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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85)화 (85/181)

85화 

“뭐야? 왜 혼자 와? 플럼은?”

에클레어가 나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겠대. 배웅하고 왔어.”

“아, 진짜? 나도 싸워보고 싶었는데!”

에클레어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펄쩍 뛰었다.

어린애 상대로 어쩌고 하며 카눌레에게 뭐라 하더니, 둘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생각을 바꾼 모양이었다.

나는 아이 같은 에클레어의 투정을 보며 웃다가 문득 카눌레 쪽을 쳐다보았다.

그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뭔가 생각에 잠겨있는 듯 말이 없었다.

이겨놓고도 별로 좋아하는 기색이 없는 게 이상해서 내가 말을 걸었다.

“왜 그래?”

“아니… 플럼 그놈, 일부러 진 것 같았는데.”

“설마! 다치기까지 했잖아.”

내가 곧바로 반박했다. 하지만 카눌레는 여전히 개운치 않은 표정이었다.

“맞아, 집중력이 흐트러졌나 보지. 그 급한 일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에클레어가 맞장구치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황태자 즉위식에까지 생각이 닿을까 싶어서 내가 끼어들었다.

“자, 자. 그만하고 돌아가자.”

“그래요. 정리도 마무리됐으니 회복해야지요. 내일도 일이 있고.”

크렘이 거들었다. 아펠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만큼 그도 ‘급한 일’이라는 게 뭔지 대충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나는 눈짓으로 그에게 감사 표시를 했다.

“하아, 그래. 착각이겠지, 뭐. 나도 잘 모르겠다, 잠을 못 잤더니 머리가 잘 안 돌아가서.”

카눌레가 고개를 털고 말했다.

“맞아, 다들 못 잤을 거 아냐!”

새삼 그 사실을 되새긴 내가 닭처럼 목을 빳빳이 세웠다.

나는 기절해서 잠깐이라도 잤지만 이들은 새벽에 있던 전투에 이어 뒷정리까지 한 상태였다.

진작 챙겨줬어야 했는데, 보호자 실격이다!

뒤늦게 위기감을 느낀 나는 곧바로 카눌레와 에클레어의 팔을 잡고 어깨로는 크렘의 등을 떠밀었다.

“끄응, 빨리 가서 쉬자아!”

갑작스러운 행동에 눈을 끔뻑거리던 에클레어가 피식 웃고는 내게 끌려왔다.

* * *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예정보다 며칠 빠르게, 애초 계획보다 훨씬 간소해진 임무만 마치고 수련회를 끝냈다.

우리 같은 학생이 진지 구축처럼 위험한 일을 하는 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덕분에 우리는 재료나 설비를 나르고 쓰레기를 치우는 등, 몇 가지 일손을 도울 때 외에는 순찰이라는 이름의 산책으로 시간을 때웠다.

아빠를 포함한 사람들이 뒷수습으로 바빴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휴, 그래도 그 이후로는 별일 없어서 다행이다.”

“그러게~”

에클레어가 기지개를 켜며 대답했다.

나는 내 몸만 한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두고 온 것이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한 후 다시 가방을 닫았다. 폐회식을 끝낸 지금은 아카데미의 호위 병력과 함께 돌아가는 일만 남아 있었다.

아직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가방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오후의 가을바람에는 은은한 흙냄새와 나무 냄새가 묻어 있었다.

요새 안에서는 아직도 누군가의 구호 소리와 망치질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요새 안쪽을 쳐다보았다. 첫날보다도 못한, 열악해 보이는 광경이었지만 첫인상처럼 초라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제가 마지막인가요?”

요새를 나오던 크렘이 나를 발견하고 물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대답해 주었다.

“아뇨, 카눌레 오빠가 아직 안 나왔어요. 반지는 다시 받으셨어요?”

“네. 아직 끼우진 않았지만요.”

크렘이 대답하고는 쥐고 있던 손을 펴 보여주었다.

항상 그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가 이번에는 손바닥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반지 안쪽에는 마법진을 스펠화시킨 작은 글자들이 적혀 있었는데, 거기에 손가락이 닿아야 작동되는 듯 크렘의 눈은 지금도 빨간색이었다.

“하지만 이제 끼워봤자일지도 모르겠네요.”

크렘이 그렇게 말을 맺고 뒤를 돌아보았다. 일하다 말고 이쪽을 보고 있던 사람들 몇몇이 몸을 움찔하고는 다시 아무 일도 없던 척 작업을 계속했다.

하긴 가명을 쓴 것도 아니고, 크렘은 사교계에서 이미 유명하기도 했으니 이제 와서 숨겨봤자 소문을 막기는 힘들 것이다.

수련회에 동행한 우리 말고도 수많은 기사들이 목격자 아닌가.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크렘이 먼저 뭐라 말하려던 찰나 카눌레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직 마중 안 왔냐?”

“으, 응. 아직 기다리고 있어.”

“괜히 급하게 왔네.”

카눌레가 혀를 차고는 제 짐을 가져다가 내 가방 위에 얹어놓았다.

“악! 내 가방 구겨지잖아! 바닥에 놔!”

“내 가방에 흙 묻잖아.”

카눌레가 뻔뻔스러운 얼굴로 손을 털었다.

내가 속으로 욕설을 일발 장전하던 그때, 누군가 다가와 카눌레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낡은 옷을 입은 여자였다.

나는 처음엔 그녀가 누구인가 했지만 그녀의 옆에 선 남자가 카눌레에게 시비를 걸었던 잭이라는 건 알아보았기에, 여자도 식당에서 봤던 그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저 말입니까?”

