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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87)화 (87/181)

87화 

몇 사람들은 크렘의 얼굴을 알아보고 반가움을 표시했고, 내게는 경계와 호기심의 눈빛을 보냈다.

물론 의외라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성인이 된 후 내가 주로 하고 있는 것은 쉬제트 영지의 관리였다.

아직 정식으로 영주 위를 받지는 않았지만 첫째인 갈레트는 마법 쪽 일, 둘째인 카눌레는 기사 쪽 일을 하느라 자연히 내 몫이 된 것이다.

하지만 영지 관리는 내 생각보다도 번거롭고 어려운 일이었다.

에이미의 도움을 받아도 여분의 시간을 내기 힘들어서, 나는 사교계에 거의 얼굴을 비추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원작에서와 달리 입소문을 탈 만한 미모도 아니었다.

당연히 자기소개를 하지 않은 나를 알아볼 사람은 없는 게 정상이었다.

아마 지금 이들이 나를 경계하는 이유도, 내가 갑작스레 사교계의 유명인을 파트너로 삼아 왔기 때문이겠지.

어쩌면 ‘여자가 돈이 많나 봐’ 하는 식의 불유쾌한 이미지가 따라올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게는 그 시선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보다 내 신경을 잡아끄는 건 따로 있었으니까.

휘황찬란한 마법등, 빛나는 도료로 그려진 화려한 천장화, 그 밑에 줄지어 있는 크로캉부슈, 쇼트케이크, 스콘과 쿠키, 비스킷!

당장 내 눈에 보이는 것들만 해도 이 정도였다.

나는 홀린 사람처럼 걸음을 옮겨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크레페!”

“헉, 아, 아무것도 아니… 응?”

나는 밤중에 몰래 부엌에 들어와 김치찌개의 돼지고기를 건져 먹으려다 걸린 사람처럼 놀랐다.

그리고 뒤늦게 그 목소리가 카눌레의 것이었음을 깨닫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카눌레가 ‘야’도 ‘너’도 안 붙인 내 이름을 부르다니, 별일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의 얼굴을 발견한 나는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낯선 사람이라면 질색하는 카눌레가 여러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니까.

그 커스터드 귀족 학교를 졸업하고 검술 대회 우승도 여러 번 한 기사 유망주가 황실 기사단의 입단 제의를 거절하고서 황궁 파티에 참석하다니.

게다가 동행한 파트너도 없이!

눈에 띄기 싫어하던 사람이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지금 보니 카눌레는 이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자신을 제 기사단에 영입하고 싶어 하는 이들과 제게 말을 붙여보려는 이들 사이에서 당황해하고 있었다.

카눌레가 눈짓으로 내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크렘을 막대한 죗값이라고 생각해, 오빠.

“크흠.”

그때 크렘이 헛기침을 했다.

나는 내가 디저트에 홀려 파트너의 에스코트까지 뿌리쳤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미안한 마음 반, 민망한 마음 반으로 크렘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크렘은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일찌감치 도착한 갈레트가 여유 있는 모습으로 주변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서 있었다.

크렘이 카눌레와 갈레트를 번갈아 보더니 내 눈치를 보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럼 저는 마실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레이디.”

“예에… 그러세요.”

한쪽은 레이디로 대하라고 하고, 다른 한쪽은 닭살 돋는 짓 하지 말라고 하고.

오빠들 등쌀에 시달릴 크렘의 고충이 빤히 보였기에 나는 그를 얌전히 보내주기로 했다.

크렘이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듯 눈짓을 하고 멀어졌다.

“크레페, 도착했구나.”

그가 자리를 피한 사이, 갈레트가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평상시보다 품격 있는 말투였다. 아무래도 보는 눈이 있으니 예의를 차리려는 듯했다.

갈레트가 집을 비웠다고 해도 최근 며칠의 이야기였다.

당연히 그동안 그의 신변에 별일이 생겼을 리가 없지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버릇처럼 그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카눌레의 옷이 제복 같았다면 갈레트의 옷은 예복 같았다.

카눌레와는 다른 의미로 딱딱해 보이는 차림새였다.

보는 사람이 답답해질 만한 긴 옷자락이나 심플한 단추, 목을 가리는 옷깃까지.

마탑에 다녀온 뒤부터 항상 하고 다니는 왼쪽 귀의 보석 귀걸이가 아니었다면 초대객이 아니라 예식을 돕기 위해 온 성직자로 오인당할 만한 수준이었다.

아마 피오르의 조수 일을 하다가 왔기 때문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피오르의 패션 센스가 전염됐을까 걱정도 됐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마음을 티 내는 대신 방긋 웃으며 화답해 주었다.

“빨리 오셨네요?”

그러자 갈레트가 갑자기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존댓말이라니! 어른이라니! 우리 크레페가!”

“…….”

여기서 이러면 곤란하다…….

다른 귀족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건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커스터드 귀족 학교를 그만두고 마탑에 들어간 최초의 인물이자, 공식적으로 기록된 최연소 마법사인 동시에 피오르의 애제자.

타국의 귀족도 참석한 권위 있는 자리에서 무슨 짓이야!

나는 민망한 마음에 후다닥 그를 밀어냈다.

“크레페?”

하지만 갈레트는 주변 시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평소 같은 말투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여기서 우는 것 같진 않으니 다행이라고 하자.

다분히 정신 승리적인 생각을 마치고 나는 헛기침을 했다.

“뭐… 피오르 선생님은 어디 계셔?”

어차피 나 혼자만 예의 차려봤자 갈레트의 대응이 똑같으면 의미 없을 테고, 더 말씨름을 하다가 시선을 모으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 도로 반말을 쓰기로 했다.

