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86)화 (86/181)

86화 

“끄응…….”

뭐라고 말해도 귓등으로 듣겠지.

이미 경험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에이미의 팔꿈치에 찔린 옆구리를 감싸고 못 들은 척 방을 나갔다.

카눌레가 말했던 ‘손님’은 메인 홀 옆에 이어진 손님용 접대실에 있었다.

내가 문을 열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멋들어진 동작으로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제게 레이디를 에스코트할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그만! 그런 거 안 하기로 했잖아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몽실몽실한 크림색 머리칼의 남자가 허리를 펴고 웃었다. 크렘이었다.

무도회에 참석한다는 목적에 걸맞은 화려한 푸른색의 의상과 금실로 놓인 자수, 큼지막한 보석이 박힌 반지로 치장된 손가락과 프릴이 달린 소맷자락.

그런 차림새를 빼면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순하고 부드러운 외모에 유한 말투를 쓰는, 귀공자다운 이미지 말이다.

굳이 달라진 것을 꼽자면, 더 이상 눈 색을 숨기는 반지를 쓰지 않는다는 것뿐일까?

덕분에 지금 그는 빨간색 눈이었다. 카눌레의 눈보다 채도가 높고 선명한 산딸기색.

기사 수련회 때의 소동으로 눈 색을 숨기는 걸 포기한 모양이었는데, 나도 이제 원작에서 나왔던 크렘의 묘사보다 지금의 모습이 훨씬 익숙하게 보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름다우신 레이디를 모시는 데 이 정도 예의는 갖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오늘 참석하는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무뢰한이 되고 싶지는 않아서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조금 곤란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러니까 에이미가 남자 친구라고 오해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내심 불만을 숨기고 겉으로는 해사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오랜만이네요, 크렘 님. 소문은 잘 듣고 있어요. 지난번엔 세렝기 자작의 연회에 참석했다가 치정 싸움에 휘말려 결투를 했다지요? 결과는 어땠나요?”

“…크레페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크렘이 민망해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진작 그럴 것이지.

크렘은 졸업하자마자 기사 작위를 받고, 이후로는 이곳저곳의 무도회장에 얼굴을 비추며 바쁘게 지내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크렘에 대한 소문도 자연스레 흘러들어 오곤 했는데, 참고로 말하자면 그 결투의 결과는 승리가 아니었다.

“하하, 크렘 님은 여전하시네요.”

“크레페 님도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됐거든요.”

단박에 말을 자르자 크렘이 어색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부정하지도 않는 걸 보니 역시 예의상 한 말이었구나.

그의 반응에 덩달아 민망해진 내가 접대실을 나가려 등을 돌렸다.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저를 에스코트 상대로 삼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으로요.”

물론 내가 크렘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내가 그와 친해지고 싶어 했던 이유는 그의 배경에 있었기에 저런 반응은 낯부끄러울 뿐이었다.

“뭘요.”

나는 웃는 얼굴로 그렇게만 대답했다.

접대실을 나가자 준비를 마친 카눌레도 위층에서 내려왔다.

일직선으로 주름을 잡은 타이트한 바지와 단단해 보이는 신발, 흰 장갑과 각 잡힌 어깨선은 모두 그의 옷이 기사 제복을 베이스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파티용 옷인 만큼 소매 끝이나 칼라에는 레이스가 보였다.

장성한 청년이 된 그를 보니 파티에서 반바지를 입었다고 ‘어린애처럼 보이지 않느냐’며 걱정했던 카눌레의 옛 모습이 떠올라 잠시 웃음이 나왔다.

물론 아무리 듬직해 보인다고 해도 그가 취업에 실패한 백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이럴 때만 오지? 바람둥이 녀석.”

카눌레가 크렘을 보자마자 날 선 말을 했다.

“…….”

방문객인 크렘은 차마 맞받아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그를 대신해 나섰다.

“오빠가 입단 시험 떨어졌다고 다른 사람한테 화풀이하면 안 돼.”

“아, 아아. 그런 거라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눌레 님의 실력은 사교계에서도 유명하니까요. 황실 기사단에서 입단 제의도 받으셨다면서요. 변방의 제국 기사단에 지원하기 위해 그 제의를 굳이 고사하셨다고 들었는데…….”

“저 나불이, 어떻게 좀 안 되냐?”

“…….”

크렘이 재차 입을 다물었다.

나는 분위기를 중재시키려 헛기침을 하고 점잖게 말했다.

“오라버니, 손님께 폐가 됩니다.”

“…….”

카눌레가 질색하는 눈으로 나를 보더니 홱 몸을 돌려 집을 나갔다.

어른스런 대응에 마치 알레르기라도 있는 듯한 반응이었다.

나도 조금 낯부끄럽긴 하지만, 카눌레를 조용히 시키는 데는 쓸 만하니까.

상황을 일단락시킨 내가 크렘에게 대신 사과했다.

“죄송해요. 카눌레 오빠가 좀 날카로워져 있는 것 같아요. 원래 큰 파티를 부담스러워하거든요.”

수능 망친 재수생이 명절을 싫어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겠지.

크렘이 이해하지 못할 뒷말은 생략했다.

“괜찮습니다. 변변한 작위도 없는 사람이 막냇동생을 에스코트한다고 하면 언짢을 만도 하죠.”

카눌레가 그런 생각을 했을 리가 없지만, 굳이 부정하고 나서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서 그냥 침묵했다.

