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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80)화 (80/181)

80화 

사실 단순히 반지를 끼우고 있는 것만으로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내가 크렘과 실수로 접촉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 사실을 들춰내는 대신 그렇군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만에 하나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차단하는 게 안전할 테니까…라는 건 핑계고, 아무래도 반지가 없는 편이 크렘과 대화하기도 더 편할 테니까.

하지만…….

“괜찮으시겠어요?”

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이 상태로 일하고 있었을 크렘에게 그런 얘기를 묻기에는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그냥 넘어가기엔 마음에 걸렸다.

카눌레도 눈 색이 빨갛다는 이유로 악마라느니 저주라느니 온갖 소리를 들었다.

처음부터 눈 색을 감추려고 애써왔던 크렘이라면 분명 피하고 싶은 상황일 것이었다.

“…….”

하지만 내 조심스러운 질문을 들은 크렘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도 내가 무엇을 걱정하는 건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는 나보다 더 오래전부터 그 적의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을 테니까.

크렘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리고 먼 곳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 끝에는 한창 일하고 있는 카눌레가 있었다.

그는 민간인들과 힘을 합쳐 부서진 건축 자재를 나르는 중인 듯했다.

저건… 우리랑 같은 피난소를 썼던 사람들 아닌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자 그쪽의 사람들이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그들은 허리를 숙여 이쪽에 예를 표하고 일을 계속했다.

“괜찮은 것 같더군요.”

크렘이 짧게 말했다.

안 좋은 표정은 아니었기에, 나는 싱긋 웃으며 거들었다.

“잘됐네요.”

어쩐지 조금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잠들어 있던 사이에 분위기가 많이 유해진 것 같았다.

“…….”

크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았던 나는 이 침묵이 점차 부담스러워져 괜한 헛기침을 했다.

“그럼 전 이만 집무실에 가볼게요. 이따 봬요.”

그러고서 나는 대답도 듣지 않고 부서진 나무를 요리조리 피해 집무실이 있는 본부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얌전히 날 따라오던 강아지가 갑자기 코를 씰룩이더니 방향을 틀었다.

“뭐, 뭐야?”

워낙 돌발적인 행동이었기에 반사적으로 걸음이 멈췄다.

녀석은 집무실로 가는 계단과는 반대쪽, 뒷문으로 나가는 길목에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멍!”

“…….”

마치 자기를 따라오라는 듯한 제스처였다.

예전에도 웬 하얀 강아지가 나를 어딘가로 안내해 갔던 적이 있었지.

그때를 생각하면 그리 유쾌한 경험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강아지를 따라 뒷문을 나가보았다.

아무도 없는 건물 뒤편에 서서히 마나가 모여드는 게 느껴졌다.

“아펠?”

내가 왜 그 이름을 불렀는지 당장은 깨닫지 못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지랑이처럼 투명하게 일렁이는 기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얼마 안 가 흙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떠오르며 마나가 점차 짙어졌다.

나는 그제야 내가 왜 아펠을 떠올렸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펠의 마나다.

마법진 위로 서서히 사람의 형상이 갖춰졌다.

현실감 없는 흰 피부 위에 유독 선명한 속눈썹, 마나가 일으킨 바람으로 살랑거리는 은회색 머리칼.

이동을 마친 아펠의 속눈썹이 서서히 움직이며 바다보다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분명 새벽에 본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꿈이라도 꾼 줄 알았어.”

“나중에 보자고 했잖아. 약속 지키러 왔지.”

아펠이 부드럽게 대꾸하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건 그에게서 팔찌를 선물 받은 날, 그와 나눴던 마지막 인사였다.

아니,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지 않던가?

“아, 잠깐만! 여기서 마법을 쓰면 위험하다니까!”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아펠에게 급히 다가갔다. 그러다 돌부리에 걸려 중심을 잃고 엇, 소리를 냈다.

“조심해야지!”

아펠이 내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넘어지는 대신 그의 품에 머리를 박은 나는 아파하거나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그의 소매를 움켜쥐고서 지금껏 쌓아놓았던 질문을 쏟아부었다.

“뭐야, 진짜!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동안 어떻게 지냈고? 마탑 폐쇄시킨 건 너야? 어머니는 어쩌다…….”

“쉿.”

짧은 제스처에 나는 합, 입을 다물었다.

커스터드 검술 대회를 중지시킨 황비의 비보. 그런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꺼낸 건 실수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펠이 내 말을 막은 이유는 그런 게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으니까.

“새벽에 그 소동이 있었으니 어지간한 마나로는 몬스터를 자극시키지 못할 거야. 여차하면 내가 처리할 수 있고.”

“네가 어떻게…….”

기껏해야 내 또래인 애가.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어 반박하려던 나는 중간에 입을 다물었다.

그의 여유로운 태도를 보자 뒤늦게 생각이 난 것이다. 새벽에도 그는 딱히 힘들어하지 않았었다는 게.

그때를 떠올린 내가 차마 제대로 반박하지도 못하고 찜찜하다는 표정을 짓자 아펠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나는 민망해하는 얼굴로 그의 품에서 벗어나 헛기침을 했다.

“큼. 그래, 너 잘났다.”

“미안해, 여러 가지로 놀라게 해서. 어지럽진 않지?”

“…응.”

톡 쏘는 말을 했던 걸 무르고 싶어질 만큼 순수한 사과의 말이 돌아왔다.

괜히 낯이 뜨거워져서 잠깐 우물거리자 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멍!”

그 침묵을 비집고 강아지가 짧게 짖었다.

“쉬잇. 그래, 잘했어.”

