 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긴 했다지만 내가 죽을 뻔했던 경험을 입 밖에 내는 게 여전히 조심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때 브라우니도 처음 거대화를 했죠. 몬스터와 싸우다 부상을 입었고요. 아마 그 기억 때문에 혼자 거대화하는 데 겁을 먹은 것 같군요.”

    “아…….”

    거의 잊고 있던 일을 들으니 멋쩍기 그지없었다.

    진작 내 쪽에서 브라우니를 더 신경 써줬어야 했나 반성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것도 그냥 추측일 뿐이지만요. 보통의 동물보다 지능이 높은 것 같으니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요. 우리 브라우니는 착하고 똑똑하니까요.”

    진지하게 맞장구를 치자 몽블랑이 픽 웃었다.

    “동물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그야 귀여운 건 진리잖아요. 브라우니도 그렇고 머랭도… 아, 그러고 보니 머랭은 어떻게 아세요?”

    “태자 전하께 명을 받아 건강을 몇 번 살핀 적이 있어서요.”

    건강?

    귀가 솔깃해지는 말이었다.

    몽블랑이 제 영지를 비우는 일은 거의 없다고 했으니, 이 기회에 머랭의 건강도 한번 봐달라고 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제가 머랭을 데려와도 될까요?”

    “편하실 대로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나는 화색을 띠고 몽블랑을 야외 테이블 쪽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아, 여기 있는 건 쉬제트 백작령과 관련된 서류들인데, 심심하면 봐주셔도 되고요.”

    “제가 봐도 괜찮다면요.”

    몽블랑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자리를 비웠다.

    최근 머랭의 행보를 보면 마치 내 전용의 애완 강아지 같았지만, 언급했듯 녀석은 아펠이 맡아 부리는 신수였다.

    그래서 내가 오기 전까지 녀석의 아지트는 아펠이 지내는 본궁이나 황실 기사단의 훈련장이었다고 한다.

    아마 이번에도 거기 있겠지?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기사 훈련장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근처까지 가서 크바스를 불러 물어볼 생각이었다.

    “음, 맛있는 냄새!”

    순간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분명 설탕과 버터를 쏟아부어야 만들 수 있는 향기였다.

    아무래도 연회를 맞아 기사 훈련장에도 간식거리가 비치된 모양이었다.

    훈련장이 가까워질수록 코를 간질이는 단내도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의 디저트를 아직 못 먹었네.

    나는 홀린 듯이 그 냄새를 따라갔다.

    그리고 코너를 돌기 직전, 아펠의 목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멈췄다.

    “페디엇 백작가?”

    분명 아펠이 맞았다.

    연회장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 나왔지?

    나는 반사적으로 벽에 등을 기대고 모습을 숨겼다. 아펠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게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낯선 기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예.”

    “내일까지 페디엇 백작을 호출해. 자식 교육을 잘못한 값을 치러야지.”

    그때 흰둥이… 아니, 머랭이 꼬리를 치며 다가왔다.

    “왕!”

    “쉬, 쉬잇……!”

    “크레페?”

    아펠이 뒤늦게 나를 발견했다.

    더 이상 숨어봤자 의미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코너를 돌아 그들 앞에 섰다.

    “여긴 웬일이야?”

    아펠이 밝게 물었다.

    역시나 방금 전의 모습은 내 착각이었다는 듯 천진한 얼굴이었다.

    “머랭이랑 잠깐 놀려고… 아니, 그런 것보다 아펠, 괜히 사람들 겁주고 그러지 마.”

    일단 할 말은 해야겠다.

    원작에 나오는 폭군 아펠과 다른 사람이 되도록 그를 붙잡아주는 게 내 역할이었다.

    카눌레의 전례도 있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었다.

    내가 나름 진중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자 아펠이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너는 신경 안 써도 돼.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런 말이 어딨어! 페디엇 백작이라는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데?”

    “…….”

    아펠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나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도 내가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듯 이내 입을 열었다.

    “널 안 좋게 말했어.”

    겨우?

    순간 김이 샌 기분도 들었지만 나는 곧 고개를 털고 정신을 바로잡았다.

    아펠이 순화시켜서 말한 것일 뿐, 그 안 좋은 말이라는 건 분명 정도를 넘는 발언일 게 분명했다.

    이를테면 내가 정식으로 아펠과 약혼하기 전에 날 암살하려 모의했다거나 하는 경우 말이다.

    그런 위협은 원작의 크레페가 숱하게 겪은 일이기도 했기에, 여기부터는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몰래 마른침을 삼키고 짐짓 담담한 척 말했다.

    “나는 괜찮아. 어차피 시간 지나면 다 조용해질 거 아냐. 그러니까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자. 응?”

    내가 어린아이에게 하듯 타이르자 아펠이 픽 웃었다.

