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 원작 거스르기 】
다행히 파타슈에게 머랭의 정체에 대해 둘러대야 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초식 동물인 브라우니가 육식 동물인 머랭을 쫓는 술래잡기가 한바탕 벌어진 후, 이제 그들은 정자의 기둥 옆에서 나란히 잠들어 있었다.
브라우니도 다시 미니 버전으로 돌아온 터라 그 모습은 귀엽기 그지없었다.
파타슈가 픽 웃었다.
“간만에 거대화해서 들뜬 모양이네요.”
“그러게요. 장성한 자식도 어린아이처럼 보인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기도 하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 나니 어쩐지 이 대화가 함께 말년을 보내는 노부부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그래, 가끔은 이렇게 느긋한 것도 좋겠지.
애초에 내가 파타슈와 약속을 잡은 이유도 업무에서 벗어나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서였다.
브라우니는 키슈의 연구로 거의 만나지 못하고 있었고, 내가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파타슈도 거의 못 봤으니까.
아늑한 기분을 누리기엔 쌀쌀한 날씨이긴 했지만 마음만은 안락했다.
나는 모처럼 힐링 되는 기분으로 브라우니와 머랭을 쳐다보았다.
그때 파타슈가 내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몽블랑 후작님은 못 보셨나요? 키슈 님께서 브라우니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하셨는데.”
“물어볼 거요?”
“브라우니가 혼자서는 아직 거대화를 못 하잖아요. 원인을 모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후작님께서 많이 바쁘신지 방문 약속을 잡기가 힘들다고…….”
“아아, 언제 오시기로 되어 있는지 아펠한테 물어볼게요.”
그러자 파타슈가 특유의 회색 눈동자로 날 빤히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내가 아펠이라는 이름을 너무 자연스럽게 꺼내서 그런 것 같았다.
내가 민망함에 웃자, 그가 곧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마탑 재개방 얘기는 물어보신 적 없죠?”
“네, 네에.”
“이유만 들어도 괜찮으니까, 그 얘기도 부탁드릴게요. 키슈 님과 피오르 님께서 매번 헛고생하는 걸 보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니라서.”
아펠과 아는 사이면서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것이냐, 하는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물론 파타슈가 대놓고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나는 괜히 찔리는 기분에 말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마탑 폐쇄에 관해 아펠에게 대답을 들은 적이 없었다.
어차피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급하면 그와 말문을 튼 갈레트가 직접 얘기했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어쨌든 나는 얘기 정도는 해보겠다며 약속하고 파타슈를 돌려보냈다.
신나서 삐삐거리는 브라우니에게 손을 흔든 내가 문득 크바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알아요? 아펠이 왜 마탑을 폐쇄했는지.”
“마법의 마 자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알겠냐. 그리고 알아도 얘기 못 하지.”
하긴 황실 기사단의 일원이 멋대로 아펠의 이야기를 도마 위에 올릴 수는 없었다.
나는 금방 납득하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브라우니 때문에 몸이 고단했던 듯 머랭은 아직도 기둥 옆에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나는 녀석을 보며 픽 웃고 내용물이 조금 남은 찻주전자를 들었다.
“조심하라고 말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뜬금없는 말이었다.
내가 고개를 들자 이곳에 있던 유일한 사람인 크바스가 아무 일도 없던 척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그러니까 뭘요?”
“…….”
크바스가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파타슈가 오기 전과 똑같은 말, 똑같은 반응이었다.
하지만 문맥으로 보면…….
“아펠을 조심하라고요?”
유추한 것을 묻자 크바스가 잠깐 내 시선을 마주 보았다. 나는 그것이 정답이라는 뜻임을 알아챘다.
하지만 내가 아펠을 조심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
* * *
당연히 찻주전자에 남아 있던 차는 완전히 식어 있었다.
