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나보다 머리 반 개 정도 커진 키 같은 건 거의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아마 오랜만에 본 것 같지 않은 태도 때문이겠지.
나는 검은 탑으로 향하는 동안 계속 그를 힐끔거렸다. 어쩌면 그를 만났던 게 꿈처럼 느껴졌던 것도 이 연장선이었을지 몰랐다.
유년 시절의 추억이라고만 생각했지, ‘나중에 보자’던 약속이 이런 식으로 이뤄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무려 칠팔 년 만의 만남이었다. 심지어 원작에서는 벌어지지도 않았던 일.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아펠과의 첫 만남은 내 열다섯 살 생일파티 때였는데, 이번엔 에이미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파티 하나 없이 조용히 넘겼다.
혹시 아펠이 여기까지 온 것도 그 ‘운명’의 영향인가?
“오래 기다렸어?”
답이 나올 리 없는 질문을 뒤로하고 탑에서 내려왔다.
탑의 입구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아펠이 웃으며 답했다.
“아니. 잘 어울린다.”
“괜한 말 안 해도 돼.”
어울리고 뭐고 기사 수련회에 오면서 꼬까옷을 가져왔을 리 없었다.
나는 추레한 활동복을 몇 번 털고 민망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근데…….”
“크레페?”
내 말을 끊고 에클레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탑 바깥이 아니라 내 등 뒤, 탑 안쪽에서 들린 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에클레어가 탑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일을 마친 후 숙소에서 쉬고 있던 모양이었다.
“백작님이랑 얘기 끝냈어?”
“응. 지금은 오빠가 집무실에 있을 거야.”
“이쪽 분은?”
에클레어가 아펠을 눈짓하며 물었다.
나는 혹시라도 아펠의 정체를 알아본 것인가 했지만, 반응을 보니 그냥 낯선 사람이 숙소 앞에 있는 게 신경 쓰였을 뿐인 것 같았다.
“플럼 바클라와라고 합니다.”
아펠이 아까처럼 가명을 대며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이름을 들은 에클레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플럼? 자두?”
“네. 특이한 이름이죠?”
아펠이 뻔뻔하게 웃었다.
그러자 에클레어도 뭐라 의문을 제기하진 않았다. 특이한 이름으로 따지면 저도 만만찮다는 것을 알 테니까.
“그, 왜, 여기에 곧 몽블랑 후작님이랑 바움쿠헨의 귀족 누가 올 거래. 그 선발대 같은 거야.”
혹시라도 에클레어가 수상쩍게 여기기라도 할까, 나는 언젠가 아빠에게서 주워들었던 정보로 서투르게 둘러댔다.
어색해 보였겠지만 그 정보의 진위는 확실했던 터라 에클레어도 ‘아, 그래?’ 하며 가볍게 넘겨주었다.
“아무튼 가자.”
“응? 어딜?”
“밥 먹으러. 그러려고 옷 갈아입은 거 아니었어?”
이제 보니 에클레어가 입은 옷도 아까보다 깨끗한 새 옷이었다.
그녀는 내가 부정할 시간도 주지 않고 앞장섰다.
내가 슬쩍 아펠의 눈치를 살핀 그때였다.
꼬르륵.
“…미안.”
“하하, 가자.”
아펠이 웃으며 나를 이끌었다.
【 돌아오는 길 】
에클레어가 우리를 안내해 간 곳은 식당이 아니라 내가 나온 지 얼마 안 된 본부 건물의 앞마당이었다.
이곳은 원래 마당이 아니라 길목이었는데, 새벽의 소동으로 주변 건물이 다 무너져 공터로 탈바꿈된 듯했다.
상황을 보건대 식당이 있던 건물도 무너진 거겠지.
“아…….”
아펠이라는 이름을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플럼, 너는 안 먹어도 돼?”
“나는 먹고 왔어. 그러고 보니 디저트라도 좀 챙겨 올 걸 그랬다.”
“에이, 챙기긴, 뭘. 괜찮아, 이것도 먹을 만해.”
보란 듯이 수프를 후룩 마셨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물을 많이 섞었는지 좀 싱겁긴 해도 맛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니까.
묽은 수프를 홀짝거리며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겨우 몇 시간 잠에 빠져 있었을 뿐인데 아예 다른 지역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에클레어는 일찌감치 따끈한 수프를 원샷 하고 푸딩을 산책시킨다며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카눌레는 아직 안 나왔나?
주춧돌처럼 생긴 턱 위에 걸터앉아 관광 아닌 관광을 하던 나는 외따로 떨어져 수프를 마시는 크렘을 발견했다.
역시 눈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곳에 섞여 앉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학교에서든 이곳에서든,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고 있는 크렘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나마 비슷한 처지라고 할 만한 카눌레의 모습도 안 보이자 괜히 신경이 쓰였다.
나는 에클레어처럼 남은 수프를 한 번에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다녀올게.”
날 따라오려는 아펠에게 그런 말을 남긴 후 마저 걸음을 옮겼다.
“죄송해요. 일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광장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본부의 모퉁이 너머 골목에 자리를 잡고 있던 크렘은 마치 제게 말을 걸 사람이 있을지 몰랐다는 듯 화들짝 놀랐다.
하마터면 수프 그릇을 놓칠 뻔한 그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아, 아뇨. 사람이 많아서 괜찮았…….”
갑자기 크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시선은 내 어깨 너머에 못 박혀 있었다.
“아, 아페…….”
“앞이요?”
나는 갸우뚱하며 크렘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펠이 싱긋 웃기만 했을 뿐 다른 이상한 점은 없었다.
“왜 그러세요?”
결국 내가 먼저 물었다. 그러나 크렘은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붉은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아, 설마.
