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아, 그렇구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크렘이 나한테 실연당한 것처럼 보일 테니, 올 때처럼 같이 돌아가는 건 힘들겠…….
“당연히 우리랑 같이 돌아가야죠. 그치?”
내가 생각을 다 정리하기도 전에 갈레트가 내 팔을 잡았다.
크렘의 질문은 그런 뜻이 아닐 텐데, 싶었지만 말할 타이밍을 못 잡았다.
어느샌가 나타난 아펠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며칠만 더 머물러줬으면 좋겠는데. 힘들까?”
“여기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아펠이 설명을 덧붙였다.
“머물 수 있게 별궁을 내어줄게.”
“아, 아냐! 그냥 다른 손님이 머물 수 있는 곳이면…….”
“그쪽은 이미 자리가 다 찼을 거야. 별궁을 통째로 쓰는 게 부담스러우면 본궁에도 자리를 마련할 수 있…….”
“괜찮아!”
내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결혼한 것도 아닌데 교제 발표 첫날에 본궁행이라니,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내가 말까지 더듬으며 사양하자 아펠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응. 그럼 별궁을 준비시킬게.”
그러고 아펠이 연회장을 나갔다.
졸지에 며칠 더 머무르게 된 내가 얼떨한 기분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너도 참 대단하다. 몽블랑 후작님, 평민 꼬마, 자작가 바람둥이에 이어 황태자 전하? 스캔들의 달인이냐?”
그 무엇도 정답은 아니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마지막에 말한 아펠만 정답일 것이다.
물론 카눌레에게 내 사정을 하나하나 설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카눌레가 언짢은 기색으로 다시 물었다.
“진짜 더 있으려고?”
“그럼 나도 있을래!”
갈레트가 질세라 외치며 내게 엉겨 붙었다.
카눌레는 인상을 찌푸리고 갈레트의 팔을 끌어당겼다.
“형은 아직 피오르 님네 일 남겨놓고 왔다며!”
“하지만 크레페를 어떻게 혼자 두고……!”
갈레트는 어떻게든 버텨보려 낑낑거렸지만 카눌레가 힘으로 떼어냈다.
그가 갈레트의 뒷덜미를 잡고 문 쪽으로 끌어갔다.
“난 모른다!”
카눌레가 날 보며 퉁명스러운 한마디를 남겼다.
걱정한다고 보기에는 썩 모자란 말이었지만, 나는 그게 그 나름의 인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 이대로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예의 바른 크렘의 작별 인사를 마지막으로 내 주변에서 북적이던 사람들이 다들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나간 문을 멍하니 보다가 문득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몰려 있는 것을 느끼고 슬쩍 자리를 피했다.
“쉬제트 가문의 밀 크레프 님?”
그때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에게 부딪힐 뻔한 내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사오십 대 정도 되어 보이는 중년의 나이였는데, 예복을 입고도 근육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기골이 장대했다.
연회 자리가 아니었다면 기사단장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 덩치에 놀란 내가 몇 걸음 물러났다.
흰머리가 섞여 회갈색으로 보이는 머리카락 밑으로 옅은 주름과 가는 눈매가 보였다.
피부는 파타슈처럼 옅은 갈색에 뺨은 마른 편이었다. 가는 눈과 얼굴형 때문인지 뱀처럼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바움쿠헨에서 온 뢰드그뢰드 메드 플뢰데 후작입니다.”
바움쿠헨의 뢰드그뢰드 후작.
나는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의 등장인물.
크레페의 인생은 크게 3막으로 나눌 수 있었다.
1막은 아펠과 약혼하기 전, 2막은 아펠과 약혼한 후, 3막은 아펠과 파혼한 후.
그리고 1막의 악역이 에클레어, 3막의 악역이 몽블랑이었다면 뢰드그뢰드 후작은 2막의 악역이었다. 그 말인즉…….
아펠과 크레페를 파혼시킨 주범.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아펠과 약혼할 거라고 생각하질 않았으니 그와의 접점도 없을 줄 알았는데…….
나는 보이지 않게 마른침을 삼키고 애써 태연한 척 예를 갖췄다.
“처음 뵙겠습니다.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라고 합니다.”
그러자 뢰드그뢰드가 양쪽 발뒤꿈치를 부딪쳐 탁, 소리 나게 섰다.
슈트루델과는 다른, 바움쿠헨국의 예법이었다.
“지휘관으로 이름난 쉬제트 백작님이 계시는 변방 근처가 제 영지인지라 이야기는 자주 들었습니다. 주로 최연소 마법사인 갈레트 드 루아 쉬제트 님과 무관으로 장래가 유망한 카눌레 드 보흐도 쉬제트 님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말이지요.”
“오라버님들을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원작에서의 일도 있고, 그의 인상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예를 갖춰 대답했다.
뢰드그뢰드가 싱긋 웃고 말을 이었다.
“곧 밀 크레프 님의 이름도 그분들 못지않게 유명해질 것 같군요. 사교계의 귀공자로 알려진 크렘 브륄레 커스터드 님과 바니유 공작가의 에클레르 님을 친우로 두고, 심지어 차기 공작이 될 젤라토 르 바니유 님이나 황실 기사단에 계신 크바스 데 오크로시카 님과도 친분이 있으신 것 같던데. 역시 커스터드 귀족 학교에 입학하신 덕분이겠지요? 제 아들도 입학시킬 것을 그랬습니다.”
“…….”
이번에는 좋게 대꾸해 주기 힘들었다. 뒷조사라도 한 것 같은 정보력에 썩 껄끄러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그가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아, 실례했습니다. 외교 업무를 주로 맡은 터라 기억하는 이름이 많을 뿐이니 양해해 주시길.”
“그러시군요.”
