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하지만 토벌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습격이라니! 이건 분명 저주 때문이에요!”
“맞아! 악마는 나가!”
“나가라!”
불온한 흐름은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고 있었다.
내가 반응도 하지 못하던 사이, 카눌레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뭐라고?”
“카눌레, 잠깐…….”
에클레어가 갑자기 쉿, 소리를 내며 검지를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아무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크렘이 현기증이라도 난 듯 인상을 찌푸리며 비틀거렸다.
옆에 있던 내가 그의 몸이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었다. 크렘은 내 손길을 뿌리치는 대신 눈을 꽉 감아버렸다.
이게 무슨 개판이야!
“진정하세요!”
내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사람들이 짠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내 카리스마가 빛을 발휘한 게 분명했다…는 식의 전개는 아니었다.
콰직!
“꺄아아악!”
침묵도 잠시, 구석에서부터 공포와 비명이 번지기 시작했다.
건물의 지붕이 통째로 흔들리더니, 곧 거대한 새의 발톱이 벽을 파고들어 왔다.
“몬스터야!”
“다들 나가요!”
에클레어가 다급히 사람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들은 방금까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냐는 듯 피난소 밖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고, 공포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카눌레가 둘러메다시피 데리고 나갔다.
“나가라고!”
짜증 섞인 호통을 내지른 카눌레가 웬 꼬마의 엉덩이를 걷어찬 것을 마지막으로 피난소가 텅 비었다.
나와 크렘만 빼고.
크렘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진작 내게서 떨어져 족히 오 미터는 달아나 있었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핏기가 가셔 머리카락만큼 하얬고 손도 차가웠다.
모닥불이 타는 듯한 밝은 빨강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우리도 가요.”
“…….”
말을 걸며 그의 팔뚝을 당겼지만 크렘의 시선은 여전히 벽에 못 박힌 채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벽을 뚫고 들어온 몬스터의 발톱에.
덜컥, 우지끈!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건물이 통째로 흔들렸다. 더 이상 구경이나 하고 있을 때는 아닌 것 같았다.
“나가자니까요!”
내가 다시 큰 소리를 치자 크렘이 그제야 나를 마주 보고는 곧바로 내 팔을 뿌리쳤다.
저를 잡고 있는 게 나라는 것을 깨닫자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인 것 같았다.
“아, 죄, 죄송…….”
아니나 다를까, 그가 자신의 행동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지금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발끈해서 크렘의 멱살을 쥐었다.
“기사 될 거라면서요! 욕한 사람들은 빼고 지킬 거예요?!”
나는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크렘의 팔을 끌고 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의 시선보다는 우리 목숨이 더 중요했으니까.
스펙터클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리가 나가자마자 피난소의 지붕이 폭삭 가라앉았다.
“너희 둘 다 괜찮…….”
“끼이이익!”
“키이익!”
에클레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묵직한 풍압과 찢어질 듯한 괴성이 허공을 갈랐다.
별이 떠 있는 하늘 아래, 별빛을 가렸다 말았다 하는 거대한 그림자.
그것이 날개를 펄럭이며 성곽에 앉았을 때, 나는 그제야 그것의 생김새를 볼 수 있었다.
성인만 한 몸통에 달린 새의 날개. 본 적이 있는, 반인반조의 괴물.
왜 갑자기 루아 요새에서의 일이 꿈에 나왔는지 궁금해할 것도 없었다.
낮에 나타났던 것도 이 녀석이었나 보구나.
“비행 몬스터 발견! 전 지역 경계경보 발령! 봉화 올려주십시오!”
멀리서 기사의 목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크레페! 괜찮아?”
내 기색이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에클레어가 다시 물었다.
“으, 응! 나는 괜찮아.”
“근처에 다른 피난소는 없습니까?”
카눌레가 가까이 있던 사람에게 답을 구했다.
그러나 질문하기에 그리 좋은 상대는 아니었다.
나는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급식소에서 마주쳤던, 잭이라는 남자였다.
“몬스터를 부른 주인공께서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아직도 그 소리야?!”
에클레어가 바락 소리를 지르며 잭의 멱살이라도 틀어쥘 듯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가 다가가는 것보다 먼저 잭의 옆에 있던 여자가 그에게 따귀를 날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에클레어가 걸음을 멈췄다.
“우릴 구해준 것도 귀족이었어! 잊은 건 아니겠지, 잭?”
“…….”
여자가 살벌하게 말했다. 잭은 뭐라 말하려다 말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뭔가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
“저…….”
크렘의 목소리였다.
“앗, 죄송합니다.”
나는 내 손이 아직 크렘의 팔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손을 놓았다. 카눌레의 것처럼 빨갛던 눈동자가 다시 갈색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주변이 어두워서 그런지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쪽에서 일어났다.
“끄악! 한 마리 더 늘었잖아! 역시 네가 원인이냐?!”
“난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
에클레어가 느닷없이 카눌레에게 따져 물었다.
평상시처럼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니 위기감이 희석되는 듯했다.
아마 에클레어도 진심으로 카눌레를 탓하려는 게 아니라 그런 식으로 긴장을 풀려는 것 같았다.
“야, 여기 보잖아! 다시 공격하려는 거 아냐? 너 혹시 마법 물품이라도 썼어?”
“아니, 나는…….”
아.
에클레어의 다그침에 나는 아까 전에 들었던 아빠의 말을 떠올렸다.
‘특히 마법 물품을 켜는 것, 아니 끄는 것도 엄금입니다!’
그 순간 정신이 들었다. 크렘의 반지도 분명 마법 물품이었다. 그렇다는 건…….
“으아악, 온다!”
나 때문이잖아!