슬슬 해도 저물어가고 있었기에, 나는 가지고 나왔던 서류를 모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크바스도 파타슈 때문에 잠깐만 불려왔던 거라며 다시 별궁을 떠났다.
내가 머무는 방은 별궁 1층에 있었다.
머랭은 창문을 통해 마당과 내 방을 오가곤 했는데, 그 때문에 나는 대체로 창문을 열어놓는 편이었다.
아펠은 조금 늦으려나?
창문을 닫는 대신 커튼을 치려다가 문득 연회장의 불빛을 쳐다보았다.
보통은 아펠이 연회에서 돌아오면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곤 했지만 상황을 보니 오늘 손님맞이는 제법 오래 걸릴 모양이었다.
다행히 디저트를 많이 먹어서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나는 나중에 에이미에게 전달할 서류를 따로 정리해 두고 오늘은 이만 쉴 겸 기지개를 켰다.
“끄으응…….”
좌우로 몸을 비틀자 머랭은 내가 자신과 놀아주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내 눈 닿는 곳으로 와서 팔짝팔짝 뛰었다.
그리고 내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자마자 나를 따라 침대에 올라오더니, 곧이어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하품했다.
“으으, 귀여워라!”
나는 참지 못하고 녀석을 끌어안았다. 머랭의 귀가 움찔거리며 뺨을 간질였다.
나는 한참 동안 녀석의 정수리에 뽀뽀를 날려대다가 이내 침대에 배를 대고 엎드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아펠이 좀 늦으려나 보다. 몽블랑 후작님이 언제 오기로 되어 있는지도 물어봐야 하는데.”
나와 이마를 맞대고 있던 머랭이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 보았다.
나는 머랭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다 말고, 그 대신 녀석의 발바닥을 꾹꾹 눌렀다. 볼록하면서 딴딴한 감촉이 중독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후작님을 뵈려면 내가 직접 연회에 나가야 하나?”
몽블랑을 직접 만난 건 십 년도 더 된 일이었다.
종종 키슈나 피오르, 또는 갈레트나 집안사람들에게서 소식을 전해 들은 적은 있었으나 당연히 내 쪽에서는 그를 찾아간 적도, 그를 초대한 적도 없었다.
그가 보내준 마론 슈는 매년 내 생일에 맞춰 도착하고 있었지만.
“…….”
언제 웃었냐는 듯 기분이 가라앉았다.
나는 아직도 몽블랑의 목적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갈레트의 후견인이 된 후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영지를 탐내는 기색도, 수상한 움직임도 없었다.
내가 성인이 된 후에는 영지 관리마저도 내게 양보했고, 그 이전에 그는 나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내가 틀린 걸까.
“하아, 역시 직접 얘기를 해보는 게 좋을지도…….”
복잡한 심경이었다.
나는 솜방망이 같은 머랭의 발바닥을 손가락 위에 올리고 들썩들썩하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코를 킁킁거리던 머랭이 갑자기 고개를 확 치켜들어서 정수리로 내 턱을 가격했다.
“윽! 싫으면 말로 하지… 앗.”
나는 뒤늦게 내 옷에 묻은 흙 자국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뜰에서 한참 술래잡기를 한 머랭이 발을 닦지도 않고 침대에 올라왔구나.
뒤늦게 깨달은 나는 내 손을 쳐다보았다.
물론, 녀석을 발바닥을 주물럭거렸던 내 손도 이미 지저분해져 있었다.
“…에휴.”
얕은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녀를 불러 씻을 물을 가져다 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머랭의 발도 씻겨야 할 테니 내가 직접 나가는 게 편할 것 같았다.
나가려는 낌새를 눈치챈 머랭이 저도 같이 가겠다는 듯 문 앞에 서서 날 돌아보았다.
내가 픽 웃고 문고리를 돌리자 머랭이 신나 뛰쳐나갔다.
“머, 머랭, 잠깐만! 그쪽 아니야!”
우물은 연회장으로 가는 길목, 뜰 한구석에 있었다.
