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84)화 (84/181)
  • 84화 

    그렇게 묻고 잠시 입을 다물어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쩌면 더 빨리 물어봤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도 아펠은 평범하게 성장했다는 묘사가 없었다.

    본인은 물론 약혼녀였던 크레페도 정치 싸움에 휘말리고 납치까지 당하며 살벌한 생활을 이어갔다.

    돌이켜보면 아펠과 내 첫 만남 때도, 그는 이렇게 구김살 없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마탑에 혼자 있던 어린아이인 나를 경계했고, 내가 아펠의 이름을 말하자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며 가시를 세웠다.

    또래의 어린아이조차 적이 아닐지 의심해야 하는 상황.

    아무리 황족이라고 해도, 어쩌면 황족이었기 때문에 그의 근처엔 아무도 없었던 건지도 몰랐다.

    “풋.”

    그러나 아펠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나 진지해!”

    “푸하하! 알아. 그런 표정이었잖아.”

    아펠이 연신 웃음을 섞어가며 대답했다. 그의 눈에는 눈물까지 조금 맺혀 있었다.

    내 걱정이 농담거리로 치부되는 게 썩 언짢은 기분이었다.

    나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찬장에서 연고를 찾으며 말했다.

    “걱정해 주는데 반응이 왜 그래? 다치지나 말든가.”

    찾은 연고를 들고 아펠을 향해 섰다. 아펠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그런 걱정 하는 건 너밖에 없어. 당연하지. 너 말고 대체 누가, 누가 날 챙겨주겠어?”

    아펠이 그렇게 말하며 손으로 제 상처를 덮었다.

    그가 다시 손을 떼자, 얼굴은 언제 상처가 있었냐는 듯 멀끔해져 있었다.

    열심히 약을 찾고 있던 게 민망할 따름이었다.

    나는 손에 든 연고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얌전히 제자리에 그것을 넣어두었다.

    아펠이 내게 손을 뻗었다.

    “아직도 내가 어린애로 보여?”

    “그럼 어른이냐.”

    괜히 멋쩍어져서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그가 이끄는 대로 옆자리에 앉았다.

    아펠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말을 돌렸다.

    “아무튼, 마법만 썼으면 이겼을 텐데 아쉽겠다. 하긴 마법을 그렇게 잘 쓰는데 검술이 굳이 필요하겠어?”

    아펠이 대답하지 않고 싱긋 웃었다. 어쩐지 다른 말을 삼킨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다시 말했다.

    “그래도 위험할 것 같으면 마법 좀 쓰지.”

    “오래 끌고 싶지 않아서.”

    아펠이 짧게 말을 잘랐다. 바빠서 그랬다는 뜻인가?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너랑 같이 있던 남자가 커스터드 자작가의 크렘이랬지?”

    “응, 맞아. 들어봤어?”

    풀 네임을 소개해 주긴 했지만 자작가라느니, 하는 얘긴 한 적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를 언급하는 아펠이 신기해 되묻자,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사교계에서는 꽤 유명하니까. 잘생겼다고.”

    “네가 더 잘생겼어.”

    질투라도 하나 싶어 냅다 대답하자 아펠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내 얼굴이 마음에 들어? 세계관 대표 미남이랬나? 칭찬이 너무 거창해서 못 알아들을 뻔했어.”

    남의 입으로 들으니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홧홧해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말을 돌렸다.

    “마법은 마탑에서 배운 거야?”

    “응? 아니.”

    아펠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너한테 배웠잖아.”

    “…….”

    그 말인즉, 따로 배운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갈레트에게서 아펠 얘기를 들은 적은 없었지만, 그건 분명 아펠의 마탑 출입이 극비이기 때문이겠지. 아니면 가정 교사가 있었을 거야. 그렇게 넘겨짚던 나는 그 담담한 대답에 오히려 질려버렸다.

    내가 괴물을 키웠나.

    내가 얼빠진 사람처럼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아펠이 키득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

    “아, 금방 가봐야 한다고 했지?”

    “응. 오래 머물지 못해서 아쉽지만…….”

    응대할 손님이 남았댔나, 제식이 남았댔나.

    아무튼 저녁이 되기 전에 황궁에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대련 때문에 그 말을 들었던 걸 까맣게 잊고 있던 내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를 따라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차였다.

    “윽.”

    내가 짧은 신음성을 내며 움찔했다. 아무래도 발을 잘못 디딘 것 같았다.

    아펠이 재빨리 에스코트하듯 내 몸을 받쳐주었다.

    “왜 그래?”

    “아니, 어제부터 좀 많이 걸었더니.”

    다시 침대에 앉은 내가 신발을 벗어 보았다.

    발등과 뒤꿈치,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온통 울긋불긋해져 있었다. 어제 있던 소동과 행군으로 인한 물집과 신발에 긁힌 상처들 때문인 듯했다.

    “끄응.”

    그냥 욱신거리기만 할 때는 몰랐는데 밝은 곳에서 보니 세상 심각해 보이네.

    “…….”

    아펠이 조금 굳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가 손을 들어 내 발치에 가져다 댔다.

    소매 끄트머리에 가려졌던 그의 팔찌가 모습을 드러낸 것과 동시에, 그의 손에서 은은한 빛이 나와 내 발을 감쌌다.

    “고, 고마워.”

    오늘 본 것만 해도 몇 번째였다.

    눈에 띄는 마법 물품이나 증폭진, 연산할 도구도 없이 이 정도 난도의 마법이라니.

    아마 아펠이 평범한 마법사였다면 진작 두통을 호소하며 까무러쳤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저 팔찌가 마법 물품일까? 하긴 황족이니 마구를 구하기는 쉽겠지.

