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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83)화 (83/181)
  • 83화 

    “아무래도 오빠가 진지하게 기사를 지망하는 것 같아. 틈만 나면 여기저기에 대련을 신청하고 다니더라고.”

    “이해해. 매일 똑같은 사람이랑 대련하는 건 한계가 있을 테니까.”

    “카눌레랑 대련이요?”

    소식을 들었는지 에클레어가 돌아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그쪽도 기사 지망인가 보죠?”

    대놓고 반말을 섞어 쓰는 카눌레보다야 나은 수준이었지만, ‘그쪽’이라는 단어도 황태자에게 그리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내 생각에 동의라도 하듯,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던 크렘이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물론 아펠의 대답은 자연스러웠다.

    “이것저것 배우고 있죠.”

    “크레페 또래 같은데…….”

    에클레어는 ‘상대가 될까 몰라.’ 하는 말을 은근슬쩍 덧붙였다.

    평소 같으면 내가 나서서 그런 깔보는 말투 쓰지 말라며 나무랐겠지만, 지금의 나는 곧 있을 아펠과 카눌레의 대련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정말 괜찮아? 실수로 부상이라도 입으면 어떡해.”

    “괜찮아. 결투도 아니고, 가볍게 할 거니까.”

    “그래, 적당히 봐줄 거야. 아니, 봐줄게요.”

    카눌레가 마지막으로 정강이 보호구를 차고 비식 웃으며 일어났다.

    나는 그 뻔뻔스러운 태도에 내심 혀를 차고 아펠의 귀에 속삭였다.

    “마법 쓰고 안 들킬 수 있겠어?”

    “마법은 아예 쓰면 안 되지. 플럼 바클라와니까.”

    아니, 마법을 아예 안 쓰겠다고?

    그 대답을 듣고 나는 카눌레를 쳐다보았다.

    그가 내 오빠이기 때문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카눌레의 검술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황실 기사단에 입단이 확정된 크바스와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아, 아무튼 다치지 않게 조심…….”

    “걱정 마.”

    아펠이 짧게 답하고 연무장 가운데로 가서 섰다.

    태도만 보면 제가 질 걸 전혀 생각지 않고 있는 듯 보였으나, 나는 여전히 불안했다.

    새벽에 본 바로도 아펠의 마법 실력은 엄청난 수준이었지만, 그의 검술 실력이 어떨지는 제대로 본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원작에서는 아펠이 마법과 검술, 양면에 뛰어나다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그렇게 따지면 나도 지금쯤 절세미인이어야 하는걸!

    “자, 자. 준비됐죠? 대전 개시!”

    어쩌다 보니 심판을 맡게 된 에클레어가 팔을 내렸다.

    “선공해 봐요.”

    카눌레가 턱을 까딱했다. 나이 차가 있으니 한 수 접어주겠다는 뜻인 것 같았는데, 아펠은 불쾌해하는 기색도 없이 싱긋 웃었다.

    “기꺼이.”

    그리고 그 직후부터 나는 그들의 동작을 알아볼 수 없었다.

    “헐…….”

    아주 가까이에서 탁구 경기를 보는 것처럼 나는 정신없이 도리질을 쳤다.

    시도 때도 없이 검 끝이 서로를 향해 내질러지는 통에 누가 우세한지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어쩌면 그만큼 팽팽한 대결이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에클레어는 콧노래라도 부를 듯 신이 나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상황을 중계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의 박력에 질려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딴 세계 사람들이네요.”

    근처에 있던 크렘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요.”

    얼떨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평소라면 내게서 몇 미터쯤 떨어져 있었을 크렘이지만, 이제 반지가 없기 때문인지 전보다 대화하기 편해하는 듯했다.

    “새벽에는 감사했습니다. 부끄럽게도 몸이 굳어버려서…….”

    크렘이 뒤늦은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내가 크렘의 팔을 잡아끄는 바람에 몬스터들의 주의가 쏠렸던 것을 생각하면, 그 감사 인사를 냅다 받기는 조금 민망했다.

    “뭘요. 위험한 건 카눌레 오빠랑 에클레어 언니가 다 했죠.”

    나는 그렇게 공치사를 돌리고 반사적으로 크렘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그의 붉은 눈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계속 신경 쓰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 금방 시선을 돌리긴 했지만.

    “윽.”

    아펠의 검을 겨우 쳐낸 카눌레가 한 방 맞았다는 표정으로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달려들었다.

    ‘딴 세계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던 크렘의 말대로, 그들은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실력과 배짱을 가지고 있었다.

    아펠도 몬스터를 해치울 때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것 같던데, 혹시 검술을 배우려면 그 정도는 기본으로 해야 하는 건가?

    “크렘 님은 기사가 되려는 거예요?”

    문득 크렘을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면 크렘의 검술 실력이나 배짱은 나랑 비등비등한 것 같았다.

    카눌레, 에클레어, 크바스까지 누구 하나 크렘의 실력에 대해 호평을 해주지 않았을 정도니까.

    어쩌면 내 질문이 시비처럼 들렸을지도.

    내뱉고 나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크렘은 태연히 대답했다.

    “무도(武道)에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작위를 받으려고요.”

    “아아.”

    내가 금방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는 사회의 작은 축소판이라고 했던가.

    파타슈와 에클레어가 출신을 들먹이며 대립했던 것처럼, 이 사회에서 파벌이나 명예를 이유로 결투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닌 듯했다.

    출세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기사 작위를 노려볼 만도 했다.

    “그런데 플럼… 저분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십니까?”

    크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에 내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마탑과 황궁의 거리는 가까우니까요.”

    아펠이 아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한 것뿐이었지만 크렘은 얼추 납득한 듯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크레페 님의 인맥은 대체…….”

