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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94)화 (94/181)

94화 

“앗!”

그 순간 머랭이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흔들며 눈앞을 지나갔다.

내가 후다닥 쫓아가 녀석을 품에 안았다.

머랭은 앙큼하게도 왜 자신을 붙잡는 거냐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으휴, 내가 못 살아.”

나는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하고 가볍게 머랭의 콧등을 손가락으로 톡 쳤다.

그러고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마탑이 폐쇄된 것도 벌써 몇 년이나 전 얘기였다.

그 사실을 증명이나 하듯 책장 사이사이에는 먼지가 껴 있었고 조금이지만 퀴퀴한 냄새도 났다.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도서관을 나가자 야트막한 화단과 그 너머의 숲, 그리고 황궁 쪽에서 반짝이고 있는 불빛이 보였다.

딱 이쯤에서 아펠이랑 눈을 퍼먹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우습기 그지없는 추억들이었다.

졸업한 초등학교에 다시 찾아오면 이런 느낌일까?

어릴 때는 마냥 웅장하고 신비롭고 화려해 보였던 곳이었지만 오랜만에 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감상에 젖어 마탑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여기는 피오르 선생님의 연구실, 여기는 키슈 님의 연구실…….

“…….”

적막한 공기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압박감 따위는 없었다.

고즈넉한 밤공기에 묻어 있는 쌀쌀한 바람을 느끼고 나서야 나는 하늘에 뜬 달을 발견했다.

이런, 너무 늦었네.

어쩌면 아펠이 벌써 연회에서 돌아와 있을지도 몰랐다.

서둘러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온 나는 구석의 바닥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하의 제단으로 이어지는 계단이었다.

물론 나는 그곳에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머랭은 다른 모양이었다.

내 품에 안겨 있던 머랭이 갑자기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지하로 내려가자는 듯 계단 앞에 서서 짧게 짖었다.

“끼웅!”

“설마…….”

디몬이 날 부르는 건가?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머랭을 따라 발을 옮겼다.

이윽고 아래에 도착해 굳게 닫힌 문을 열자, 지금까지의 어둠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환한 빛과 지하 같지 않은 높고 넓은 공간이 나왔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곳이었다.

웅장하고 거대한 기둥과 동굴 한가운데 위치해 있는 화려한 제단.

그러나 내 생각과 달리 거기에 있는 것은 디몬이 아니었다.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섰다.

“킁!”

지하의 서늘한 기운 때문인지 머랭은 코로 기침을 하고 가벼운 걸음으로 공간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제단까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단 앞에 선 사람의 발치까지 다가갔다.

오랜만의 만남이었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에게는 다른 이와 구별되는 특징이 있었고, 외모도 전과 거의 달라진 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겨울처럼 냉랭한 분위기와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

몽블랑 몬테 비안코 후작이었다.

“이곳에는 어떻게…….”

몽블랑 후작도 나 못지않게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이곳에는 어떻게’라는 그 말은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것이었지만, 그를 보는 게 워낙 오랜만이었기에 나도 어색하게 말했다.

“오… 오랜만이에요.”

잠시 침묵하던 그가 조용히 말문을 뗐다.

“황궁에 머물고 계신 겁니까?”

“알고 계셨어요?”

“…머랭을 데리고 오셨잖습니까.”

몽블랑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뭐라고도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빠보다도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어쩌면 마법사라는 점에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십여 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몽블랑의 모습은 오히려 그를 낯설게 만들었다.

아니, 정말 그대로인가?

나는 그렇게 자문하며 몽블랑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가 제단에 손을 올리고 말을 이었다.

“이곳은 마법사들이 서약을 하는 곳입니다. 이건 신탁의 서를 받을 수 있다고 알려진 제단이고요. 애초 마탑이 이곳에 세워진 이유이기도 하죠.”

“그럼 후작님께선 폐쇄된 마탑에 계셨던 건가요? 출입 금지였을 텐데.”

“…….”

그러자 몽블랑이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몽블랑의 서투른 면모라니.

나는 참지 못하고 픽 웃었다.

- 저는 브라우니에 대해 논문을 쓴 적도 있는데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브라우니는… 음, 제가 잘 구워드리겠습니다.

“여전히 거짓말에 서투르시네요.”

시간이 많이 지난 후인데도 그 말을 떠올리면 아직도 헛웃음이 날 정도였다.

나는 무릎을 굽히고 두 손을 내밀었다. 몽블랑 발치에 있던 머랭이 내게 돌아왔다.

나는 녀석을 품에 안고 다시 똑바로 섰다.

“그간 잘 지내셨나요?”

그를 더 추궁하는 대신 안부를 묻자, 몽블랑은 그 질문이 퍽 의외였던 듯 대답했다.

“크레페 님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군요.”

그가 제단을 손끝으로 쓸며 걸었다. 넓고 고요한 공간에 그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몽블랑은 커다란 문 앞에서 멈췄다. 내가 디몬을 만났던 곳과 연결되는 문이었다.

몽블랑은 그 문에 새겨진 그림을 감상하려는 듯 나를 등지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거대한 문 앞에 선 그의 등은 내 기억보다 작아 보였고, 나는 문득 그의 등에 아직 흉터가 아직 남아 있을까 궁금해졌다.

“저도 이곳에서 마법 서약을 했습니다. 내일 연회에 참석하러 왔다가 조금 빨리 시간이 나서 한번 들러보았지요.”

길게 대답한 몽블랑이 이내 몸을 돌려 나를 향해 섰다.

“그간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별일 없었겠지요?”