    시간이 지나자 약간 불그스름해진 것을 빼면 내 발은 평소와 같은 상태로 돌아갔다. 환상통처럼 불쾌한 감각이 남긴 했지만 통증이랄 것은 없었다.

    “팔찌는…….”

    “응?”

    “아, 아냐.”

    나는 조금 발개진 얼굴로 얼버무렸다. 다행히 아펠은 내 목소리를 못 들은 것 같았다.

    으, 내가 지금 뭘 물어보려고 한 거야.

    깨닫고 나자 얼굴이 두 배로 홧홧해졌다.

    내가 물어볼 뻔한 건 ‘그 팔찌가 마법 물품이냐’는 질문이 아니었다. 내가 줬던 팔찌는 아직 갖고 있냐는 질문이었지.

    그가 찬 팔찌는 내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나는 뒤늦게 왼쪽 소매를 끌어당겨 내 팔찌를 가렸다. 나만 이걸 간직하고 있었다는 게 조금 민망했기 때문이다.

    딱히 다른 생각이 있어 보관하고 있던 것도 아니지만…….

    그래, 차라리 다행일지도 몰라. 아펠과 내가 약혼하지 않는다면 파혼할 일도 없을 테니까.

    첫사랑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찌질이가 된 기분이었다. 심지어 아펠과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

    “미안해. 빨리 눈치 못 채서.”

    아펠이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어 새파란 눈동자가 심해처럼 어두워졌다.

    나는 자책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픽 웃어버렸다.

    “이러니까 내가 오해를 하지. 죄 많은 남자 같으니라구.”

    “응?”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농담 반 진담 반인 말을 했다.

    아무래도 그의 기억에서 나는 첫사랑 상대가 아니라 소꿉친구로 자리 잡은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조금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는 피폐물이기에 거기 등장하는 건 모두 불행한 인물들뿐이었다.

    주인공인 크레페와 아펠도 마음으로 맺어졌다는 언급은 없었고 이야기의 결말조차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그걸 생각하면 이런 관계도 감지덕지지.

    만일 내가 크레페가 됨으로써 정해진 운명을 벗어나 다 같이 행복해진다면, 그만큼 기쁘고 보람찬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아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무 미안해하지 마. 난 괜찮으니까.”

    “…….”

    아펠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 침묵을 어색해하는 대신 미소 지었다.

    마탑에서,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에도 아펠은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황자라는 이유로 나이에 맞지 않는 부담을 안고 있는 것 같아서 도리어 내 마음이 안 좋았다.

    아까 전에 내가 진지하게 말할 때 웃음을 터뜨렸던 아펠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는 조카 장가보내듯 복잡 미묘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표정에서 이상한 기색을 느낀 듯 아펠이 짧게 물었다.

    “무슨 생각 해?”

    너 장가보내는 생각.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아펠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똑바로 섰다.

    “크레페, 있잖아…….”

    “응?”

    갑자기 아펠이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나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나를 꿰뚫을 듯한 시선, 보석처럼 새파란 눈동자, 사람을 홀리는 듯한 특유의 분위기, 고요한 긴장.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그때 아펠이 손을 뻗어 내 손목을 붙잡으려 했다.

    정확히 팔찌 위였기 때문에, 그렇잖아도 그쪽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나는 악 소리를 내며 소스라쳤다.

    아펠이 내 반응에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내가 생각해도 과민 반응이었기에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왜, 왜?”

    내가 헛기침을 하며 묻자, 아펠이 어색하게 손을 거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싱긋 웃었다.

    “아냐. 잠깐이었지만 다시 봐서 좋았다고.”

    그가 다시 뒤로 물러나며 말을 이었다.

    “네가 여기 있을 거라고 알려준 피오르한테 고맙다고 말해 놔야겠는걸.”

    피오르라는 이름을 듣자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물었다.

    “혹시 피오르 선생님이랑 같이 있던 사람도 만났어?”

    “응? 누구?”

    “아니, 갈레트라고, 우리 오빠가 마탑에 들어갔었거든. 마탑이 폐쇄된다고 했으니 곧 돌아오겠지만… 혹시 얘기했나 싶어서.”

    “그랬구나. 신경 써본 적은 없는데.”

    아펠이 잠시 갈레트의 존재를 떠올려보려는 듯 말을 멈췄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 말했다.

    “돌아가서 보지, 뭐.”

    “응. 카눌레 오빠보단 친해지기 쉬울 거야.”

    “그래, 얘기해 볼게.”

    그 대답을 들은 나는 헤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응, 피오르 선생님한테도 안부 전해줘.”

    “응.”

    가볍게 대답한 아펠이 공간 이동을 하려는 듯 몇 걸음 물러났다.

    나는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봐!”

    아펠이 미소로 답하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공기 중에 남아 있는 짙은 마나의 기운만이 그가 있던 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탑 폐쇄에 대한 이야기를 묻는 걸 잊었구나.

    뒤늦게 떠올렸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냈다.

    애초부터 원작의 아펠이 마탑을 폐쇄한 이유는 자신처럼 강한 마법사가 또 등장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번엔 아펠이 직접 마탑에 들어가 마법을 배우기도 전에 폐쇄된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을 뿐, 독학으로 그만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더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폐쇄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해가 갔다.

    물론 그 이유라는 게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경쟁심이라는 것은 지적하고 싶지만, 이제 와서 아펠에게 따져 물어봤자 결정이 번복될 것 같지도 않고.

    뭐, 원작의 내용을 따라가는 거니까 내가 깊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연무장으로 돌아갔다.

    아펠이 오빠들과 친해질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니 기분이 퍽 좋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