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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89)화 (89/181)
  • 89화 

    줄은 점점 짧아져서 이제 곧 나와 크렘의 차례였다.

    평소에 아펠을 볼 때는 그냥 친구랑 노는 기분이었는데, 이런 곳에서 보니 아펠이 꼭 인기 아이돌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럼 이건 팬 미팅인가?

    실없는 생각으로 짧은 웃음을 터뜨린 나는, 얼마나 남았을까 싶어 대기 줄 옆으로 고개를 빼고 아펠을 쳐다보았다.

    진지한 얼굴로 노귀족과 이야기를 나누던 아펠이 날 발견하고 눈웃음을 지었다.

    아, 안녕.

    입 모양으로 인사하고 고개를 까딱해 답해 주자 아펠이 눈을 내리깔고 뭐라 이야기했다.

    입매를 보니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주변의 말소리와 음악 소리 때문에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그때 아펠과 대화 중이던 노귀족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가 크흠, 헛기침을 하고 아펠에게 뭐라 이야기했다.

    아펠이 고개를 저은 것과 동시에 절묘한 타이밍으로 주변의 소리가 조용해졌다.

    그 찰나의 틈을 비집고 귀족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제 혼사 생각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엑.”

    합.

    괴상한 소리를 내버렸다.

    나는 뒤늦게 깨닫고 내 입을 가렸다.

    개구리 소리 비슷하게 들리지 않았으려나? 하고 자기 합리화를 해보았지만, 이미 내가 그 소리의 범인임을 깨달은 사람이 몇 명인가 있었다.

    “어머, 아까 그분인데요?”

    “태자 전하를 막 불렀던?”

    이래서야 크렘이 날 아까 그 자리에서 끌어내 준 의미가 없지 않은가.

    나는 고개를 숙이고 줄 안에 바로 섰다. 앞뒤 사람에게 가려지길 바라고 한 짓이었지만, 내 소극적인 태도가 오히려 그들의 험담을 부추긴 것 같았다.

    “혹시 혼사 이야기를 듣고 그런 걸까요?”

    “저 몸으로요?”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옆에 있던 크렘이 몸으로 나를 가려주려 했다. 그러나 그 시도가 딱히 효과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크레페 니…….”

    “크레페.”

    크렘의 말을 끊고 아펠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펠이 어느덧 내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나는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예를 올렸다.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가 아펠 슈트루델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크레페, 그렇게 부르지 않기로 했잖아.”

    공석에서 듣기에는 격의 없는 말투였다.

    그 호칭에 놀란 내가 토끼 눈을 뜨고 아펠을 쳐다보았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딱히 나와 다른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아펠만은 평온한 얼굴로 노귀족을 돌아보며 다음 말을 이었다.

    “제게는 이미 혼약한 사람이 있으니 걱정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

    이번에야말로 놀라움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허둥지둥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야 황태자씩이나 되니 약혼녀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다가 이렇게 갑자기 폭탄선언을 하다니!

    그런데 어째 아펠과 크렘의 표정이 이상했다.

    내가 뭔가 싶어 그들을 보자 크렘이 속삭였다.

    “크레페 님 얘기잖아요!”

    “…넹?”

    “크레페, 잠깐만.”

    아펠이 나를 발코니로 떠밀었다.

    나는 멍한 얼굴의 귀족들보다도 더 멍청한 얼굴로 아펠과 함께 자리를 비웠다.

    * * *

    몇 년 전에 나는 아펠에게서 머랭이라는 이름의 강아지… 아니, 늑대… 아니, 펜리르를 소개받았다.

    그러고서 학교로 돌아온 나는 슈트루델 제국의 신화를 찾아보다가 그곳에서 펜리르라는 이름을 다시 발견했다.

    슈트루델 신성 제국. 이 나라의 건국 신화에서 등장한 명칭이었다.

    그 전설에 따르면, 과거 어떤 마법사가 늑대 모양의 신수와 함께 슈트루델의 땅을 지나고 있었다고 한다.

    마법사는 서약을 했기에 대를 잇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어느 날 신의 축복을 받은 팔찌를 신수에게 끼우자 그 신수가 아이를 잉태한 사람으로 변했고, 그 아이가 추후 슈트루델을 건국한 초대 황제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보통의 건국 신화나 전설이 그렇듯, 그 이야기도 세세하게 따지고 들자면 태클 걸 만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동물이 어떻게 사람으로 변하냐든가, 그 이전에 잘 갖고 있던 팔찌를 왜 동물에게 끼웠냐든가.

    어쨌든 그 전설의 영향으로 슈트루델 사람들에게 팔찌를 비롯한 장신구는 제법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 시초가 되는 게 방금 건국 신화에 등장한 팔찌, 국보 ‘펜리르의 영혼’이다.

    “이, 이게 그거였다고?”

    나는 그에게서 받은 팔찌를 보며 새삼 입을 뻐끔거렸다.

    비쌀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게 어마어마한 물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아펠은 담담히 얘기했다.

    “알고 있을 줄 알았어. 팔찌에 대한 얘기는 유명하니까.”

    “내가 어떻게 알아! 난 겨우 일곱 살이었는데……!”

    덧붙이자면, 펜리르의 영혼은 당연히 황족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보였다.

    크렘이 이것을 알아보았다면, 약혼 얘기를 듣자마자 ‘크레페 님 얘기잖아요’ 했던 것도 이해가 됐다.

    내가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난 몰랐어. 크렘 님은 사교계가 익숙하니까 알았겠지만.”

