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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81)화 (81/181)
  • 81화 

    일의 경중을 볼 때 아무래도 금방 진정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아빠에게 다가가 덥수룩한 수염을 콱 당겼다.

    그것이 스위치가 된 듯, 아빠가 나를 등 뒤에 숨기고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프랄린 세자르 쉬제트가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실례했습니다. 가, 갑작스러워서 그만.”

    “약조도 없이 찾아온 불청객일 뿐입니다. 편히 대해주십시오, 백작.”

    아펠이 짐짓 부드럽게 말하며 손을 내저었다.

    세상에, 저거 누구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전까지 내게 생긋생긋 웃어주었던 사람답지 않은 기품이었다.

    과연 황족이구나, 하고 감탄해야 할까? 아니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펠의 그런 모습은 내게 어색하고, 한편으론 놀랄 만한 것이었지만 그리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그의 모습이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 등장하는 아펠 슈트루델과 겹쳐져 보였기 때문이다.

    “크레페, 너도 어서.”

    내가 딴생각에 잠긴 사이, 아빠가 내 등을 슬쩍 밀었다.

    아무래도 아빠는 내가 아펠의 정체도 모르고 동행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에? 아.”

    여기서 ‘아펠이랑은 벌써 인사했는데요?’라고 말했다간 아빠가 목 뒤를 잡고 쓰러질지도 몰랐기에, 나는 늦게나마 치맛자락을 들고 허리를 숙였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영애, 그리 대하시면 섭섭합니다.”

    아펠이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웃었다.

    “크레페와 면식이 있으십니까?”

    이 자리에서 영문을 모르고 있는 건 아빠뿐이었다.

    내가 민망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자 아펠이 먼저 대답해 주었다.

    “마탑과 황궁의 거리는 가까우니까요.”

    “아…….”

    아빠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다만 그게 이 상황을 납득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전히 넋이 나가 있는 표정을 보면 후자에 더 가까울 것 같긴 했지만.

    “이곳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러고 보면 아빠가 극존칭을 사용하는 옆에서 아펠과 친한 척 반말을 하는 것도 모양이 그리 좋을 것 같진 않았다.

    내가 아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말했다.

    “저는 잠깐 나가 있을게요.”

    그래도 아주 오래 걸리진 않겠지?

    느긋하게 생각하며 나는 집무실 문 앞의 복도에서 아펠을 기다리기로 했다.

    창문 밖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집무실은 2층이었기에 나름 멀리까지 보였다.

    나는 혹시 내가 아는 얼굴이 보일까 싶어 잠시 찾다가 딴생각에 빠졌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

    원래 크레페의 일생을 담아놓은 그 책을 일종의 예언서라고 본다면, 사실 내가 이렇게 불안해할 이유는 없을지도 몰랐다.

    이미 그 내용 중 상당수가 빗나갔기 때문이다.

    원작에 따르면 지금의 나는 갈레트를 잃고 실의에 빠져 저택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어야 했다.

    그리고 처음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게 열다섯 살의 생일이었다.

    그러나 아펠과의 첫 만남이기도 한 그 순간은 이제 없는 일이 되었다.

    갈레트도 멀쩡히 살아 있었고, 몽블랑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원작의 내용과 같은 건지 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크렘과 에클레어도 별 관계 아니고, 나는 심신 멀쩡히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의 죽음과 마탑의 폐쇄 같은 일은 변하지 않았지.

    ‘물론 억지로 운명을 바꾸는 것도 쉽진 않아. 운명한테는 자신을 유지하려는 성질이 있거든.’

    오래전 들었던 디몬의 말이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어쩌면 그 이야기 때문에 아직도 종종 불안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릴 때 썼던 『내 인생 공략집』도 이제는 단순한 낙서장이 되었을 뿐인데 말이다.

    물론 지금도 나름 위협에 대비하려고 크렘을 쫓아온 거긴 하지만, 만일 상황이 급박함을 느꼈다면 이렇게 몇 년이나 시간을 끌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엄마의 죽음, 갈레트의 생존, 마탑의 폐쇄와 나의 입학, 포동포동한 내 외모에 이은 아펠의 관심.

    혼란스러운 일들투성이였다.

    나는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여전히 포동포동 말랑말랑한 내 뺨의 감촉이 느껴졌다.

    원작에서 아펠은 폭군이었고 약혼녀인 크레페에게도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그가 웃었다는 묘사도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나중에 보자고 했잖아. 약속 지키러 왔지.’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인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크레페? 뭐야, 아빠랑 얘기한다며.”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복도 끝에 나 있는 계단으로 카눌레가 막 올라온 것이 보였다.

    “손님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어. 오빠는 왜? 쉬려고?”

    “내가 너냐?”

    카눌레가 코웃음을 치고 대답했다.

    아무튼 기절했다 깨어난 사람한테 말하는 본새 하곤.

    괘씸한 마음에 입술을 비죽거렸다.

    카눌레는 내 표정을 못 본 척하고 아빠가 있는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백작님, 잔해 정리가 끝났습니다.”

    “아, 아아.”

    문 너머에서 잠깐 침묵이 흐른 후에 아빠가 문을 열어주었다.