    “근데 크렘 님이야말로 플럼에 대해서 어떻게 아셨어요? 만난 적이라도 있어요?”

    “아,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사교계에 진출하려면 그 정도는 기본이죠.”

    어느 정도는 예상한 대답이긴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사교계 데뷔를 마친 에클레어랑 카눌레가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으로 크렘을 곁눈질했다. 그러나 표정을 보니 그도 딱히 뻐기려고 한 말인 것 같진 않았다.

    크렘이 긴장이 풀린 듯 한숨을 섞어 말했다.

    “역시 소문대로 굉장한 미남이시네요. 하아, 저도 더 분발해야겠어요.”

    “뭘요?”

    크렘이 연무장을 보며 웅얼거렸다.

    “뭐든 간에요. 팩을 하든 마사지를 받든…….”

    팩? 마사지?

    전혀 생각지 않았던 정보를 듣고 잠깐 귀를 의심했다. 머릿속에 오이를 썰어 붙인 크렘의 얼굴이 그려졌다.

    크렘이 한 박자 늦게 아차 한 얼굴로 내 눈치를 보았다.

    “크흠, 이건 비밀로 해주세요. 절 사랑해 주시는 분들이 실망할 수도 있으니까요.”

    “네, 네에.”

    사교계의 귀공자라더니, 역시 그 별명도 거저 얻은 건 아니었구나.

    …어라?

    나는 얼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왜 그러십니까?”

    크렘이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이유를 물었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오른 나는 설마 싶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사교계에 힘쓰는 것도 작위 욕심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

    크렘이 순간 말을 잃었다.

    곧이어 그의 얼굴이 제 눈만큼 빨간색으로 달아오르더니, 마침내 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도 비밀로 해주세요.”

    어쩐지 나름의 고충이 느껴지는 듯한 말이었다.

    “풋.”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원작에서 몇 번 나오지도 않았던 크렘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하나씩 풀려가는 상황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마냥 한량 같기만 했던 크렘이 이렇게 비밀스런 인물이었다니. 어쩐지 조금 귀엽기도 하고.

    “…….”

    “푸훕, 죄송해요…….”

    크렘의 표정을 보자 웃음을 참기가 더 힘들었다.

    내가 사과하며 고개를 돌린 그때, 별안간 검 한 자루가 날아와 크렘의 발치에 꽂혔다.

    “허억!”

    “크렘 님! 괜찮아요?”

    놀란 크렘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가 얼빠진 얼굴로 날 올려다보았다.

    “네, 네…….”

    “죄송합니다! 손이 미끄러졌어요.”

    아펠이 뒤늦게 사과하며 달려왔다.

    “크레페, 안 다쳤지?”

    “으, 응. 나는 괜찮아.”

    “저도 괜찮습니다…….”

    크렘이 얼떨떨한 얼굴로 옷을 털고 일어났다.

    아펠은 그쪽에 신경도 쓰지 않고 내게 말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나보다 크렘 님한테…….”

    “뭐 하는 거야, 빨리 와!”

    “네, 네.”

    카눌레의 재촉에 아펠이 두말 않고 바닥에서 검을 뽑아 가져갔다.

    “…….”

    크렘이 말없이 나와 아펠을 번갈아 보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될까요?”

    “뭘요?”

    크렘이 손가락을 들어 내 팔찌를 가리켰다.

    “그것도 저분에게서 받은 겁니까?”

    “네? 네, 맞아요.”

    “…그렇군요.”

    그러고서 크렘이 옷을 털고 일어났다.

    뜬금없는 질문만 남기고, 크렘은 갑자기 나와 조금 거리를 벌리고 섰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조, 종료!”

    그때 에클레어가 외쳤다. 뒤늦게 연무장을 쳐다보자 카눌레의 가검이 아펠의 목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아펠의 뺨에는 작은 흉터가…….

    “앞, 아니, 플럼!”

    나는 방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잊고 후다닥 달려가 아펠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뺨에 분명 얕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피부가 뽀얘서 빨간색 상처가 더욱 도드라졌다.

    “세상에! 세계관 대표 미남한테 무슨 짓이야, 오빠!”

    “아니, 그 정도는 막을 줄…….”

    “난 괜찮아, 크레페.”

    아펠이 내 팔을 잡고 진정시켰다. 심판을 보던 에클레어가 다가왔다.

    “괜찮아요? 의무실부터 가봐야겠네.”

    “내가 데려갈게!”

    내가 바로 자원하자 에클레어가 다녀오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괜찮다는 아펠을 굳이 부축하며 걸음을 옮겼다.

    물론 서너 살쯤 어린애 얼굴에 흉을 남긴 카눌레를 향해 매서운 눈빛을 쏘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검으로 피를 보다니, 그것도 능력이다!

    * * *

    아까 전 의무실에서 본부까지 걸어왔던 덕분에 다시 거기까지 찾아가는 게 그리 어렵진 않았다.

    나는 아무도 없는 의무실 침대에 아펠을 앉혀놓고 그의 팔다리를 꼼꼼히 살피며 더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다른 곳은 생채기는커녕 맞은 티도 안 났다.

    “걱정해 주는 거야?”

    아펠은 소꿉놀이라도 하는 기분인지 웃으며 날 쳐다보았다.

    정작 다친 사람은 본인이면서 왜 장난처럼 얘기하는 거야?

    나는 조금 심통이 났지만 문득 그 대사를 예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내가 행동을 멈추고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물었다.

    “너, 마탑에서도 그 얘기 한 적 있었지? 혹시 궁에서 사람들이 널 잘 안 챙겨줘?”

    “뭐?”

    아펠이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나는 동요하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널 걱정해 주는 어른이 없느냐고. 아프지 않게 챙겨주고, 잘하면 칭찬하고 못하면 혼내는 어른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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