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비록 그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무뚝뚝한 인물이었지만 크레페에게는 자신의 외모만 보고 접근하는 숱한 남자들과 다른 아펠이 오히려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결국 크레페는 아펠을 사랑하게 되고, 끝내 그와 약혼한다.
하지만 아펠은 크레페에게 그리 친절한 인물이 아니었다.
크레페는 그의 호의를 얻기 위해 갖은 수를 쓰지만 통하지 않고, 결국 바움쿠헨국의 뢰드그뢰드 후작의 꼬임에 넘어가 본의 아니게 아펠을 함정에 빠트린다.
그리고 그것을 원인으로 크레페는 아펠에게서 버림받게 된다.
약혼녀로서 본궁에 머무르고 있던 크레페는 파혼당하자마자 쫓겨나듯이 본가로 돌아온다.
곧 변방에 나가 있던 아빠의 전사 소식이 도착하고, 결국 의지할 이가 아무도 남지 않게 된 크레페는 홀린 듯 칼을 들고 카눌레의 침실로 들어간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복수였다.]
그게 원작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다시 되짚어봐도 이런 글을 쓴 디저트몬스터, 아니 디몬은 변태가 틀림없었다.
실제로는 거의 다 빗나가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엄마의 죽음 외에는 맞는 것이 거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재난은 언제나 방심하고 있을 때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불안해해야 하는 걸까?
야속하게도 사건은 항상 잊을 만하면 발생하곤 했다. 엄마의 죽음, 마탑의 폐쇄 소식, 얼마 전에 있던 바움쿠헨의 뢰드그뢰드 후작과의 만남도 그랬다.
망할 운명, 망할 신 같으니라고.
암만 생각해도 내가 이렇게 겁쟁이가 된 건 원작이 워낙 꿈도 희망도 없던 탓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공책을 덮고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크레이프 케이크를 잘라 한 입 먹었다.
부드러운 식감, 깔끔한 단맛, 혀끝에 맴도는 고소한 우유 향까지.
세상 복잡하던 감정이 크림과 함께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이 쓰디쓴 세상에서 위안이 되어줄 것은 디저트뿐이구나.
“아쭈, 헤벌레한 것 봐라. 살판났나 보네.”
사람이 고차원적인 문제로 고뇌하는 것도 모르고 얄미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내가 입술을 비죽 내밀고 맞받아쳤다.
“내 일 열심히 하다가 잠깐 쉬겠다는데 왜 시비예요?”
“…….”
그러자 갑자기 크바스가 입을 다물었다.
때에 맞지 않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조심해.”
“뭘요?”
“…….”
뭐지?
다시 침묵이 시작됐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대놓고 물어보려던 그때, 자리를 비웠던 시녀가 돌아왔다.
“약속된 손님이 오셨습니다. 이곳으로 안내할까요?”
“아, 네!”
나는 곧바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머랭이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더니, 낯선 냄새를 맡고 경계하듯 뒤로 물러났다.
곧 파타슈와 브라우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브라우니는 여전히 인형만큼 작은 덩치로 파타슈의 품 안에 쏙 안겨 있었는데, 파타슈의 키가 전보다 커져 있었기에 브라우니는 상대적으로 더 작아 보였다.
파타슈는 어느덧 훌쩍 큰 청년이 되어 있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열아홉 살이니 정확히는 청소년이겠지만, 어딘가 학생 같은 인상이 남은 것과 별개로 키만큼은 성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제가 황궁에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정식 마법사도 아닌데.”
“파타슈 님은 어릴 때부터 마법 천재였잖아요. 언젠간 황궁 마법사도 될 수 있지 않겠어요?”
“…크레페 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재밌네요.”
파타슈가 그렇게 대답하며 피식 웃었다.
나와 갈레트가 나란히 마탑의 천재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파타슈 입장에서는 내가 겸손을 떨며 저를 추켜세워 준 것처럼 들렸나 보다.
물론 난 사실을 말한 것뿐이지만.
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 손짓했다.
“여기 앉으세요.”
“네.”
파타슈가 내 손짓을 따라 의자에 앉았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것치곤 데면데면한 태도였으나 분명 낯선 환경에 긴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날 처음 만났을 때 그랬듯이 말이다.
시녀는 파타슈를 안내만 해주고 다시 돌아갔다.
‘디저트를 추가로 마련해 드릴까요?’ 하는 말에 파타슈가 격렬히 고개를 저었으니 다시 올 일도 없을 것이다.
“근데 갑자기 왜 여기 머물게 되신 거예요?”
어색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파타슈가 물었다.
으음, 아직 못 들었구나.
나는 아펠과 사귀게 되었다고 대답하기가 민망해 괜히 헛기침을 하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 사정이 있어서요.”
“참 나, 크흠.”
반사적으로 코웃음을 친 크바스가 뒤늦게 아무 일도 없던 척 목을 가다듬었다.
“저분은?”
파타슈가 물었다.
낯선 사람이 자리에 있으니 브라우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가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하긴 둘은 모르는 사이던가?
그들은 같은 학교 출신이었지만 학년 차이가 꽤 났다.
파타슈가 입학한 지 몇 달 안 돼서 크바스가 졸업했으니까.
굳이 소개할 필요는 없겠지 싶어 나는 가볍게 손만 젓고 말했다.
“저분은 괜찮아요.”
아펠이 직접 크바스를 호위기사로 지명한 것이니 딱히 브라우니의 정체를 숨길 필요는 없었다.
“…네, 그렇다면.”
파타슈가 그렇게 말하며 브라우니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인형인 척 얌전히 안겨 있던 브라우니가 투레질을 했다.
“삑!”
“꺙!”
순간 파타슈가 어색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내가 낸 소리 아니에요!”
이런 걸 해명씩이나 해야 한다니.