    문틈으로 나와 눈이 마주친 아펠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요한 말은 이미 다 끝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아펠이 사정을 제대로 설명한 게 맞다면 굳이 내가 아빠에게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손님이 오셨습니까?”

    낯선 얼굴을 발견한 카눌레가 물었다.

    “아, 그러니까…….”

    “플럼 바클라와라고 합니다.”

    아빠가 우물거리는 사이 아펠이 대답을 가로챘다.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걸 보니 아펠이 평소에도 사용하는 가명인 것 같았다.

    처음 듣는 가문명에 카눌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바클라와?”

    “변방 근처의 작은 영지라 생소하실 겁니다. 이곳에 계신 쉬제트 백작님과 연이 있어 인사차 들렀고요. 그렇죠?”

    “그렇죠. 네.”

    아빠가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아빠는 이런 거짓말에 재능이 없는 듯했다.

    구경하긴 재밌었지만 아빠의 곤경을 계속 바라만 보는 불효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는 웃음을 삼키고 집무실로 들어가 아펠의 팔을 잡아끌었다.

    “오빠는 얘기하고 와. 우리 먼저 갈게.”

    “크레페, 잠깐.”

    아빠가 날 불렀다.

    이대로 자리를 떠나려던 내가 멈춰 서자, 아펠이 제 팔을 잡은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더니 눈짓했다.

    “천천히 얘기하고 나와. 기다릴게.”

    가족끼리 얘기하라는 배려로 보였다.

    나는 눈짓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크레페, 다치지 않아 다행이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문이 닫히자마자 아빠가 내 양어깨에 손을 올리고 짐짓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라고 했지. 명령 불복종은 중죄야. 이번에는 학생 신분이니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겠지만, 너도 기사 지망생이라면 이 위중함을 알아두거라.”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아빠의 눈빛이 썩 냉정했다.

    기사를 지망한 적은 없었지만 기사 지망생으로서 수련회에 참석한 만큼 다른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내가 자세를 바로 하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그래, 그럼 안부도 나눴으니…….”

    아빠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

    내 어깨에 올린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찔끔 식은땀이 났다.

    아펠의 이야기를 캐묻고 싶은데 바로 옆에 카눌레가 있어서 차마 묻지 못하겠다는 심정이 빤히 보였다.

    나는 대꾸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튼 이건 카눌레, 너랑 바니유 공작 영애께도 해당되는 얘기야. 듣자 하니 그분도 꽤나 활약하셨다던데.”

    “언니요? 대단했죠.”

    성벽을 딛고 거의 날아오르다시피 했던 에클레어의 모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아빠가 날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수플레가 생각나니?”

    “네? 아…….”

    순간 그것이 엄마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듣지 못했다.

    갈레트의 말처럼 아빠는 엄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엄마의 이름을 듣는 게 조금 낯설었다.

    “실은…….”

    아빠가 뭐라고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경계한 듯 카눌레가 끼어들었다.

    “그보다 저 플럼인지 뭔지 하는 놈은 뭔데요?”

    놈?

    “콜록! 크흠.”

    카눌레의 언사에 놀란 아빠가 기침했다.

    “아무튼 조심하라고! 내가 새벽에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그러고서 아빠는 우리의 행동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몇 번이나 강조했다.

    내용의 반쯤은 상황 설명이었고 나머지 반쯤은 설교였다.

    아마 플럼의 정체에 대해 추궁당하기 전에 말을 돌리려는 모양이었는데, 당연히 카눌레는 그걸 얌전히 듣고만 있는 대신 딱 잘라 대답했다.

    “예, 백작님.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

    우리 아들, 언제 이렇게 커선…….

    하는 속마음이 훤히 보이는 표정이었다.

    여전히 익숙해질 낌새가 없는 산적 모양새에 부담스러울 정도의 자상한 눈빛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보는 눈이 없을 땐 아빠라고 부르라니까.”

    “보는 눈 있잖아요, 저기.”

    카눌레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기로 했다.

    “오붓한 시간 보내세요.”

    카눌레가 질색할 만한 애정 공세가 쏟아지는 것을 뒤로하고, 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 * *

    아펠은 아까 전의 나처럼 바로 앞의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저녁까지 황궁에 다시 돌아가 봐야 한다며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간만에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던 나로서는 물론 환영할 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전에…….

    “나 옷 좀 갈아입고 올게.”

    어젯밤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내내 잠옷만 입고 있었다.

    그동안 새로 배운 것이 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나 혼자 잠옷 차림으로 활보하는 게 그리 자유스럽게만 느껴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아펠과 함께 내가 머무는 검은 탑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낯선 사람과 스칠 때마다 잠옷 차림이 부끄러워 아펠의 뒤에 숨었다.

    아펠은 나와 걷는 속도를 맞춰주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네가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나보다 네 걱정이나 해. 새벽에도 무슨 일 생겼으면 어쩔 뻔했어?”

    내가 곧바로 반박했다가 뒤늦게 민망함을 느끼고 헛기침을 했다.

    “큼. 물론 별일은 없었지만.”

    아펠이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차가운 눈 색과 대비되는 순한 미소, 주변을 고요하게 만드는 듯한 특유의 분위기.

    못 본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의 인상은 변한 게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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