그러나 머랭은 그 반대쪽으로 전력 질주하고 있었다.
아직 연회가 남은 시간, 황궁을 오가는 수많은 귀족들.
분명 그들에게 머랭, 신수의 존재는 극비일 것이었다.
나는 다급히 머랭을 잡으러 녀석의 뒤를 따라 달렸다.
“허억, 후욱, 끄응…….”
저질 체력에 마법 물품도 쓰지 않고 있는 나쯤이야 순식간에 따돌릴 수 있었겠지만, 머랭은 그러지 않았다.
녀석은 오히려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문득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나와의 거리는 아주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고, 낯선 귀족과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아마 머랭은 이곳에서 오래 살았던 만큼 인적이 드문 길이 어디인지도 훤히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대부분의 일손이 연회에 집중됐기 때문이라거나.
어쨌든 나는 점차 다급했던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다.
기사 수련회에서 아펠을 발견했을 때, 마탑에서 디몬과 마주쳤을 때.
어쩌면 이번에도?
뒤늦게 그 가능성을 떠올린 내가 속도를 늦췄다.
호흡이 진정되고 난 후에도, 역시나 머랭은 나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
나는 가만히 녀석의 뒤를 따랐고, 녀석은 곧 내가 처음 보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반사적으로 내 걸음이 멈췄다.
아펠에게서 안내받은 적 없는 건물이니만큼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그 건물 자체에서 느껴진 꺼림칙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건물의 입구는 양쪽에 세워진 화려한 기둥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문은 없었다.
건물의 구조는 한 치의 오차 없는 대칭이었으며 그로 인한 엄숙함이 느껴졌지만 건물 자체는 크지 않았다.
안쪽은 불 한 점 없이 어두웠고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늘한 공기 때문인지 그곳은 마치 폐건물처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뭐 하는 데지?
그런 생각에 나는 차마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입구에서 머랭을 불렀다.
“머랭, 그만…….”
그만, 그만, 그만…….
마탑이 생각나는 어둡고 긴 복도를 따라 내 목소리가 반향됐다.
이곳에 있는 게 나 혼자인 것 같은 공허감이 들었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곳, 그러나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머랭이 짖는 소리가 들렸다.
날 부르는 건가?
“으음…….”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봤자 머랭이 제 발로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았다.
마탑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그 어둡고 긴 복도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깊이 들어가자 머랭은 복도 옆에 난 계단으로 날 이끌었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는데, 달빛에 반사된 문은 조각이 새겨진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문에 조각된 것은 분명 마법진이었다.
얼추 봉인진처럼 보였는데, 조금 열려 있는 것을 보니 효력은 없는 듯했다.
돌이 닳아서 그런가? 새겨진 지 오래된 것 같은데…….
“멍!”
머랭이 잠시 딴생각에 빠진 나를 깨웠다. 그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였다.
그래, 지하실이라면 막다른 곳일 테니 머랭을 붙잡을 수 있겠지.
나는 난간을 잡고 어두운 공간 속으로 조심스레 한 칸 한 칸 내려가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먼지가 붙는 것이 느껴졌고, 혹시 거미줄이라도 있을까 무서워서 다른 손으로는 눈앞의 허공을 마구 흩뜨렸다.
그러던 손끝에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이것도 문인가?
아직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 전이었기에 확신할 순 없었다.
나는 긴가민가하며 그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러자 마법이라도 걸려 있던 것처럼 곧바로 문이 열리며 내가 아는 장소가 나타났다.
돔 형태의 지붕과 복층으로 된 도서관.
이곳은 분명…….
“마, 마탑?”
마탑과 황궁을 잇는 비밀 통로.
그에 대한 내용은 분명 오래전 아펠에게서 들은 바가 있었다.
설마 머랭을 따라 들어온 곳이 그 비밀 통로인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아니, 이렇게 직통으로 연결되는 거라면 경계 근무 서는 기사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