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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78)화 (78/181)

78화 

몬스터의 검은색 발톱에 내 얼굴이 반사된 것이었다.

벌써?

순간 몸이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훅 바람이 끼치며 한 박자 늦게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위험…….

“내가 너 때문에 못 산다!”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내 눈앞을 가로막았다.

“어, 언니?”

에클레어가 여기까지 날 따라온 것이었다.

그녀도 나처럼 마법 물품을 갖고 있었기에 내 속도를 따라올 수 있었던 모양이다.

“뒤로 빠져 있어!”

캉!

에클레어가 검을 빼 들고 내 앞에 있는 몬스터와 대치했다.

“자, 잠깐…….”

나는 싸우러 온 게 아니었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급하게 하늘을 살피자 두 번째 몬스터도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까 전 봐두었던 방향으로 에클레어의 팔을 끌어당겼다.

“언니, 이쪽!”

좁은 골목이 즐비한 곳이었다.

나는 에클레어를 데리고 이리저리로 방향을 틀어, 허물어질 것 같은 건물들 중 그나마 튼튼해 보이는 건물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휴우…….”

“키이익!”

제법 복잡한 길이었으나 몬스터들은 우리를 놓치지 않았다. 여전히 마나의 흐름을 감지하기 때문인 듯했다.

하지만 골목 가운데에 숨은 우리를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다. 틈새가 좁아서 부리나 발톱이 여기까지 닿진 않을 테니까.

“이쪽에 멀쩡한 건물이 많았던 것 같아서 왔어. 내 생각이 맞아서 다행이다.”

내가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오는 길에 있던 허접한 건물들은 이미 몬스터들의 맹공에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물론 이곳의 건물들이 얼마나 튼튼한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여기로 도망 온 것은 반쯤 도박이었다.

만일 이 수가 안 통했다면 꼼짝없이 디몬을 불러 마지막 소원으로 목숨을 구해달라고 징징대야 했겠지.

그런 최후의 보루가 있으니 나도 에라, 모르겠다 하고 모험해 본 거지만.

“좋은 생각이야.”

겨우 한숨 돌렸구나, 하고 안심하던 그때 에클레어가 날 칭찬하는 말을 했다.

내가 이 상황과는 안 맞는 헤벌레한 표정으로 ‘에이, 뭘.’ 같은 소리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흡!”

에클레어가 짧게 기합을 넣고는 갑자기 땅을 박차고 점프했다.

그녀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벽에 살짝 튀어나온 벽돌을 밟고 좁은 골목의 벽을 번갈아 디디며 파쿠르하듯 올라가더니 위층의 창틀을 발판 삼아 도약했다.

그러고서 그녀는 비행 몬스터보다 높이 올라 그 괴물을 위에서부터 검으로 내리찍었다.

…아니, 이런 생각은 아니었는데.

“키에에엑!”

내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에클레어가 몬스터의 날갯죽지에 꽂힌 제 검을 잡고 버텼다.

몬스터는 고통에 겨워 몸부림을 쳐대는 중이었다.

나는 아직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에클레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하고 있는 마법 물품, 그러니까 마구(魔具)는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장비가 아니었다.

착용자의 신체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내 주는 거지.

그 말인즉, 내가 팔찌를 발동시킨다고 에클레어처럼 움직이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와, 저게 사람이냐.

“큭.”

그러나 감탄하고 있을 여유는 많지 않았다.

단순한 기사 지망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한 무위였음에도, 역시 즉사시키는 것까지는 무리였던 것 같았다.

몬스터가 몸을 뒤틀다가 건물에 부딪혔다.

에클레어는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언니!”

나는 골목을 빠져나가 에클레어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의 머리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에클레어는 나를 발견하고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가 뭐라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너 땜에 못 살아…….”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

아니, 이런 게 유언이면 가만 안 둘 거야!

에클레어는 충격으로 기절한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심장이 뛰는 것을 확인한 후 급히 상황 판단에 들어갔다.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야 하나? 하지만 시간이 없어!

에클레어와 함께 떨어진 그녀의 검을 집어 들었다.

다행히 몬스터는 언니에게 당한 상처에 이어 건물에 몸통 박치기까지 한 덕분에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

나는 검을 들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팔다리는 무거웠고 팔찌 때문에 언제 기절할지도 확실치 않았으나 자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키이!”

대미지 하나 안 입은 멀쩡한 녀석이 한 마리 더 나타났으니까.

피이익―

어딘가에서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눈치를 보니 공중에 떠 있는 몬스터가 곧 공격해 오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검 자루를 쥔 손에 식은땀이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정면으로 대치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녀석이 바로 앞에서 날개만 퍼덕여도, 나는 거기에 맞아 아예 날아가 버릴 것이 뻔했다.

검술로는 승산이 없다.

그렇게 확신한 나는 팔찌를 감싸 쥐었다.

흡수진에 증폭진을 덧그리는 수식.

팔찌에 새진 마법진을 바탕으로 한 것이긴 하지만 이중진도 이중 수식도 실전으로 써보긴 처음이었다.

하지만 언니를 두고 도망치느니, 당장 공격하고 기절하는 게 낫지.

나는 검을 한 손으로 들고 내 팔 근육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뒤로 당겼다.

공중에 떠 있던 몬스터가 내 쪽으로 방향을 틀고는 내리꽂히듯 날아왔다.

에클레어 같은 묘기는 못 부려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나는 이를 악물고 팔을 한 번에 뻗었다.

거대한 다트가 된 검이 그대로 내게 쇄도하는 몬스터의 몸통에 박혔다.