    그도 자신이 애 취급받고 있다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정말이야. 넌 걱정 안 해도 돼.”

    아펠이 부드럽게 말하며 바닥에서 머랭을 들어 내게 안겨주었다. 따끈하고 폭신한 털의 감촉이 내 팔을 감쌌다.

    그리고 머랭을 안느라 양손이 묶인 내게 아펠은 옆에 쌓여 있던 슈크림을 한 알 집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내가 귀여운 거랑 단거에 약하다는 걸 알고 하는 행동이 분명했다.

    흥,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 이해해 줄 것 같나?

    …하지만 이것들에겐 죄가 없으니까.

    나는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리고 슈를 우물거렸다.

    맛있다. 귀여워. 부드럽다. 달달해.

    진득한 커스터드를 잔뜩 채운 에이미의 슈크림과 달리 황궁의 슈크림에는 휘핑크림이 들어 있었다.

    은은한 초코 향도 그렇고, 평소 먹던 것보다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이런 슈크림이라면 앉은 자리에서 몇 개든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러 겹이지만 가볍게 바스러지는 얇은 페스추리에 부드럽고 담백한 크림으로 속을 꽉 채운 슈.

    누군가 내게 에이미의 커스터드 슈와 황궁의 크림 슈와 몽블랑의 마론 슈 중에 제일 맛있는 걸 하나 선택하라고 한다면…….

    으으, 못 정하겠어!

    “그렇게 맛있어?”

    아펠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는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리고 입안에 남은 슈를 꿀꺽 삼켰다.

    “아, 아무튼 나 너무 걱정시키지 마! 내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응.”

    아펠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시 슈크림을 내 입가에 댔다.

    나는 목을 빼고 그것을 한입에 넣은 채 마지막 경고를 했다.

    “음, 으음음!”

    “하하, 알았어.”

    말부터 하고 먹을 걸 그랬나.

    진짜 알아들었는지는 미지수였지만, 나는 괜히 민망해지는 기분을 뒤로하고 머랭을 둥개둥개 달래며 돌아갔다.

    “건강 검진 받는 거야, 건강 검진!”

    머랭이 눈을 댕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놀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귀엽구나.

    나는 별궁으로 돌아가다 말고 머랭의 머리에 입맞춤을 해댔다. 그리고 풀떼기가 입에 들어가 퉤퉤거렸다.

    끄응, 아무도 본 사람 없겠지?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아무튼 기분은 좋았다.

    나는 머랭에게 괜히 말을 걸며 보드라운 털을 마구 매만졌다.

    “아무튼 나도 이제 내 인생을 살아야지. 잘 정리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말야.”

    그 말대로였다. 갈레트는 살아 있고 몽블랑과는 화해했다.

    아펠과의 일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원작과 똑같이 파혼으로 끝을 맺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펠은 날 좋아하니까.

    “헤헷, 헤헤헷…….”

    나는 머랭의 털 사이에 뺨을 묻고 웃음이 새어 나오는 얼굴을 가렸다.

    적어도 아펠이 날 좋아하는 마음 자체는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원작과 다르게 말이다.

    이만하면 원작의 그림자에서는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있겠지.

    과거야 어찌 됐든 지금부터는 새로운 크레페, 새로운 나의 인생이었다.

    그걸 인정하자 삶의 진리라도 깨달은 듯 마음이 개운해졌다.

    20년간 나를 괴롭히던 불안을 덜어낸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분명 괜찮을…….

    아, 원작.

    문득 야외 정자에 남겨두고 온 몽블랑이 떠올랐다.

    아침에 내 서류를 몽땅 쌓아뒀었으니 분명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의 줄거리를 적어둔 내 인생 공략집도 그 사이에 끼어 있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마법 서약을 하면 한글을 읽을 수 있다고 했잖아!

    희미해져 있던 기억에서 그 정보를 떠올리고 나는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물론 읽을 수 있다고 해봤자 현실과는 닮은 게 거의 없는 내용이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나 혼자 사춘기 감성에 젖어 쓴 소설 정도로 여길지도 몰랐다.

    그리고 한편으론 그게 더 부끄러웠다.

    스무 살이나 먹고 나를 주인공으로 한 중2병 소설을 썼다는 오해를 받긴 싫어!

    그러나 별궁에 도착했을 때, 몽블랑은 이미 내 인생 공략집을 펼치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어릴 때 쓰던 낙서장…….”

    나는 머랭을 내려놓고 후다닥 달려가 그의 손에서 내 공책을 빼앗았다.

    그러나 몽블랑은 내 변명을 제대로 들은 것 같지 않았다.

    몽블랑이 굳은 표정으로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

    “크레페 님이 이 미래를 어떻게 알고 있었습니까?”

    지금부터는 새로운 크레페, 새로운 나의 인생,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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