“무슨 일 있어?”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듯 아펠이 다가와 물었다. 크렘의 입술이 움찔했다.
“아펠…….”
“으아아앗!”
나는 어디서 솟아 나온 건지 모를 괴력으로 크렘의 입을 막고 그를 골목 안쪽으로 밀었다.
내 반응에 더욱 확신한 듯, 크렘이 내 손을 떼어내고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아, 아펠 슈트루델 전하 아니십니까!”
역시 눈치챈 거구나.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한 기분에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크렘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저분이 왜 여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듯 아펠이 우리를 따라 골목에 들어왔다.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킨 크렘이 주먹 쥔 오른손을 가슴에 올린 후 깊이 허리를 숙였다.
“크렘 브륄레 커스터드가 앞…….”
순간 묵직한 마나의 기운이 피부를 옥죄었다.
그 기운을 정통으로 받은 크렘이 말을 끝마치지도 못하고 개구리 같은 몰골로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그가 들고 있었던 빈 수프 그릇은 내가 아슬아슬하게 잡아챘다.
“플럼입니다.”
“아, 안녕, 플럼!”
크렘이 다급하게 고쳐 말했다.
태자 전하에게 말 놓는 속도가 광속이었지만 맘이 급할 테니 이해해 주자.
아펠이 옅은 한숨을 내쉬고 뻗었던 팔을 거두었다.
압력이 사라지자 크렘이 엉거주춤 일어나 옷자락에 붙은 먼지를 털며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극비였나 보군요. 혹시 근처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크렘은 첩보 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조금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보다 서너 살쯤 어린 아펠이 상대적으로 어른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크레페?”
아펠이 눈빛으로 내게 사정을 물었다.
가명까지 써가면서 제 방문을 숨겼던 그였기에 나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머리를 긁적거렸다.
“여기는 크렘 브륄레 커스터드 님이야. 나랑 같이 수련회에 왔는데… 크흠, 크렘 님, 말씀하신 대로 아펠이 여기 있는 건 비밀이니까 평상시처럼 대해주세요.”
“예, 예.”
크렘은 아직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까지 더듬으며 대답했다.
아펠은 제 정체를 단번에 알아본 크렘을 경계하듯 굳은 얼굴이었다.
그런 태도를 보아 아펠은 크렘과 초면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날을 세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빠도 아펠을 마주하고 한참 동안 긴가민가 혼란스러워 보였다. 아마 아펠을 직접 본 적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의 특징 같은 것이 알음알음 퍼져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저렇게 잘생긴 얼굴이 흔할 리가 없지.
나는 그의 머리색이나 눈 색 같은 인상착의 대신 다분히 주관적인 감상을 정답으로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펠이 내 손에서 크렘의 빈 그릇을 가져다가 크렘에게 건넸다.
“플럼 바클라와입니다.”
아펠이 가명으로 쓰는 풀 네임을 짧게 말했다.
나를 등지고 있었기에 아펠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릇을 받아 드는 크렘의 손이 움찔한 건 확실히 보였다.
“플럼, 괜찮아. 소문이 나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그렇죠?”
“예, 무, 물론이죠.”
“…….”
아펠이 뭐라 대답하지 않고 내 곁으로 돌아왔다. 그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이야기 마쳤으면 갈까?”
“으, 응.”
나는 갑자기 변한 그의 태도에 잠깐 어색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수련회 종료까지는 며칠 말미가 남아 있었다.
크렘과 친해지기 위해서라면 지금보다는 다음에 말을 붙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금은 그냥 괜찮은지 걱정돼서 와본 것뿐이고.
아펠을 보는 크렘의 표정에는 아직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걱정한 것과는 다른 방향이었지만, 아무튼 지금 대화하긴 때가 그리 좋지 않은 듯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대충 매듭을 짓고 아펠과 함께 골목을 나오려던 그때였다.
“플럼!”
별안간 머리 위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창문으로 카눌레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오빠?”
설마 들은 건가? 아니, 들었으면 ‘플럼’이라고 부르지도 않았겠지.
“무슨 일이십니까?”
아펠이 2층을 향해 되물었다.
카눌레는 아무래도 지금 막 집무실에서의 용건이 끝난 듯했다.
그가 계단으로 내려오는 대신 창틀을 밟고 훌쩍 뛰어내렸다.
나는 그 아찔한 광경을 차마 보지 못하고 윽, 소리를 냈다.
카눌레가 가뿐히 착지하고 아무렇지 않게 용건을 말했다.
“플럼, 에클레어가 놓친 몬스터 잡은 게 너라면서요? 나랑 대련 한 번만 합시다.”
“…미안. 내가 부족한 오빠를 뒀다.”
“다 들리거든?”
카눌레가 듣든 말든, 언제나처럼 사과는 내 몫이었다. 나는 아펠에게 말하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카눌레가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아빠가 아펠의 방문을 둘러대며 그런 이야기를 해놓은 모양이었다.
하긴 아펠이 마법으로 어제 같은 일을 벌였다고 한다면 대충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법에 문외한인 카눌레가 보기에도 단순한 마법 연구생이 저질렀을 만한 일의 수준이 아니었을 테니까.
하지만 갑자기 대련이라니.
“괜찮겠어?”
“네가 사과할 필요 없어. 힘든 것도 아니고.”
아펠은 대련용 어깨 갑옷을 팔에 끼우고 매듭을 엮으며 웃었다.
하지만 그 대답을 들어도 딱히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사실 카눌레의 싸움닭 기질이 발휘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나는 사방팔방 시비 걸고 다니는 카눌레의 오랜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는 데 낙담해 고개를 저으며 변명 같은 말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