    갑작스레 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와서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띵한 머리를 붙잡고 어떻게든 현실감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데 아펠이 조심스럽게 말을 붙여왔다.

    “그래도 내 팔찌 계속 하고 다녔잖아. 나는… 우리가 같은 마음인 줄 알았는데.”

    “아니, 그건…….”

    내가 반사적으로 부정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법을 걸어놔서 하고 다닌 것뿐이었다.

    잠깐만.

    나는 문득 내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 내가 조각해 놨던 마법진이 보였다.

    순간 현기증이 일어 눈앞이 핑 돌았다.

    전설급 국보에 나 좋자고 마법진을 새겨버리다니.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크레페! 괜찮아?”

    아펠이 재빠르게 다가와 내 어깨를 잡아주었다.

    “몸이 안 좋아?”

    “…….”

    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아무런 말 없이 입을 다물자, 아펠이 조용히 손을 들고 내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었다.

    그가 다가온 만큼 나는 턱을 들어야 했다. 나와 비슷했던 눈높이가 어느덧 이렇게 달라져 있다니, 새삼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전 혼사 어쩌구를 듣고 이상하게 반응했던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나 나나 아직 그런 고민을 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허구한 날 나를 애 취급 하는 갈레트가 옆에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오늘 예쁘게 하고 왔구나.”

    나직한 목소리로 아펠이 입을 열었다.

    사람 낯부끄럽게 하는 달달한 말이나 나를 꿰뚫어보는 듯한 선명한 청안, 겨울 숲처럼 청량한 공기 속에 어렴풋이 느껴지는 꽃향기.

    아주 어릴 때부터 변하지 않은, 아펠만의 고요한 분위기가 주변을 감쌌다.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럴 때마다 스스로를 얼마나 다잡아야 했던가. 원래 이런 성격이겠지, 오해겠지, 내 착각이겠지, 그렇게.

    그런데 이제 와서 고백, 아니 청혼이라니.

    이 상황이 기가 막히면서도 허탈했다.

    내가 김샌 미소를 지으며 장난기 섞인 투로 대꾸했다.

    “다이어트만 조금 하면 완벽하겠지?”

    “왜 그런 말을 해?”

    “응?”

    “예뻐서 예쁘다고 한 건데.”

    “…….”

    음, 역시 아직 익숙해지려면 멀었구나.

    딱히 빈말 같아 보이지도 않는 담담한 반응에 나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펠이 허리를 숙여 나를 마주 보려 했다.

    “내가 싫어?”

    “싫다기보단…….”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다.

    어릴 때부터 나는 그의 행동에 마음 설렜고, 내심 기대한 적도 있었다.

    한편으론 운명적이고 한편으론 운명을 거스르는, 그와의 행복한 연애를 말이다.

    “크레페?”

    귓가에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잊고 있던 두근거림에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내가 눈을 꽉 감고 말했다.

    “조, 좋아하지만!”

    “그럼…….”

    아펠이 부드러운 손길로 내 뺨을 감쌌다.

    키스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에 당황한 내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하,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잖아. 이런 건 사귀고 나서 천천히 생각해야지!”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내 뺨을 감쌌던 그의 손이 떨어졌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펠이 상처받은 표정이라도 하고 있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행히 그는 생각에 잠겨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러네. 그 말도 맞는 것 같아. 팔찌를 줬을 때 설명 안 한 내 잘못도 있고.”

    다행이다.

    어떻게든 납득시킨 것 같아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순간, 아펠이 말을 이었다.

    “그럼 사귀자.”

    “…….”

    자충수란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 별궁에서 】

    아펠이 내 손을 잡고 회장으로 돌아갔다.

    음악은 멈춘 지 오래였고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실제보다 크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부채를 하나 챙겨올 걸 그랬구나. 내 얼굴이라도 가리게.

    여전히 약한 무대 공포증을 가지고 있던 나는 그들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 보지 못하고 호떡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아펠의 뒤에 숨기려 했다.

    수군거리던 귀족들 중 한 명이 대표로 나서 물었다.

    “전하, 혼약을 하셨다는 게 정말입니까?”

    아펠이 점잖게 대답했다.

    “동의만 얻는다면 그렇게 되겠지요.”

    내 긍정만 들으면 곧바로 혼례를 올릴 듯한 태도였다.

    주변 귀족들이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방향에 갈레트와 카눌레, 에클레어와 젤라토 등등이 와 있는 걸 발견했다.

    “크, 크…….”

    갈레트가 내 이름 석 자도 부르지 못하고 턱을 떨었다.

    카눌레가 짝다리를 짚고 중얼거렸다.

    “내 언젠간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알았으면 네가 말렸어야 할 거 아냐아아!”

    갑자기 갈레트가 카눌레의 멱살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끄응… 이번만큼은 갈레트를 볼 면목이 없구나.

    연회 첫날은 폭탄 발언만 남기고 마무리됐다.

    희망자는 다음 날 연회에도 참석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모두 일이 바빠 귀가를 선택했다.

    영지가 멀리 있는 에클레어와 젤라토가 먼저 돌아갔고, 크바스는 그들을 배웅한 뒤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우리 가족과 크렘만 남은 자리에서 크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튼 약혼… 아니, 교제 발표 축하드립니다.”

    “네? 아, 가,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크렘이 연달아 물었다.

    무슨 말인가 싶어 그를 올려다보자니 뒤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파트너로 온 분은 버려두고 태자 전하와 교제 발표라니…….”

    크렘도 사교계에선 갈레트나 카눌레 못지않게 유명해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 같았다.

    크렘도 그 수군거림을 눈치채고 그들 들으라는 듯 헛기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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