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반가운 소식이군요.”
에클레어가 부채를 팔락이며 입가를 가렸다.
갈레트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을 보는 나도 흐뭇하게 웃었다.
귀족의 품격이 느껴져야 하는 현장이었으나, 내가 보기엔 무도회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들처럼 귀엽게만 보였으니까.
“파트너 없이 오셨죠? 갈레트 님을 노리는 여성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
“저는 마탑이 개방되는 대로 마법 서약을 할 계획이라서요.”
“아아, 몽블랑 후작님께서 하셨다는…….”
에클레어도 들은 바가 있던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 서약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마법 연구만 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이었다. 몽블랑과 키슈가 했다던 그것.
그래도 이왕이면 갈레트가 결혼해서 토끼 같은 아이들 낳고 제 삶을 꾸리길 바랐던 마음이 있었기에 조금 씁쓸해졌다.
“크레페? 몽블랑 님 얘기가 나와서 그래?”
내 안색이 조금 어두워진 것을 눈치채고 갈레트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안 그래도 몽블랑 님이 너한테 안부 전해달라고 하셨어. 여전히 맘에 들진 않지만, 너도 이제 눈뜬 것 같으니까, 뭐.”
“응? 아, 아니, 별로…….”
나는 그의 반응에 조금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몽블랑 후작님 얘기가 왜요?”
에클레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는 그리 반갑지 않은 얘기가 나올 것 같았기에 나는 한 차례 도리질을 치고 대신 답했다.
“아무것도 아냐.”
그러고서 나는 눈앞의 크로캉부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불쑥 튀어나온 다른 손이 또다시 내 디저트 타임을 방해했다.
이번 방해꾼은 카눌레였다.
“어떻게 아무도 날 못 본 체하고……!”
“그러니까 너도 진작 익숙해졌어야지.”
갈레트가 얄밉게 웃었다.
아니, 그런 건 상관없으니 나도 디저트 좀…….
카눌레에게 잡힌 오른손 대신 왼손을 뻗은 그때였다. 에클레어가 내 왼쪽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크레페에~ 저번에 나랑 약속했잖아, 다이어트하겠다고!”
“…….”
몇 개월 전 얘기를 기억하고 있다니.
“하하, 크레페가 그런 걸 왜 해요?”
갈레트가 여유롭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에클레어가 대답 대신 눈빛으로 갈레트의 눈빛을 맞받아쳤다.
분명 둘 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분위기는 살벌했다.
거기에 카눌레가 한마디 했다.
“할 때 됐지.”
상황은 기묘한 대치 국면에 접어들었다.
왼손엔 에클레어, 오른손엔 카눌레, 눈앞에는 갈레트. 순간 이쪽만 딴 세상이 된 것 같은 괴리감이 느껴졌다.
…저기, 이게 그렇게 긴장감 넘칠 일이야?
분위기가 더 이상해지기 전에 내가 말을 돌렸다.
“언니는 누구랑 왔어?”
“너는? 또 그 자작가 나부랭이랑 왔지?”
“언니!”
내가 난색을 표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크렘은 그 말을 못 들은 듯,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홀을 누비고 있었다.
“에클레어?”
그때 누군가 에클레어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그 또한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훌쩍 큰 키에 유순한 눈매, 사락거리는 분홍색 머리카락. 빨간색 자수가 놓아진 흰색 크라바트를 목에 맨 젤라토였다.
“젤라토 형도 왔구나!”
갈레트가 예를 차리는 것도 잊고 환히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만큼 더욱 반가운 모양이었다.
젤라토는 일찍이 학교를 졸업하고 바니유 공작령으로 돌아갔다.
영지 관리를 돕고 있다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다른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나처럼 영지 관리를 하느라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잘 안 나는 듯했다.
“다들 여기 있었구나! 세상에, 정말 오랜만이다. 특히 갈레트는…….”
“나는 오빠랑 왔어.”
에클레어가 늦은 대답을 하며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나도 더 늦기 전에 그에게 인사했다. 이렇게 보니 내가 알던 또래 사람들이 거의 다 모인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
파타슈도 여기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새삼 감상에 젖어있는 내 귀로 카눌레의 한마디가 파고들었다.
“크바스 형이 없네.”
아, 그러고 보니 덩치도 있었지.
뒤늦게 떠올리고 머리를 긁적였다. 잊고 있던 게 딱히 미안하진 않았다.
“하하, 곧 볼 수 있겠지. 그 녀석은 황실 기사단의 일원이고, 오늘은 아펠 슈트루델 전하께서 주최하신 연회일이니까.”
“그러고 보니 아… 아니, 플럼은 언제 온대?”
내가 아펠이라고 말할 뻔한 것을 고쳐 말했다. 카눌레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놈이 여길 왜 와?”
“플럼? 그게 누군데?”
“있어요. 어디 박힌지도 모르는 영지에 사는 놈.”
카눌레가 젤라토에게 톡톡거리며 대꾸했다.
아무래도 지난번 내 생일 때 아펠이 제 대련 신청을 안 받아준 것 때문에 여태 삐쳐 있는 모양이었다.
그 사이에 갈레트가 목소리를 낮춰 내게 대답해 주었다.
“이제 곧 오실 거야.”
“아펠 슈트루델 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때마침 시종의 우렁찬 외침이 메인 홀을 가득 채웠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문을 향해 서서 고개를 숙였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발걸음 소리만 들려왔다.
내 옆에 있던 카눌레가 이 분위기에 좀이 쑤시는 듯 슬쩍 눈을 치켜뜨고 곁눈질하는 것이 보였다.
“어?”
적막을 뚫고 카눌레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저놈이 여길 왜 왔어? 야, 태자 전하는?”
“…….”