나는 그 질문이 조금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원래는 진작 끊어졌어야 할 인연이었다. 적어도 그가 내게 죄송하다고 말할 이유는 없었다.

몽블랑은 매년 내 생일을 챙겨주었고 큰오빠의 후견인을 맡아주었으며 장례 수속도 앞장서 준 데다 내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다.

오히려 내가 먼저 그를 찾아가 감사 인사를 해야 했던 입장이었다.

하지만 내 희미한 적대감을 느끼면서도 그는 나를 탓하는 말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살짝 웃었다.

원작의 열다섯 크레페와 지금의 나는 많은 것이 달랐다. 그래도 내가 마음을 놓지 못한 이유는, 원래 일어나야 할 일들이 지나치게 비참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잘 지냈어요, 몽블랑 님 덕분에.”

원작과 달라진 수많은 이야기들. 어쩌면 나도 그 피해망상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된 건지도 몰랐다.

“마론 슈, 잘 먹었어요.”

내가 미소 짓고 말했다.

오늘 있었던 일은 비밀에 부치자 약속하고 몽블랑과 헤어진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아무래도 머랭은 내가 몽블랑 이야기를 꺼내자 날 도와주려는 생각으로 이곳까지 안내해 준 것 같았다.

으이그, 이 녀석한테 뭐라 할 수도 없고.

나는 꾸짖는 대신 녀석의 정수리에 뺨만 몇 번 문대다 말았다.

이왕이면 걱정 사지 않게 아펠보다 빨리 가 있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내가 우물가에 들러 머랭의 발을 닦고 궁으로 들어가려는데, 아펠이 내 방 대신 별궁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크레페!”

“아, 아펠?”

언제부터 기다린 걸까, 하는 걱정 어린 궁금증이 들었지만, 그걸 묻기도 전에 아펠은 나를 꽉 껴안았다.

겨울의 들꽃처럼 옅은 향기가 끼쳤다.

“…….”

전쟁터에 다녀온 사람을 대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아펠은 한참 동안 나를 놓지 않았다.

머랭은 답답했는지 내 품에서 뛰어내렸고, 나는 어색하게 손을 들고 아펠의 등을 토닥였다.

그제야 조금 진정한 듯 아펠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라진 줄 알았어.”

그것은 마치 악몽을 꾼 어린아이가 하는 말과 비슷해서, 검술도 마법도 수준급이라는 아펠에게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 아펠을 마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불안에 젖어있었다.

나는 일찍이 이렇게 불안해하는 아펠을 본 적이 있었다.

마탑에서, 내게 강아지, 아니 머랭을 맡긴 날에.

그날을 떠올리자 어쩐지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옆에 있어달라고 했고, 옆에 있어주겠다고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 그런 걱정 하는 건 너밖에 없어. 당연하지. 너 말고 대체 누가, 누가 날 챙겨주겠어?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아마 나를 이렇게 걱정하는 것도 아펠뿐일 것이다.

이런 애를 조심하라니.

파혼이라는 운명 때문에 그를 밀어내고 있던 건 내 쪽이었다. 지금의 행복을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언제나 그렇듯 상상만큼 크진 않았다.

나는 가만히 그의 뺨을 감쌌다.

내가 먼저 그에게 손을 뻗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인지 아펠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크레페?”

대답 대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짧지만 간지럽고 부드러운 감촉이 스쳤다.

그러고서 나는 아무 일도 없던 척 웃었다.

“저녁 먹으러 갈까?”

* * *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빨리 일어나서 서류 처리를 했다.

야외 테이블에서 도톰한 숄을 어깨에 두르고 따뜻한 차와 스콘으로 허기를 달래가며 일하는 것이 어쩐지 안락하게 느껴졌다.

“준비 시작해도 될까요?”

마침 오늘 치 일을 마무리하려던 찰나 시녀가 말을 걸었다.

“아, 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 준비를 했다.

외출 준비라기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회에 참석할 준비를.

“아, 이만하면 될 것 같아요.”

내 말을 들은 시녀가 치장을 마무리했다.

나는 감사 인사를 건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별궁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나를 찾아온 아펠이 환히 웃었다.

“벌써 준비 끝냈구나. 내가 너무 빨리 온 걸까 봐 걱정했는데.”

“한참 전에 일어났지롱.”

괜히 장난스러운 인사를 하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아펠이 왈츠 상대라도 된 듯 내 한쪽 손을 잡고 내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곤 부드럽게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나를 향해 살짝 치켜뜬 눈에는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나는 다른 손으로 치맛자락을 들어 인사하며 대꾸했다.

“별말씀을요.”

그러자 아펠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와 팔짱을 끼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테이블에 아직 서류가 남아 있었지만…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이따 정리하지, 뭐.

“와줘서 고마워.”

나와 동반 입장을 마친 아펠이 만면 가득한 미소를 띠고 속삭였다.

이유는 충분히 알 만했다. 내가 공식 석상에서 아펠과 함께 자리한다는 건, 교제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고맙긴.”

짧게 대답하자마자 아펠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청량한 향기와 함께 이마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뭐, 뭐 하는 거야, 이런 데서.”

내가 손을 들어 멋쩍게 앞머리를 정리했다.

그때 처음 듣는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세상에, 며칠 전까지만 해도 커스터드 자작가의 크렘 님을 파트너로 삼고 있었다면서요. 어쩜 태자 전하께서 관심을 보이자마자 저렇게…….”

“크흠.”

내가 그 말을 덮으려 헛기침을 했다.

괜한 분란을 만드느니, 적당히 얼버무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충분히 예상한 시선이기도 하고.

그러나 아펠은 못 들은 척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목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차가운 눈빛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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