아펠이 능숙하게 강아지를 달래며 밀린 질문에 대해 몇 가지 대답을 돌려주었다.

“내 즉위식 얘기는 알고 있었지? 거기 참석한 피오르한테서 네가 기사 수련회에 참여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 김에 얼굴만 좀 보고 가려고 한 거야. 이 녀석이랑 같이.”

아펠이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그 말을 들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새벽에 본 그 늑대가 얘야?”

“맞아. 개과니까 널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데려와 봤어. 덕분에 전투가 한결 쉬워졌지.”

“…….”

진짜? 이 조그만 녀석이 그 늑대라고?

설마 하고 물어본 말에 긍정의 답이 돌아올 줄이야.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는 말을 몸소 체험한 내가 말을 잃은 채 강아지를 내려다보았다.

아펠이 그 녀석을 품에 안고 일어났다.

“머랭이라고 해. 이 녀석도 신수야. 펜리르.”

신수. 신수인가. 그렇겠지. 평범한 강아지는 커졌다 작아졌다 못 하니까.

나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아펠이 한 손으로 강아지, 머랭의 앞발을 꾹꾹 눌렀다. 새하얀 장갑 같은 발에서 뽀얀 발톱이 들락날락했다.

펜리르. 분명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괴물의 이름이었다.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 그 이름을 본 적은 없었지만, 크레페로 살아오면서 얼핏 들은 기억이 있었다.

슈트루델 제국의 건국 신화에 나왔던 것 같은데.

구체적인 내용이 기억날 듯 말 듯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아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기억 안 나?”

“으, 응?”

꼭 독심술이라도 하는 것 같은 질문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이어지는 아펠의 말은 내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전에 마탑에서 본 적 있잖아.”

“마탑에서?”

뭘?

알아듣지 못하고 연신 물음표만 띄우던 내가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아까 이 녀석에게 느꼈던 기시감이 다시금 떠오른 것이다.

나를 디몬에게 안내해 간 하얀 강아지.

“아앗, 그때 그 녀석도 얘야?”

그냥 닮은 강아지구나 생각했던 내가 크게 놀라자 아펠이 큭큭거리며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어쩌다 보니 내가 키우게 됐어. 네 페가수스처럼.”

“그렇구나. 브라우니처럼… 아니, 잠깐. 그건 어떻게 알았어?!”

“태자가 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거든. 머랭이라는 이름도 브라우니에 맞춰서 지은 거야.”

“그, 그래?”

이유야 어찌 됐든 귀엽고 잘 어울리는 이름이긴 했다. 하지만 그런 데에 감탄이나 하고 있기엔 멋쩍었다.

어째 아펠과 재회하고부터는 계속 놀라기만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나?

“아무튼 올라가자. 너도 집무실에 가려는 거지?”

아펠이 머랭을 내려놓고 앞장서서 건물로 들어갔다.

* * *

이 근처에서 작업할 게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인지 본부 건물 안에 다른 사람이 보이진 않았다.

덕분에 부담이 없어진 듯 아펠은 계단을 올라가며 몇 마디 이야기를 더 꺼냈다.

“아침에는 말도 없이 자릴 비워서 미안해. 불안했지?”

“됐어, 당연히 바쁠 텐데. 머랭도 내가 걱정돼서 남겨둔 거잖아.”

“하하.”

반쯤은 추측이었던 말에도 아펠은 부정하지 않았다.

역시 그랬구나. 나는 조금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이다가 잠옷 소매가 살랑거리는 것이 시야에 걸려 슬쩍 손을 내렸다.

아펠은 발을 멈추고 문득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머랭이 왜 그러냐는 듯 그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고 보니 집무실에 동물을 데리고 들어가긴 좀 그렇겠네.”

아펠이 짧게 말하고 머랭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황궁에서 기다리고 있어.”

머랭의 발치에 옅은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곧 모습이 사라졌다.

공간 이동용 포트도 없이 여기서 황궁까지의 거리를 이동시키다니.

새벽에도 놀라고 아까도 놀랐지만, 지금도 여전히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실력이었다.

“아무튼 일이 커졌으니 미리 얘기를 해놓아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아빠를 보러 온 거구나.

내가 뒤늦게 납득하는 사이, 아펠이 옷을 털고 일어나 집무실이라고 적힌 문패 앞에 멈췄다.

“아, 맞다.”

나는 그가 문을 열기 직전,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응?”

“황태자 된 거 축하해. 그리고 구해줘서 고마워.”

아펠이 대답 대신 눈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사람 부끄럽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크레페! 일어났구…….”

아빠가 반갑게 얘기하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어? 그… 저.”

아빠는 눈살을 찌푸렸다가 입을 뻐끔거렸다가 아펠을 쳐다보았다가 날 쳐다보았다가 했다.

짧은 시간에 참 많은 생각이 오간 모양이었다.

쓰러져 있던 딸이 갑자기 외간 남자를 데리고 저를 만나러 왔다니, 만일 내가 아빠 입장이었어도 황당한 상황일 것 같긴 했다.

아니면 황궁에 있어야 할 태자가 별안간 자기 앞에 나타났기 때문일지도?

“아빠?”

“아, 아아.”

마침내 아빠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털고 사람 말을 했다.

“못 보던 분이신데, 지금 도착하셨나요?”

“네. 아펠 슈트루델이라고 합니다.”

“설마!”

아빠가 비명처럼 외마디 말을 남기고 입을 벌렸다.

반응을 보니 아펠과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어도 이름이나 외모의 특징 따위는 들은 적이 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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