크렘은 말을 마치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 주변의 인기척을 살피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갈레트 님은 안 계십니까?”

“오빠요? 오늘은 피오르 님의 저택에서 출발한다던데… 무슨 일 있나요?”

크렘과 갈레트는 파티 때 몇 번 마주친 것을 빼면 서로 얼굴을 본 적도 없었기에, 내게는 그가 갈레트를 신경 쓰는 게 의외라고 느껴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크렘의 대답을 듣고, 나는 그에게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에 크레페 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 소리 들었거든요. 레이디라고 부르라고.”

“…크레페 님이면 충분해요.”

오빠들 사이에서 크렘도 마음고생이 많았겠구나.

한숨을 내쉬자 크렘이 신경 쓰게 해서 면목 없다며 사과하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를 문밖으로 에스코트하려는 모양이었다.

조금 간지럽긴 했지만 그를 민망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얌전히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저택을 나가려던 순간, 문득 고개를 돌리자 벽 뒤에 숨어 있던 에이미가 내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집안 사람들 하나같이 뭔가 이상해.

크렘은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긴장하고 있었다.

파티라면 이골이 났을 그가 긴장할 정도라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새삼 통감하게 만드는 반응이었다.

내 파트너 자격이 아니었다면 자작가의 크렘은 참석도 하지 못했을 자리.

바로 아펠 슈트루델 태자의 스무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였다.

이제 몇 달 차이로 아펠의 누나 노릇을 하던 것도 끝이겠구나. 언제까지나 꼬마일 줄 알았는데.

오빠나 친구들의 성인식에 참석할 때보다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심지어는 몇 달 전에 있었던 내 스무 번째 생일에도 이 정도 느낌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물론 갈레트는 그때도 펑펑 울었지만.

“후우, 플럼이 아니라 아펠을 본다고 생각하니 조금 긴장되네요.”

괜히 엉덩이를 들썩이며 말을 걸었다. 그러자 몸을 굳히고 있던 크렘이 화들짝 놀랐다가 대답했다.

“아, 그렇군요. 플럼 바클라와라면 크레페 님의 성인식 때도 참석했었죠?”

“크렘 님도 그때 계셨었잖아요.”

남 얘기처럼 말하는 게 우스워서 말꼬리를 잡았다.

크렘이 멋쩍게 말했다.

“저야 긴장해서 말 한마디도 못 걸었는걸요.”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끝을 흐렸지만 사실은 나도 그의 긴장이 단번에 풀릴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크렘은 처음부터 플럼과 아펠이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뭣도 모르고 지금까지 아펠을 향해 이놈 저놈 하고 있는 카눌레와는 달랐다.

그러고 보니 아빠가 카눌레의 이 행태를 알았다면 진작 쇼크로 쓰러졌을지도 모르겠네.

나는 내 성인식에 찾아와 정식으로 선물까지 주고 갔던 아펠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수련회에서 그와 재회한 게 몇 년 만이었던 것과 달리, 그 이후로 아펠을 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아펠이 아니라 플럼으로서 함께한 자리였으나 만난 빈도를 보면 황태자로서의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된 듯했다.

오히려 졸업 이후로는 내가 더 바빴지.

마탑을 나온 갈레트는 피오르의 비공식 조수 생활을, 기사 시험에서 떨어진 카눌레는 두문불출 개인 훈련만 반복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반백수 오빠 둘을 먹여 살리는 소녀 가장이 된 셈이었다.

이번만 해도, 오늘 시간을 내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미리 처리해 놔야 했는지…….

“저, 지금까지는 물을 타이밍이 없어 가만히 있었습니다만, 역시 두 분은…….”

“네?”

딴생각에 빠져 있느라 나는 그 작은 목소리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한 거냐고 다시 물으려던 찰나에 마차가 멈췄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마르크가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어릴 때에는 오빠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기사단의 막내였던 그도 이제 삼십이 넘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내년에 동생이 성인식을 하고 나면 1기사단 시험을 봐서 변방으로 지원을 나가는 게 목표라던데, 기사 단장님은 마르크를 2기사단의 차기 단장으로 점찍어 놓고 있었기에 최근엔 둘이 연일 기 싸움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내가 짧게 인사했다.

예법에 한 치도 맞지 않는 인사였지만 마르크는 밝은 미소로 답해 주었다.

나와 크렘이 내리자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파티가 열리는 메인 홀로 들어서기 전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마르크가 먼저 대답해 주었다.

“카눌레 님께선 먼저 들어가셨습니다.”

“아, 네에.”

그래, 오빠가 날 기다려줄 리가 없지.

나는 가볍게 혀를 차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앞머리를 털고 드레스를 아래로 잡아당겨 허리선을 맞추고 괜히 배에 힘을 줬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크렘이 나를 향해 어설프게 웃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파트너 앞에서 너무 털털했나.

“시, 실례했습니다.”

뒤늦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 반응에 잠깐 숨죽여 웃은 크렘이 손을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들어가실까요?”

황궁의 시종이 거대한 문을 열었다. 어찌나 능숙한지 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소리가 났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사람들의 시선은 새로운 방문객인 우리에게 향해 있었다.

나는 치맛자락을 들어 예를 갖추고 크렘과 함께 파티장으로 들어섰다.

“어머, 크렘 님.”

파티에 초대된 것은 크렘이 아니라 나였지만 정작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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