“꺄아악!”
이제 와서 깨달아봤자 늦었다.
몬스터 한 마리가 저공비행하듯 우리 머리 위를 스치고 날아갔다. 사람들은 이미 아비규환이었다.
그 모습을 본 에클레어가 결연한 얼굴로 검을 빼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어. 너희들이 사람들을 대피시켜. 그동안 내가…….”
에클레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몬스터가 방향을 틀어 다시 이쪽으로 돌진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젠장!”
카눌레가 욕설을 지껄이며 검을 빼 들었다.
아빠에게서 받은 그의 검에선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마나의 흐름이고 뭐고 당장의 위기를 넘기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키이익.”
몬스터가 발톱을 세우며 달려들었다.
카눌레는 그것과 짧게 대치했고, 몬스터는 마법 검을 발로 움켜쥐더니 놀란 듯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에클레어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야! 내가 막는댔잖아, 빨리 불 꺼! 마나 흐름에 민감하다는 얘기 못 들었어?”
“난 구경이나 하러 온 게 아니라고! 어차피 너도 마법 아이템 쓸 거잖아!”
“쳇.”
에클레어가 차마 아니란 말은 못 하고 혀를 차더니, 제대로 싸우려는 듯 소맷단에 묶인 끈을 꽉 당겨 조였다.
그 틈에 두 번째 몬스터가 이쪽으로 날아들었다.
“으아아악!”
이번 목표는 민간인이었다. 몬스터는 양을 사냥하는 매처럼 발톱으로 사람을 움켜잡았다.
“푸딩!”
피이익―
내가 말리기도 전에 에클레어가 뛰쳐나갔다. 속도를 보니 이미 마법 물품을 발동 중인 것 같았다.
그녀의 애완 매인 푸딩이 몬스터의 시야를 방해했고, 바닥으로 추락할 뻔한 남자를 에클레어가 구해냈다.
“으, 으으윽.”
“정신 차려요!”
“키에엑!”
몬스터가 분노한 듯 날개를 퍼덕거렸다.
그 앞을 막아선 건 카눌레였다.
“다들 성곽으로 가세요! 기사가 많으니 건물보단 안전할 겁니다!”
“들으셨죠?”
에클레어가 사람들의 등을 떠밀고 검을 꺼내 자세를 잡았다.
아무래도 지금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은 건 나 혼자뿐인가 보다.
“둘 다 본인 몸이나 좀 챙기란 말야!”
“크레페, 너도 사람들이랑 같이 가 있어. 여긴 위험하니까.”
카눌레는 내 말을 듣는 척도 안 하고 침착하게 검을 치켜들었다. 그늘진 동공에 마법 검의 화염이 일렁거렸다.
나는 초조하게 고개를 쳐들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깜빡였다.
내가 저것들을 본 건, 루아 요새에서 엄마가 위험에 처했을 때였다.
그 당시 나는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고, 몽블랑은 결국 날 구하다가 큰 상처를 입었다.
마르크도 고전했을 정도의 몬스터였다.
기사 수련생도 아닌 일개 학생들이 저것과 맞서는 건 자살행위나 다를 바 없었다.
“네 마리나 되잖아! 일단 다 같이 외곽으로 가자. 다른 기사님들도 많이 계시니까…….”
“우리가 가는 동안 몬스터는 놀겠냐?”
카눌레의 말은 틀린 점이 없었다.
아직 이쪽에 병력이 오지도 않은 것을 보면 방벽 너머에 있는 몬스터도 한둘이 아닌 듯했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꼭 저런 식으로 말해야 해?
대거리하고 싶은 충동이 울컥 올라왔다.
챙!
“큭.”
카눌레가 몬스터와 마주 댄 검을 꽉 쥐었다. 그의 검을 휘감은 불길이 한층 거세졌다.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겨우 억누르고, 대신 지난 일을 떠올려보았다.
루아 요새 땐 내가 어떻게 했더라…….
얼마 지나지 않아 카눌레의 근처에 있던 다른 몬스터들까지 그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카눌레의 등에 다른 몬스터의 공격이 들어가려던 그때, 나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떠올렸다.
“으, 난 몰라!”
나는 이를 악물고 내 팔찌를 발동시켰다.
마나의 흐름이 변화한 것을 감지한 몬스터 몇 마리가 방향을 바꾸어 내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크레페!”
뒤에서 에클레어가 내 이름을 외쳤다.
신경 쓸 정신은 없었고, 나는 곧바로 멀리 달음박질했다.
필살 어그로 끌기!
십 년 가까이 된 일인데, 어째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 것 같아서 서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때보다 상황이 나았다. 적어도 지금 나는 마법의 힘을 빌릴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합리화인지 정신 승리인지, 아무튼 나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아무리 팔찌를 발동시켰다고는 해도 왕복 반나절에 달하는 행군에 이어 이 정도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니, 스스로가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으앗!”
쎄한 기분에 뒤를 곁눈질하자 몬스터가 기다렸다는 듯 발톱을 움켜쥐었다.
내가 헉 하고 허리를 숙여 피했기에 다행히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헛발질을 한 몬스터는 제 몸뚱이를 제어하지 못하고 다시 공중으로 높이 날아올랐다. 추측하건대 내가 쪼그마한 덕분에 낚아채기 어려운 것 같았다.
키가 작다는 게 이렇게 뿌듯할 줄이야.
어딘지 슬픈 기쁨을 느끼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내가 모르는 곳이었으나 적어도 행군을 나섰던 제1성곽과는 가까워져 있었다.
그래, 저쪽이라면!
계산을 마치고 방향을 튼 그때였다.
갑자기 검은 거울에 비친 듯한 내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