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머리 위로 핏물이 후드득 떨어지려던 찰나, 아펠이 한 손을 치켜들었다.
허공에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라 우산처럼 핏물을 막아주었다.
“안 젖었지?”
아펠이 가볍게 내 차림을 훑고는 팔을 내저었다.
공중에 멈춰 있던 핏물이 주변에 흩뿌려지며 흰 늑대의 털에 몇 방울 튀었다.
“금방 끝낼게.”
아펠이 짧게 말하고 늑대의 등을 디딤대 삼아 뛰어올랐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수 미터는 떨어진 곳에 있던 몬스터가 픽픽 쓰러졌다.
몇 사체는 건물 위에 떨어질 뻔했는데, 그것도 아펠이 마법을 쓰거나 늑대를 시켜 낚아채도록 했기에 그에 따른 피해는 없었다.
마법사, 아니 마검사는 저런 일을 할 수 있는 건가?
몽블랑이나 키슈가 싸우는 것도 봤지만 이렇게 어린애 장난 같은 인상은 아니었다.
나는 싱겁다 못해 허탈하기까지 한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주변을 정리한 아펠이 내 표정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가까운 성벽에 봉화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외곽에는 아직 남아 있는 몬스터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아펠도 봉화를 확인하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
“…크레페, 미안. 잠깐만 참아.”
“어? 뭐, 뭘?”
대답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아펠이 막 나타났을 때 이상의 압박감을 느꼈다. 태어나서 처음 공간 이동을 했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마나가 온몸을 뒤집어놓는 기분.
내가 비틀거리자 아펠이 내 머리를 제 품에 기대도록 받쳐주었다. 하지만 어지럼증에 별로 도움이 되진 않았다.
“야아, 나 어지럽…….”
“괜찮아.”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아펠이 주먹을 쥐었다.
주변을 짓누르고 있던 기운이 한순간 흩어졌… 아니, 터지듯 사라졌다.
멀리서 이름 모를 몬스터들의 괴성과 기사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그러나 그나마도 꿈속의 일인 양 아득했다.
나는 술 취한 사람처럼 헤롱거리다가 눈을 꽉 감았다.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크레페?”
“뭐가 괜찮다는 거야아…….”
“자, 잠깐만……!”
아펠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 플럼 바클라와 】
정신을 차리자마자 하품이 쏟아졌다.
창밖으로는 오후의 햇살이 내리쬐었고 코끝을 찌르는 약초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의무실인 것 같았다.
오래 잤나 보다.
대충 그렇게 짐작하고 끙, 소리를 내며 허리를 일으켜 앉았다. 꿈이라도 꾼 듯이 정신이 멍했다.
늑대가 나온 것 같기도 하고, 아펠이 나온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상체를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니, 잠깐. 지금 햇살이나 만끽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카눌레는? 에클레어는 무사한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나는 서둘러 잠옷을 추스르고 침대에서 내려올 생각으로 두 다리를 내렸다.
뭉클.
발바닥에 따끈따끈하고 폭신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깽!”
여우처럼 쨍한 소리를 내며 흰 덩어리가 화들짝 깨어났다.
“가… 강아지?”
환자가 있어야 할 의무실에 웬 짐승이냐.
나는 이 상황이 얼떨떨해 눈을 깜빡거렸다.
힘주어 밟은 것도 아니었는데 저런 격한 반응이라니, 아무래도 이 녀석도 나처럼 잠에 빠져 있던 모양이었다.
내 팔뚝 정도 되는 작은 강아지가 몸을 털고는, 내 냄새를 맡더니 반갑다는 듯 발밑에서 이리저리 꼬리를 흔들었다.
“으음…….”
어딘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건 브라우니가 생각나서 그런 거겠지?
찜찜함을 털어내고 가볍게 결론지은 내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무 올려주세요!”
“하나! 둘!”
의무실 건물을 나온 내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다. 새벽의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변이 온통 아수라장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을 보면 적어도 몇 시간은 족히 지났을 텐데도 사람들은 아직 건물의 잔해를 나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공사판에라도 온 것 같은 분주함이었다.
그들은 모두 바빠서 내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 보였고 나는 잠옷 차림이었던 데다 아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를 불러 세우는 대신 내가 직접 움직이기로 하고 마저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중앙 본부도 그리 멀지 않았으니까.
강아지는 나를 앞서갔다 뒤따라왔다 하며 멋대로 움직였지만 내 곁을 떠나지는 않았다.
“오빠!”
본부가 가까워지니 드디어 아는 얼굴이 보였다.
내가 반갑게 외치자 날 발견하지 못하고 앞서 걷던 카눌레가 나를 돌아보았다.
“괜찮아? 괜찮은 거 맞지?”
나는 카눌레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질문 공세를 쏟아내며 이 잡는 원숭이처럼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언젠가 이런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휴, 다행히 상처가 보이진 않네.
“…만족했냐?”
그는 어깨에 커다란 포대 자루를 짊어지고 있었다.
짐 때문에 내게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한 카눌레가 산발이 된 채로 한마디 했다.
나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짐짓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응?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은.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카눌레가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하지만 나도 지금 막 일어난 참인데 그의 말뜻을 내가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내가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우뚱하자 카눌레가 짧게 대답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빠한테 대충 얘기했어.”
“응? 뭘?”
어깨에 짊어진 자루를 보아 그는 일하는 도중인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걸으며 자세한 사정을 캐물었다.