짧게 대답했다.
적당히 맞장구치다가 자리를 피할 생각이었다. 보는 눈이 많으니 타국의 귀족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뢰드그뢰드 후작은 내 사정을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제 곧 아펠 슈트루델 태자 전하와 약혼하실 거라니…….”
“제 혼사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자리를 비웠던 아펠이 돌아왔다.
뢰드그뢰드 후작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예를 차리고 멋진 연회라며 말을 돌렸다.
끝까지 수상쩍은 태도였지만 내가 말꼬리를 붙이기 전에 그는 자리를 피했다.
내게 용건이 있다면 언젠가 다시 볼 일이 있겠지.
나는 최대한 편히 생각하기로 마음먹고 아펠을 올려다보았다.
“얘기했어?”
“응. 다들 돌아갔나 봐?”
“바쁜가 보더라고. 그러고 보니 나도 일 남겨놓고 왔는데.”
할 일이 밀려 있다는 것을 깨닫자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것을 눈치챈 듯 아펠이 내 팔을 끌고 테이블로 안내했다.
“아직 디저트 못 먹었지?”
“앗, 맞아!”
나는 방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잊고 아펠을 쫄래쫄래 따라가 디저트 앞에 섰다.
이미 몇 번이나 방해를 받았던 터라 나는 아직 디저트를 한 입도 못 먹어본 상태였다.
내가 다섯 살배기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눈앞에 있는 에클레르를 집어 들었다.
아이싱 색깔을 보니 안에는 초콜릿 크림이 들어가 있을 것 같았다.
바삭.
길쭉한 에클레르 페스추리의 한쪽 끝을 베어 물자 잇새를 비집고 선명한 소리가 귀를 두드렸다.
동시에 입술에는 초콜릿 크림의 쫀쫀한 감촉이 느껴졌다.
“으으음……!”
초코 토핑에 초코 크림! 단거에 단거!
오늘 무도회의 초대장을 받고부터 에이미는 내게 디저트 금지령을 선포한 상태였다.
대체 얼마 만에 느끼는 단맛인지, 나는 새삼 감격에 빠져 그 맛을 음미했다.
입안 가득히 퍼지는 풍부하고 진한 초콜릿 크림과 어렴풋이 느껴지는 버터 향, 비단처럼 빛나는 아이싱과 더불어 밤하늘의 별처럼 총총히 박힌 초콜릿 토핑까지.
맛뿐 아니라 씹는 감촉, 냄새, 겉보기까지 무엇 하나 아쉬울 게 없었다.
역시 황궁의 클래스라고 해야 하나, 이 정도면 내 입맛을 길들인 에이미의 디저트랑 비교해도 손색이 없겠는데?
나는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열심히 저작 운동에 집중했다.
나를 바라보는 아펠의 얼굴이 꼭 도토리 먹는 다람쥐라도 보는 듯이 흐뭇한 표정이었지만 그쪽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빠르게 먹지 않으면 안에 들어간 크림을 흘릴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되뇌며 남은 반절의 에클레르도 한입에 넣었다. 역시나 천국의 맛이었다.
에클레르 오 쇼콜라. 초코 크림이 들어간 길쭉한 슈에 초콜릿 토핑을 얹은 디저트.
베이스로는 페스추리의 기본인 파타슈를 사용한다고 했던가…….
“파타슈!”
내가 번뜩 눈을 뜨고 외쳤다.
“아펠, 나 약속이 있어! 일정 바꾼다고 말해야…….”
“진정해, 크레페.”
아펠이 차분하게 말하며 내 입가에 묻은 크림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때, 아펠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금방 갔다 오자.”
“응?”
그러고 아펠은 나를 연회장에서 끌어내더니 그대로 쉬제트가의 저택까지 공간 이동을 시켜주었다.
눈만 깜빡였을 뿐인데 집에 도착한 것을 깨달은 나는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빠들이랑 같이 올걸.
“필요한 거 챙겨와. 기다릴게.”
앞마당 한쪽에 서서 아펠이 말했다.
하지만 황태자, 아니 손님을 밖에 세워두고 싶진 않았기에 나는 그를 내 방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내 방 한가운데에 서 있는 아펠을 보자 곧바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괜한 짓을 했나?
물론 한밤중에 그와 단둘이 있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일단 이곳은 마탑의 숙소가 아니라 진짜 내 방이었고, 둘째로 나도 그도 더 이상 일곱 살이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이제 우리는 사귀는 사이였으니까.
“여기가 네 방이구나.”
“크흠, 미안. 금방 끝날 거야.”
나는 뒤늦게 어색함을 느끼고 헛기침을 하며 필요한 서류를 뭉텅이로 챙기기 시작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일만 하자 풀벌레 소리가 적막을 대신 채워주었다.
불편해하는 게 눈에 보였는지 아펠이 소리를 삼키고 웃었다.
“천천히 해도 괜찮아.”
“으응.”
나는 슬쩍 아펠이 있는 쪽을 곁눈질했다.
내 방에 있는 아펠 슈트루델이라니, 현실감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전혀,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것처럼 서류를 그러모으다가 문득 떠올라 물었다.
“근데 갑자기 약혼이라니, 언제부터 그런 생각 하고 있었어?”
“옛날부터.”
“하지만…….”
반사적으로 말을 멈췄다. 여전히 그의 손목에는 낯선 팔찌가 끼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아펠의 마음이 내게 없음을 지레짐작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게 왜?”
아펠이 제 손목을 매만지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 시선이 그쪽에 멈춘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 아니. 내가 줬던 팔찌는 어쨌나 싶어서.”
대놓고 물어보긴 뭐해서 돌려 말했다.
그러자 내 소심한 질투를 알아챈 듯 아펠이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