다행히 갈레트도 이제 평범하게 답해 주었다.

“못 오셨어. 키슈 님이랑 같이 마탑 재개방 건의를 준비하시느라 바쁘거든. 그래서 나한테 공방 일을 도와달라고 하신 거고.”

“그렇구나.”

마탑이 폐쇄된 후 피오르는 공방을 차려 소수의 고위 귀족들을 위한 마법 물품 주문 제작하는 일을 시작했고, 키슈네는 몽블랑의 자금 지원을 받아 브라우니를 비롯한 신수를 연구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갈레트는 이번처럼 종종 그들을 돕고 그에 대한 보수를 받곤 했다.

전 같으면 갈레트도 마탑의 마법사로서 국가 공무원 내지는 연구원직을 수행 중이라 할 수 있었겠지만, 마탑이 폐쇄된 지금은 그냥 아르바이트생일 뿐이다.

끄응, 고학력 백수라는 사회 문제를 이런 식으로 경험하게 될 줄이야.

“디저트 먹으러 온 거지?”

갈레트가 자연스럽게 말하며 나를 디저트 앞으로 안내하려던 차였다. 누군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섰다.

“공방이라면 피오르 님의 공방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주 유명하던데. 다음엔 저도 의뢰를 할까 생각 중이었거든요.”

“에클레어 언니!”

그녀 역시 반가운 얼굴이었다. 몇 개월 전 있던 내 생일 이후로는 못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편한 걸 못 견뎌하는 나를 위해, 에이미가 준비해 준 드레스에는 화려한 장식이 거의 없었다.

흰색에 가까운 드레스에는 큼지막한 자수가 놓여 있었지만 재료가 은실이라 눈에 띄지 않았고, 레이스를 여러 겹 덮어 부풀린 치맛자락은 멀리서 보면 레이스인 줄도 모를 정도였으며 보석의 색깔도 투명했다.

연보라색과 파란색으로 매듭을 지은 벨트와 머리 장식이 그나마 눈에 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세히 뜯어보면 화려하기 그지없는 차림새였겠지만, 아무튼 딱 보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에클레어의 차림새는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호화로웠다.

에메랄드를 금으로 감싸 만든 귀걸이, 은백색의 백금과 검은 머리카락을 교차로 엮어 장식한 머리, 프릴과 프릴과 프릴이 붙은 드레스까지.

그런 화려함은 도도한 인상의 에클레어에게 짜 맞춘 듯이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었다.

내가 저런 옷을 입으면 풍선껌처럼 보일 텐데 말이야.

“언니는 기사단에 들어간 거야?”

“아니, 아직 알아보는 중.”

에클레어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학교를 졸업하니까 전처럼 자주 보기 힘들구나. 자기 앞가림하느라 바쁜 걸 보면 잘 컸구나 싶어 대견하기도 하고…….

어쩐지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뭐야, 그 표정은?”

에클레어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손에 든 부채를 접고 그걸로 날 가리켰다.

가만히 있다간 부채로 내 배를 콕 찌를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친구들만 있었던 내 생일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내가 급하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흐흠, 내가 뭘? 그냥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서 그러지.”

에클레어가 피식 웃으며 다시 부채를 펼쳤다.

그 손동작에서마저 귀족다운 우아함이 느껴져 나는 순간 원작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에클레르 오 바니유.

내가 느낀 그녀의 첫인상은, 말하자면 늪지대에 서식하는 표범을 볼 때와 같았다.

한 발만 헛디뎌도 바닥 없는 늪에 빠져버릴 것 같은 위태로움과 생존을 위한 표독스러움이 그녀에게선 동시에 느껴졌다.

그러나 만일 늪에 가라앉는 날이 오더라도 표범은 울부짖지 않을 것이다.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조용히 눈감을 것 같은, 그녀의 곧은 눈빛에는 그런 고고함과 자존심이 묻어있었다.]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 크레페와 에클레어는 사교계의 유명인이었다.

그러나 그 둘의 유명세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크레페가 미모로 인해 ‘자연히’ 유명해진 것과 달리, 그녀의 유명세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펠의 아내, 즉 태자비 자리를 노리기 위함이었다.

에클레어가 사교계에 진출한 것, 무도회를 개최한 것, 크레페를 견제한 것도 전부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녀의 모든 행적은 권력을 위해 계산된 것들이었고, 자신을 제치고 아펠의 약혼녀 자리를 꿰찬 크레페에게 선명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랬던 에클레어가 지금은 혼담까지 고사하고 기사 작위를 받았다니.

이건 다른 의미의 감동이었다.

현 슈트루델 제국에서는 무관보다 문관이 더 높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처럼 공작가 씩이나 되는 사람이 기사단에 들어가겠다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제 에클레어는 원작과 다른 이유로 유명인이 된 셈이다.

어쩌면 이것도 내가 그녀의 운명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내가 반사적으로 눈을 돌려 크렘을 찾았다.

그러나 크렘은 에클레어에게 전혀 관심도 없는 듯 주변에 모인 귀족들과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평행 세계의 아내가 기사단에 들어가든 말든 관심도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래,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어때요? 물품 의뢰는 받고 계신가요?”

에클레어가 갈레트에게 다시 물었다.

내 친구인 에클레어와 내 오빠인 갈레트는 물론 구면이었다.

물론 그리 많은 대화를 나눌 기회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때문에 갈레트도 그녀에게 존대로 답했다.

“스승님께서도 공방 일은 임시로 생각하고 계시던 터라 의뢰를 얼마나 받으실지 모르겠네요. 물론 바니유 영애께서 주문하신다면 거절하실 것 같진 않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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