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몰랐나 보네. 이거 너한테 받은 거야. 착용자의 마나 패턴에 반응해서 모양이 바뀌는 금속이라던데.”
“…….”
나는 순간 얼빠진 얼굴을 했다. 어쩐지 마탑에서 일하는 피오르에게서 받은 것치고는 너무 평범한 것 같긴 했다.
그냥 내가 마나를 갖고 있지 않아서 일반 철사처럼 보였던 거구나.
그렇다는 건, 처음부터 계속 아펠이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뜻?
팔찌 하나로 괜히 이런저런 생각을 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그럼…….”
달칵.
내가 민망함을 감추고 말을 돌리려 한 그때, 문이 열리며 에이미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의 손에는 큼지막한 빗자루가 야구 방망이처럼 들려 있었다.
긴장한 눈빛을 보니 내 방에 도둑이라도 들었나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 아가씨? 언제 오셨, 아니.”
에이미가 당황한 듯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가 문득 아펠을 발견하고 아차 한 얼굴로 말했다.
“앗. 실례했습니다. 저는 내일 아침에 다시…….”
그러고 그녀가 얌전히 문을 닫고 나가려 했다.
무슨 오해를 했을까 싶어 나는 문이 닫히기 전에 에이미를 불러 세워야 했다.
에이미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에이미는 상대가 아펠 슈트루델 태자라는 것을 알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리고 몽블랑이나 파타슈나 크렘이나, 여타 나와 스캔들이 날 뻔했던 모든 이름들을 뒤로하고 내게 눈을 반짝였다.
물론 나는 그 반짝임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 것 같았지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아무튼 저는 며칠 동안 황궁에서 머물게 될 거예요.”
“그럼 파타슈 님과의 약속은 어떻게 할까요?”
에이미가 물었다.
사실 나도 그 문제 때문에 에이미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곧 파타슈가 브라우니를 데리고 이 저택에 방문하기로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계획을 조금 미루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그때, 아펠이 끼어들었다.
“페가수스 때문이라면 황궁으로 불러도 돼.”
“아…….”
완전히 읽힌 기분이었다.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긴 아펠은 일찌감치 브라우니에 대해 알고 있었다. 머랭의 이름도 브라우니와 맞춰서 지은 거라고 했으니 말 다 했지.
아니, 잠깐.
“파타슈 님 얘기밖에 안 했는데 브라우니 얘기인 줄은 어떻게 알았어?”
혹시라도 파타슈에 대해 무슨 뜬소문 같은 게 있나 싶어 물었다.
그러나 아펠은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히 대답했다.
“웬만한 정보는 내가 다 알고 있다고 보면 될 거야. 아버님이 병상에 계시니까.”
나는 얼떨떨하게 그렇구나,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펠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너만 괜찮으면 궁에서 보는 걸로 해.”
“정말?”
“어차피 나중엔 너희 집이 될 텐데.”
“…….”
생각지 못한 데서 훅 들어오는 화법은 변함이 없구나.
나는 뒷말은 못 들은 척 헛기침을 하고 에이미에게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에이미. 그리고 혹시 급한 서류가 있으면 따로 챙겨주겠어요?”
“집무실에 정리해 놓을게요. 여기서 푹~ 쉬시다가 집무실로 오세요~”
이상한 데서 말꼬리를 늘인 에이미가 혼자 후훗, 후후훗, 웃더니 조용히 문을 닫았다.
내가 곧바로 문을 열고 후다닥 멀어지는 에이미의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바로 갈 거라고요!”
* * *
“오구오구, 우리 애기!”
윤기 나는 하얀 등 털을 쓰다듬고 녀석의 정수리에 내 뺨을 비볐다.
얌전히 안겨 있던 녀석이 답답해진 듯 머리를 털었다.
나는 그 모습마저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 귀여움이었다.
물론 이 녀석은 평범한 애완동물도, 떠돌이 강아지도 아니었지만.
신수 펜리르, 호칭은 머랭.
녀석의 본모습은 아마 나를 등에 태울 수도 있을 만큼 커다란 늑대일 것이다.
아니, 시간이 지난 만큼 예전보다도 더 커져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 진실에서 눈을 돌리기로 했다.
어차피 신수의 특성상 미니 사이즈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게 없었고, 나는 귀여운 것에 껌뻑 죽었으니까.
브라우니가 알면 질투하겠지만, 나는 품에 안은 머랭을 아기 대하듯 우쭈쭈 달래며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별궁 뒤뜰에 지어진 가제보였다.
건축물 자체는 쉬제트 백작가에 있는 것과 비슷한 정자였으나 크기는 훨씬 커서, 안에는 동그란 티 테이블 대신 식사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직사각형의 대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 별궁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머랭을 널찍한 탁자 위에 내려놓고 의자를 빼 앉았다.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의 날씨였기에 대리석 테이블의 찬 기운이 옷 너머로도 느껴졌다.
나는 조금 몸을 움츠렸다가 곧바로 머랭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따끈따끈한 살가죽 너머로 느껴지는 단단한 갈비뼈를 문지르자 손이 금방 따뜻해졌다.
녀석도 기분이 좋은지 마사지받듯 나른해하는 얼굴로 하품을 했다.
“이름 누가 지어준 거야아? 사각사각한 머랭, 응? 앙, 하고 깨물어버릴까? 이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그냥…….”
“크흐흐흠!”
대놓고 들으라는 듯한 헛기침 소리였다.
머랭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던 내가 화들짝 놀라 허리를 폈다.
“크바스 님? 이곳까지 어쩐 일로 오셨어요?”
예상치 못한 방문에 내 말투에는 어리둥절해하는 기색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크바스가 한 차례 손을 내저었다.