나는 허리를 숙이고 내가 앉은 의자 밑을 내려다보았다.
머랭이 귀와 꼬리를 둥글게 말고 웅크려 있었다.
역시나 이 녀석이 놀라서 낸 소리였나 보구나.
내가 손을 뻗어 머랭을 품에 안고 다시 바른 자세로 앉았다.
파타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개는 여기서 키우시는 건가요?”
“아뇨, 아펠의…….”
“아펠?”
“크흠.”
크바스가 은근슬쩍 헛기침을 했다.
이제 와서 아펠의 이름을 꺼냈다고 저러는 것 같진 않고, 아무래도 머랭에 대한 이야기를 막으려는 모양이었다.
내가 눈치껏 둘러댔다.
“네에, 아펠이 키우는 강아지예요.”
그렇게 말하자 머랭이 무슨 소릴 하냐는 듯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뒤통수에 이어 쫑긋한 귀 두 개가 내 쇄골을 간질여 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파타슈는 이 분위기에 동조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서, 설마 황태자 전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 내가 아펠의 이름을 불러서 당황한 거였구나.
내가 뭐라 해야 할지 머뭇거리는 사이, 크바스가 대신 말해 주었다.
“태자 전하의 약혼녀십니다.”
파타슈가 입을 쩍 벌렸다.
여기서 ‘사실 네가 저번에 본 플럼이 아펠이지롱!’ 같은 소리를 하면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물론 실제로 그런 짓을 하진 않겠지만.
나는 그의 반응을 못 본 척하고 테이블에 머랭을 내려놓았다. 머랭이 움찔움찔하며 내게 달라붙었다.
브라우니가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머랭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머랭도 긴장이 풀린 듯 코를 씰룩거리며 브라우니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나와 파타슈는 대화하던 것도 잊고 그들의 첫 만남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게 뭐라고 흥미진진하지? 이래서 TV에 나오는 동물 방송이 롱런하는 건가.
“삐?”
쓸데없는 감상에 젖은 그때, 갑자기 브라우니가 파타슈의 품으로 돌아갔다.
파타슈가 브라우니와 대화라도 하듯 눈빛을 주고받더니 내게 물었다.
“저, 브라우니를 거대화해도 괜찮을까요?”
“네에.”
내 시원찮은 대답이 떨어지자, 그가 브라우니를 데리고 몇 걸음 물러나 조금 넓은 흙바닥에 녀석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브라우니의 등에 손을 올렸다.
나는 이다음 일어날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뒤돌아 두 팔을 벌리고 테이블의 양 모서리를 붙잡았다.
“그럼…….”
파타슈의 짧은 목소리와 동시에 마나의 풍압이 일었다.
그것은 폭풍처럼 거셌고 겨울바람처럼 날카로웠다.
마나에 민감한 내게는 저절로 몸에 힘이 들어갈 정도의 기운이었다.
“끼양!”
머랭이 가냘픈 비명을 지르며 나를 방패 삼아 숨었다.
디저트 식기들이 덜그럭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접시가 날아가지 않도록 몸을 숙이고 등으로 바람을 막았다.
꿈쩍도 하지 않던 무거운 테이블이 덩달아 덜컹거렸다.
달그락.
“웁.”
잠시 후 바람이 잦아들었다.
고개를 들자 크바스는 바닥을 단단히 딛고 서서 파타슈를 향해 검을 빼 들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곧 크바스가 나를 쳐다보았다.
“푸훕.”
“…….”
이유를 모를 건 아니었다.
덜컹이던 디저트 접시, 그것도 먹다 남은 크레이프 케이크에 얼굴을 박아버린 게 문제였다.
바람이 등을 떠미는 바람에 그만…….
나는 생크림 폭탄을 맞은 것 같은 몰골로 파타슈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파타슈 님, 손수건 있나요?”
“네? 아.”
파타슈가 뒤늦게 당황하며 제 몸을 뒤적였다.
그때 보통의 말만큼 커진 브라우니가 다가오더니, 큼지막한 혓바닥으로 내 얼굴을 핥았다.
“…고맙다.”
내가 해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네, 뭐. 다친 건 아니니까요.”
엉망이 된 앞머리를 정리하며 파타슈에게 대답해 주었다.
브라우니는 감사 인사라도 하듯 파타슈의 근처를 두어 번 돌더니 푸릉, 소리를 내며 앞다리를 들었다.
위세가 느껴지는 늠름한 골격과 곧은 다리, 멋있는 갈기.
거대화는 어른이 된 브라우니와 키슈의 연구, 파타슈의 마나라는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이후에 생긴 브라우니의 취미였다.
녀석의 평소 모습은 여전히 인형처럼 작았다.
하지만 파타슈의 마나를 일정량 이상 받으면 금세 성년기의 말로 변할 수 있었다.
“그래, 뉘 집 자식인지 잘 컸다, 잘 컸어.”
아낌없는 칭찬을 퍼붓자 브라우니가 내게 머리를 비볐다.
그러다가 깜빡 잊었다는 듯 콧바람을 내뿜고 테이블로 향했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웅크려 있던 머랭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려다가 브라우니의 커다란 눈에 압도된 듯 굳었다.
그러자 브라우니가 머랭에게 다가가 녀석을 물고 공중에 던졌다가 머리로 받았다.
그러고는 아이에게 목말을 태워주는 부모처럼 신난 표정으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꺙! 끼야앙!”
“자, 잠깐만! 애가 무서워하잖아!”
내가 뒤늦게 달려들어 브라우니의 앞발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브라우니가 아쉽다는 얼굴을 하고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다.
머랭은 브라우니의 정수리에서 뛰어내리더니 내게 다가와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아무래도 자기도 거대화하고 싶다고 조르는 것 같은데…….
응, 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