카눌레도 기억이 난 듯 그들을 경계하며 딱딱하게 되물었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편에 선 남자에게 눈짓을 했다.

남자가 마른침을 삼키고 한 걸음 다가왔다. 카눌레가 눈살을 찌푸렸다.

“또 시비를 걸 생각이라면…….”

“쉬제트 백작가의 아드님 되십니까?”

예상치 못한 말에 카눌레가 입을 다물었다.

상황을 보고 있던 내가 카눌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쩌면 카눌레가 아빠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뭔가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잭의 다음 행동은 걱정과 달랐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예?”

제 앞에서 허리를 깊이 숙인 남자의 뒤통수를 보며 카눌레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남자는 허리를 일으킬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그 옆에 있던 여자가 대신 입을 열었다.

“예전에 쉬제트 백작님께 목숨을 빚진 적이 있어요. 저희는 변방에서 계속 나고 자란 토박이거든요.”

행색을 봐도 그들은 평민일 뿐이었지만, 우리 같은 귀족을 대할 때나 아빠 이야기를 꺼낼 때 딱히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빠를 나리나 어르신이라는 호칭 대신 백작님이라고 호칭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어쩌면 아빠가 영지보다 이곳 전방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일 수도, 아니면 이들이 항상 몬스터들의 위협 아래에서 생활하며 귀족의 위협에는 자연히 둔감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 됐든 카눌레는 그들의 접근이 단순한 시비 걸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을 치는 대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자가 남자를 당겨 일으킨 후 말을 이었다.

“8년 전에도 이번과 같은, 아니 훨씬 더 큰 습격이 있었어요. 워낙 갑작스럽고 긴급한 상황이었던지라 어린아이였던 저희는 피난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을 상황이었고요.”

8년 전이라는 그 말에 흐릿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카눌레도 마찬가지인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때 어떤 귀족 여성분이 저희를 구해주셨어요. 나중에 들으니 백작님이 부인을 잃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카눌레의 옆에 선 내가 작게 떨리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여자가 카눌레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닮으셨네요.”

“…….”

잠시 적막이 흘렀다.

나는 그제야 망치질 소리에 다른 소리가 섞여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려 숲을 쳐다보았다.

“크레페! 마차 왔다!”

에클레어가 큰 소리로 외치고 달려오더니 내 등을 떠밀었다.

그녀의 혁대에 묶인 검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눈앞에 닥친 몬스터를 향해 검을 던졌던 그때의 감각도, 얼마 전에 아빠에게서 들었던 말까지.

‘수플레가 생각나니?’

“실례했습니다. 오래 붙잡고 있었네요.”

여자가 허리를 숙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남자도 다시 한번 인사하고 그녀와 함께 멀어졌다.

나는 크렘과 카눌레가 같은 마차에 타는 것까지 본 후에야 내 가방을 싣고 에클레어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역시…….”

“응? 뭐라고 했어?”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뭐야? 뭔데, 응?”

에클레어가 내 혼잣말을 놓친 게 신경 쓰인다는 듯 연신 되물었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냥, 오길 잘했다고.”

“그렇지? 나 사실 제대로 작위를 받아볼 생각은 없었는데 진짜 기사가 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생각보다.”

에클레어가 들뜬 얼굴로 기사 수련회가 끝났다는 것에 아쉬움이 남았다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나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다가 아까 전에 중얼거렸던 혼잣말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했다.

역시 갈레트 오빠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요새에서 쓰레기를 태우는 연기가 하늘 높이 피어올랐다.

아직 저녁도 먹지 않은 오후였지만, 나는 언젠가 엄마와 단둘이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던 그날 밤을 떠올리고 있었다.

【 남친과 약혼자 사이 】

“아가씨, 힘주세요! 하나, 둘!”

“끄으으응!”

“세…….”

팅.

그 소리를 듣고 에이미와 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바닥을 쳐다보았다. 내 허리를 옥죄고 있던 단추가 떨어져 나간 소리였다.

작은 단추는 데구루루 바닥을 굴러 장식장 밑으로 들어갔다.

나는 멍하니 내 배를 내려다보았다.

주문 제작한 건데 그새 사이즈가 안 맞게 되다니.

“…에이미, 미안해요. 더 큰 걸로 준비해 주세요.”

“네…….”

에이미도 어딘가 허탈한 모양으로 대답하고는 내 방을 나갔다.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기적은 없었다? 몸매로 운명을 극복했다?

나는 에이미를 기다리며 침대에 앉았다.

어느덧 나도 스무 살 성인이 되었다. 나는 11년간의 기숙사 생활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생활하고 있었다.

내가 집에 도착한 그날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났다.

에이미는 감동적이라며 나를 껴안고 펑펑 울었고, 마탑 폐쇄 후 반백수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있던 갈레트는 그 뒤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

아, 실수. 거꾸로 말했구나.

에이미가 흐뭇해했고 갈레트가 펑펑 울었다.

“크레페! 손님 왔다!”

문밖에서 카눌레의 목소리가 들렸다.

딴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 다시 치장을 서둘렀다.

다른 옷을 가져온 에이미도 덩달아 바쁘게 움직였다.

“이 정도면 괜찮죠?”

에이미가 내 머리를 땋아주며 물었다.

“이것도 에이미가 준비해 준 드레스잖아요. 에이미의 안목이라면 믿을 만하죠.”

“남자 친구분이 기뻐했으면 좋겠네요.”

“그런 거 아니래도요.”

“무도회까지 에스코트를 해주는 게 남자 친구가 아니면 뭐래요?”

에이미가 능청스레 말하며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그녀의 눈가에는 연한 주름이 패어 있었는데, 그 덕분에 표정이 한층 능글맞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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