“됐다, 도토리. 이제 와서 닭살 돋게.”
그렇게 말한다면야.
“덩치님이 무슨 일로?”
“…….”
원하는 대로 편하게 대해줬는데 크바스의 표정이 별로 안 편해 보였다.
다시 질문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시녀 한 명이 다가와 디저트를 준비해 오겠다는 얘기를 했다.
티타임에 걸맞은 오후 시간, 나와 달리 아펠은 아직 연회장에 있었다.
내가 그의 동반 입장 제의를 거절한 결과였다.
정식 약혼 발표도 안 한 내가 연회 내내 아펠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응. 남아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아펠은 그렇게 대답하며 내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게 첫날의 일이고, 이후 나의 생활 패턴은 매우 단순했다.
아펠이 대외적인 업무를 보는 동안 나는 재택근무를 하고, 짬이 나면 머랭과 노닥거리다가 아펠이 돌아오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그런데 그 패턴에 크바스가 끼어들 줄이야.
황실 기사단에 있는 만큼 그도 근처에 머물고 있을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 먼저 나를 찾아올 줄은 몰랐다.
혹시 심심해서 온 건가?
“심심해서 왔어요?”
생각과 동시에 말이 튀어 나갔다.
크바스가 얼굴을 찌푸리고 빠르게 받아쳤다.
“전하께 명을 받아서 온 거야!”
“아펠은 연회장에 있을 텐데요?”
“그게 아니라…….”
내가 시종일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크바스가 얕은 한숨을 내쉬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네가 여기 머무는 동안은 내가 네 호위기사를 맡게 됐어.”
“아아.”
곧바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호위해 주었던 마르크는 오빠들과 함께 돌아간 상태였다.
황궁이니 안전하겠지 싶어 그냥 있었는데, 날 걱정한 아펠이 직접 크바스를 불러준 모양이었다.
오늘 방문하기로 되어 있는 손님도 있고 말이다.
그래, 생판 남보다는 익숙한 얼굴이 낫겠지.
나는 싫은 내색 없이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못마땅한 듯 크바스가 입안에서 혀를 찼다.
“참 나, 이런 꼬맹이가 태자 전하의 퍼스트레이디라니.”
“크흠.”
트레이에 홍차와 케이크를 올려 가져오던 시녀가 헛기침을 했다.
크바스가 아차 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쪽에 신경 쓰지 않고 머랭을 땅에 내려놓았다.
곧 크레이프 케이크와 홍차가 눈앞에 차려졌다.
별생각 없이 따끈한 찻잔에 손을 뻗은 그때, 시녀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크바스 님, 기사의 예를 지켜주십시오.”
“…크레페 님, 실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순간 차를 마시는 것도 잊고 멍한 얼굴로 크바스를 쳐다보았다.
크바스는 적잖이 굴욕적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그럼 태자 전하께 말을 전하고 오겠습니다.”
도도한 말을 남긴 시녀가 건물 코너를 돌아 사라졌다.
시녀라고는 해도 황태자의 직속이기 때문에 크바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크바스가! 나한테 크레페 님이라니!
이게 바로 권력의 단맛이라는 건가.
“어… 가, 같이 드실래요?”
순간 위험한 방향으로 눈을 떠버릴 뻔한 내가 도리질을 치고 말을 돌렸다.
“괜찮습니다.”
크바스가 맞은편에 앉지도 않고 대답했다.
“보는 사람 없을 땐 그냥 편히 얘기해요…….”
“난 다과회 같은 고상한 취미 없으니까 됐어.”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말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지간한 귀족 영애였다면 그 태도에 마음이 상했을 만도 했지만, 20년 동안 카눌레에게 단련된 내게는 별 타격이 없었다.
“그럼 말고요.”
굳이 더 권하지 않고 차를 입에 댔다.
익숙한 블랙티를 베이스로 꽃향기를 추가한, 늦가을 오후에 딱 맞는 홍차였다.
어쩐지 나른해지는 시간이구나.
나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별궁은 아펠의 어머니가 머물던 곳이기도 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게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어쩌면 내가 이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는 사실이 아펠에게 위안이 될지도 몰랐다.
아펠이랑 결혼한 다음에도 이런 느낌이려나?
“…….”
나는 도리질을 쳐 잡념을 털어내고 방에서 서류 한 더미를 챙겨 나왔다.
민원이나 재판 절차가 적힌 문서를 한 장 한 장 넘기던 내 손이 잠깐 멈췄다.
『내 인생 공략집』.
뭉텅이로 챙긴 업무 서류 사이에 스파이가 섞여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어릴 때 썼던 일기장을 발견한 기분으로 그 공책을 펴 보았다.
어차피 한글이니 크바스가 알아볼 걱정도 없었다.
[갈레트 죽음.
에클레어와 적이 됨.
몽블랑 후작이 카눌레의 후견인이 됨.
아펠과 약혼했다가 파혼함.]
역시, 다시 봐도 꿈도 희망도 없구만.
나는 조용히 혀를 찼다.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의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다.
이미 여러 번 언급됐듯 원작에서 갈레트는 암살당했다.
크레페는 그 범인을 몽블랑이라고 생각해 그와 거리를 두었지만, 반대로 카눌레는 몽블랑을 자신의 후견인으로 받아들였다.
그게 원인이 되어 크레페와 카눌레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엄마는 죽은 지 오래였고 아빠는 전선에서 돌아오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학교도 가지 않고 집에만 처박혀 있던 크레페에겐 다른 친구도 없었다.
에클레어는 크레페를 견제하기 바빴고, 크렘은 크레페의 미모나 그 후광을 이용할 생각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크레페가 믿고 기댈 만한 사람은 아펠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