“뭘 얘기해?”
“어제 몰려온 몬스터들을 없앤 거 너 아냐? 마법으로 했다던데, 마법 쓸 수 있는 거 너밖에 없잖아.”
카눌레는 당연한 말을 했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내가… 내가 마법으로 몬스터들을 몽땅 없앴다고?”
“그럼 아냐?”
“아냐!”
당연히 정답일 줄 알았는지 카눌레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에게 지난 일을 설명해 주는 대신 되물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어?”
아펠이라든지, 은회색 머리에 파란 눈을 한 사람이라든지, 슈트루델 제국의 황태자라든지.
물론 셋 다 동일 인물이었지만 나는 몇 번이고 확인할 생각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없던데… 너랑 에클레어랑 저 녀석밖에.”
카눌레가 드물게 말끝을 흐리며 고갯짓을 했다.
그 방향을 내려다보자 그곳에는 날 따라오던 흰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귀, 귀엽…….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내가 죽인 건 한 마리밖에 없어. 에클레어 언니의 검으로… 아니, 아빠한테 말해야겠다. 집무실에 계시지?”
“네가 검을?”
카눌레가 내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꼬투리를 잡았다.
검술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쉬제트 백작가의 차남이자 나와 15년간 함께 자라며 내 저질 체력을 몸소 느낀 그에게는 그냥 넘어가지 못할 이야기였던 듯했다.
“아니, 검으로 맞선 게 아니라 검을 던졌다고! 내가 순수 검 실력으로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 입장에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진 않겠지 싶을 정도로 자세한 설명이었다.
그러나 카눌레는 납득하지 못한 듯 다시 물었다.
“네 힘으로?”
“마법을 쓰긴 했는데…….”
“그 상황에서 좌표를 계산하고 이중 수식을 썼다고?”
“이중 수식이라고는 해도 흡수진이나 증폭진은 자주 짜봤으니까…….”
“그래서, 그 상황에서 좌표를 계산하고 이중 수식을 썼다고?”
카눌레가 내 말을 끊고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나는 그제야 카눌레가 걸음을 멈춘 것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의 표정을 본 내가 멋쩍은 투로 덧붙였다.
“아니, 아슬아슬하게 암산이 되더라고.”
“…하아.”
카눌레가 말없이 날 보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도, 도와줄까?”
나는 머쓱한 기분으로 그가 어깨에 짊어진 포대 자루에 손을 대려 했다.
카눌레가 거부의 의미로 몸을 홱 돌리고는 다시 발을 옮겼다.
“됐다. 방금까지 기절해 있던 주제에.”
“으응.”
나는 그를 따라 허둥지둥 걸음을 옮겼다.
결국 카눌레도 어제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건가.
하긴 내가 본 걸 그대로 말해 봤자 제대로 믿어줄 사람도 드물 것 같았다.
지금쯤 황태자 즉위식을 하고 있어야 할 아펠이 어떻게 갑자기 이런 데 나타났겠는가.
차라리…….
나는 생각하다 말고 발치의 강아지를 내려다보았다.
차라리 이 녀석이 날 구해줬다고 믿는 게 신빙성 있지.
그러고 보면 새벽에 갑자기 나타났던 늑대도 이 녀석 같은 흰색이었다.
오늘 눈을 뜨자마자 이 녀석을 보고 묘한 기시감을 느꼈던 게 어쩌면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작은 강아지마저 갑자기 수상쩍게 보이기 시작했다.
“크레페!”
에클레어의 목소리였다.
쪼그만 녀석을 쏘아보며 생사람, 아니 생강아지 잡기를 하고 있던 내가 번쩍 고개를 치키고 두리번거리며 그녀의 모습을 찾았다.
“저기 있네.”
카눌레가 어깨에서 흘러내린 자루를 다시 둘러메고 고갯짓을 했다.
에클레어가 산더미처럼 쌓인 폐자재를 넘어 내게 미끄러지듯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괜찮아? 괜찮은 것 맞지?”
“언니야말로 괜찮아?”
후다닥 뛰어온 에클레어가 내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나도 에클레어가 다친 곳이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 피가 났던 머리를 다시 확인하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난 간다.”
카눌레가 우리를 보다 말고 질린 듯한 얼굴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쪽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한참 동안 에클레어의 몸 상태를 보다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멀쩡한 거지?”
“팔팔하지.”
팔팔하다니 다행이긴 했지만, ‘너 땜에 못 살아’가 그녀의 유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직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내가 진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으휴, 맨날 사고나 치고.”
“까분다. 누가 할 말을.”
에클레어가 수박 통 확인하듯 손마디로 내 머리를 콩 때렸다.
그때 다른 쪽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신 겁니까?”
“크렘 님!”
나는 에클레어나 카눌레를 발견했을 때보다도 목소리를 높여 그의 이름을 불렀다. 순수하게 놀랐기 때문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크렘의 눈이 붉은색으로 보여서.
“그럼 난 다시 일하러 가볼게.”
에클레어가 내 어깨를 툭 치고는 멀어졌다.
나는 잘해 보라는 듯한 그녀의 손짓을 애써 무시하고 크렘에게 말을 붙였다.
“무슨 일이에요? 반지는…….”
“들켜서 압수당했어요. 몬스터들이 공격한 게 그것 때문인 것 같다고.”
크렘이 어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