“끼에에엑!”

철검을 튕겨내는 발톱을 가졌어도 몸통은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녀석이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내지르며 날개를 퍼덕거리다가 이미 부상을 입은 녀석과 부딪쳐 주변의 건물을 크게 흔들었다.

“끙!”

겨우 만들어낸 기회였다.

나는 기절한 에클레어를 골목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으악!”

몸부림치던 몬스터가 이쪽 건물에까지 충격을 주고 있었다.

‘그나마 튼튼해 보였다’ 했던 내 평가가 무색하게도, 내가 숨은 골목 옆의 건물이 쿠르릉 소리를 냈다.

진짜 무너지면 잔해에 깔려 압사할지도.

물론 그렇다고 골목을 나갈 수는 없었다.

이제 내게는 아무런 무기도 없었고, 골목 밖에는 아직 내게 적대감을 보이는 괴물이 두 마리나 있었으니까.

나는 낑낑거리며 골목의 반대쪽 출구로 에클레어를 끌고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세 번째 괴물을 마주했다.

“얜 또 언제 왔어!”

에클레어만큼이나 긴장감 없는 마지막 말이 터져 나왔다.

뒤이어 몬스터의 거대한 발톱이 날 움켜잡으려 한 그때였다.

별안간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나타나 눈앞에 있는 몬스터의 날개를 물어뜯었다.

“어… 어라?”

그건 호랑이만 한 흰 늑대였다.

언뜻 몬스터들 간의 싸움으로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늑대는 그리 위협적인 ‘몬스터’처럼 보이지 않았다.

입가에 피를 묻힌 거대한 늑대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우스운 말이긴 하지만.

“크릉!”

흰 늑대는 그 덩치만큼 굵은 목소리로 그르렁거리고는 혀로 입가에 묻은 피를 핥았다.

굳이 두 번, 세 번 달려들 필요 없이 반인반조의 괴물은 이미 치사 상태에 빠진 듯했다.

빠직!

그때 내 옆에 있던 건물이 굉음을 내며 흔들렸다.

곧 내가 대응하기도 전에 건물의 골조가 드러나며 벽돌 한 무더기가 날 향해 쏟아졌다.

“디, 디…….”

램프의 요정을 찾는 알라딘처럼 디몬의 이름을 부르려 한 그때였다.

압도적이면서도 거대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내 주변을, 아니 이 요새를 가득 메울 수 있을 만큼 묵직한 마나였다.

갑작스러운 기운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턱 숨이 막혔다.

내 위로 쏟아질 것 같았던 벽돌이 웬 투명한 막에 부딪힌 듯 사선으로 미끄러졌다.

찰나의 시간, 마법진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얼빠진 얼굴로 가만히 손을 들어보았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손끝에 벽 같은 것이 느껴졌다.

뭐지? 이 느낌은……. 아냐, 설마. 그럴 리가.

혼란스러운 와중,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제 일을 마친 흰 늑대가 그의 발치로 다가가 섰다.

나는 고개를 들고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은회색 머리칼과 바다보다 파란 눈동자. 밤에 만나는 것이 누구보다 익숙한 사람.

“크레페, 오랜만이야.”

아펠이었다.

“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얼떨한 와중에 참지 못한 질문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아펠은 피식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다친 데는 없어?”

“응, 나는…….”

부상을 묻는 말에 나도 모르게 아래에 쓰러진 에클레어를 쳐다보았다.

아펠이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리더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에클레어에게 치유 마법을 써주었다.

그녀의 머리에 나 있던 상처가 사라지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수식을 계산하고 마법 물품, 도구 따위를 준비하는 어떤 사전 작업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입을 뻐끔거리는 동안 아펠은 땅에서 동전이라도 주운 사람처럼 태연히 옷을 털고 일어났다.

그때 근방에 있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사납게 울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펠, 위험해! 여기 몬스터들, 마나를 감지한댔어!”

나는 금방 사태를 파악했다.

마법 물품을 쓰는 것만으로도 어그로가 끌리는 몬스터들인데 그 앞에서 아예 ‘마법’을, 그것도 이렇게 거하게 써버렸으니 놈들이 모두 이곳을 노리고 몰려올 게 뻔했다.

“이상한 타이밍에 왔네. 잠깐만 기다려.”

그러나 아펠은 여전히 느긋한 태도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새 이쪽으로 오고 있는 몬스터는 무려 세 마리나 됐다. 그것도 변방의 기사들이 애먹을 정도의 거대 비행 몬스터.

“아펠, 일단 피하자.”

나는 그나마 안전해 보이는 골목으로 에클레어를 옮겨놓은 후 아펠의 팔을 끌고 그쪽으로 같이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아펠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말했다.

“난 괜찮아. 피가 튀는 건 싫지만.”

그가 어린애 같은 투정을 덧붙이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 들었다.

보석 장식을 보니 전투용이 아니라 장식용이나 제례용 검인 것 같았다.

그러나 아펠은 그것을 사용하는 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머랭.”

아펠의 곁에 있던 거대한 늑대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나는 그 위용에 놀라서 아펠의 팔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아펠이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 밑에는 하나둘 마법진이 떠올랐고, 늑대는 허공에 발판이 있는 것처럼 달려 몬스터의 발을 입에 물었다.

“키이이익!”

몬스터가 괴성을 질렀다.

뒤이어 내 옆에 선 아펠이 검을 횡으로 그었다.

검날이 닿은 것도 아니건만, 내 눈앞에 몬스터의 발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으, 으아아…….”

엄청 큰 닭발.

현실감이 없어서 제대로 된 비명도 안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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