* * *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던 아펠의 입장 시간이 끝나고, 나는 일행과 함께 파티장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물론 카눌레가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조금이라도 방지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지.”
에클레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작위는 없어도 공작가의 영애라는 지위가 있던 덕분에 아펠 슈트루델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아펠이 가명을 쓰고 있으니 굳이 아는 척하지 않았던 거겠지.
딱히 이 사달에 대해 그녀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갈레트 역시 아펠의 태자 즉위식 때부터 그와는 면식이 있었고, 카눌레에게 플럼 얘기를 일러주지 않은 건 나나 갈레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거, 걱정하지 마. 오빠한테 직접 뭐라 하진 않을 테니까.”
아펠 주변 귀족들은 뭐라 하겠지만.
나는 뒷말을 삼키고 카눌레에게 사정을 마저 설명해 주었다.
지금까지 플럼에게 막말을 했던 카눌레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제국 기사단에 들어가긴 글렀군.”
그의 나지막한 말을 듣고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제국 기사단뿐이겠냐? 넌 이제 황실 기사단에도 못 들어올걸!”
그때 불청객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커스터드 귀족 학교를 졸업한 직후 황실 기사단 입단이라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고 있는 오크로시카 후작가의 영식, 크바스였다.
“크바스!”
그와 오랜 친구였던 젤라토가 화색을 띠었다.
“오, 젤라토? 네가 여기까지 오다니, 별일이네. 안 바빠?”
“모처럼 시간을 냈지.”
“…음, 오랜만.”
갈레트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짧게 인사했다.
크바스가 피식 웃으며 갈레트의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추측하건대 원수 이상, 친구 미만의 관계인 것 같았다.
“오랜만!”
“오랜만이야.”
나와 에클레어도 갈레트를 따라 인사했다.
크바스가 가볍게 인사를 받고 카눌레를 향해 능글맞은 투로 말했다.
“카눌레가 이번에 꽤 큰 사고를 친 것 같던데.”
카눌레는 기다리던 크바스의 등장에도 환히 웃지 못하고 심각한 얼굴이었다.
내가 끼어들어 물었다.
“근데 여기서 우리랑 얘기하고 있어도 괜찮아요? 초대받은 거 아니죠?”
“어쭈, 내가 초대받았을 리 없다는 뜻이냐?”
“크흠.”
“크바스.”
갈레트가 헛기침한 것과 동시에 젤라토가 크바스를 중재시켰다.
크바스가 그 둘을 번갈아 보고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투닥거리며 놀 상황이 아니라는 걸 떠올린 모양이었다.
“뭐, 내가 커스터드를 졸업했다는 건 다들 아니까. 너희가 온다고 하니 단장님이 신경 써주셨지.”
나는 역시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크바스는 예복이 아니라 경갑을 입고 있었다. 근위대이자 호위기사 자격으로 이곳에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크바스가 카눌레를 향해 마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카눌레, 너 황실 기사단의 제의를 고사했다는 게 진짜냐? 왜, 내 후임이 되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거 아니거든? 변방에 나가고 싶어서 제국 기사단에 들어가려고 한 거야. 근데…….”
카눌레가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황실 기사단과 제국 기사단은 둘 다 슈트루델 제국군 소속이었지만 황실 기사단은 황족의 호위를, 제국 기사단은 변방의 몬스터 처리 임무를 주로 맡는다는 게 차이점이었다.
그리고 그가 낙방한 곳은 제국 기사단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였지만, 변방의 임무가 워낙 위험해 보통은 기사 경력이 몇 년 정도 쌓여야 제국 기사단에 지원한다고 했다.
“망했네.”
내 옆에 있던 에클레어가 짧게 평했다.
카눌레는 화도 내지 못했다.
슈트루델 제국 직속 기사 지망생이 지고하신 황족에게 이놈 저놈을 해버렸으니.
“그래도 기사는 실력이 제일 중요하니까…….”
“마, 맞아! 아펠은 이해해 줄 거야.”
젤라토가 카눌레를 달래려고 하기에 나도 옆에서 거들었다.
순간 주변의 시선이 내게 몰렸다.
우리 일행뿐 아니라, 이름 모를 귀족들까지.
…아차.
“방금 전하의 이름을 그냥 부르지 않았어요?”
“이런 곳에서 예법도 안 차리고 떠들어대더니만.”
“세상에, 추잡스럽군.”
아차 해봤자 때는 늦어 있었다. 싸한 적막이 감돈 것도 잠시, 곧 주변이 수군거림으로 가득 찼다.
“미, 미안. 나 잠깐 나가 있을…….”
친구들에게까지 피해를 준 것 같아서 나는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런데 에클레어가 나를 붙잡았다.
“크레페, 잠깐만. 너 혹시…….”
그때였다. 우리 일행에게서 떨어져 외따로 있던 크렘이 불쑥 나타나 내 팔을 잡아끌었다.
“크레페 님! 아니, 레이디. 잠시 이야기 좀 하실까요?”
“무,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어요?”
영문 모를 상황에 당황한 건 나였다.
크렘은 나를 데리고 길게 늘어선 줄 끝에 섰다.
무슨 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이게 크렘의 용건이었던 것 같았다.
“아뇨. 음, 태자 전하께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파트너 없이 혼자 인사드리기는 민망하니까요.”
“아…….”
나는 이 줄의 정체를 깨닫고 뒤늦게 줄의 맨 앞을 확인해 보았다. 아펠이 대기한 사람들 하나하나와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줄의 길이를 봐도 그렇고, 여간 바빠 보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 대기 줄이라면 이따 왔어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크렘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크렘이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치맛자락을 살며시 들며 무릎을 굽혔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렘 님.”
“…별말씀을요.”
크렘이 이유도 묻지 않고 웃었다. 왜 인기가 많은지 알 것 같은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