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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76)화 (76/181)
  • 76화 

    나는 카눌레가 대거리라도 하기 전에 그를 진정시킬 생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다행히 그도 말씨름을 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쯧.”

    카눌레가 작게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렸다.

    남자를 말리던 여자가 거듭 허리를 숙여 사죄하고는 남자의 팔을 끌고 급식소를 나갔다.

    그러자 몇 명 남아 있던 주민들도 이 숨 막히는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허겁지겁 남은 스튜를 마시고는 그들을 뒤따랐다.

    “괜찮아, 오빠?”

    “뭐가?”

    “뭐긴…….”

    카눌레는 내 생각보다 침착해 보였다.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가 담담히 덧붙였다.

    “어제 아빠랑 얘기하면서 벌써 들었어, 내 눈 색깔이 여기서 별로 평판이 안 좋다는 얘기. 그러면서 나한테 오늘 재건 임무에 동행해도 괜찮겠냐고 물어보시더라.”

    “…….”

    어제 나와 대화를 끝낸 아빠가 카눌레에게도 가볼 거라는 얘긴 했지만 그런 이야기가 오갔을 줄은 몰랐다.

    나는 괜한 첨언을 하는 대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카눌레가 아빠의 말에 어떻게 답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는 알 수 있었다.

    오늘 카눌레는 우리와 함께 갔었으니까.

    “뭘 봐? 가서 맘마나 먹어.”

    카눌레가 휑하니 나를 앞질러 가더니 먼저 식판을 들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분위기 깨는 데엔 일가견이 있다니까.”

    오빠는 정말 멋진 기사가 될 거야.

    【 소란스러운 밤 】

    쉬익―

    머리 위에 그림자가 지며 묵직한 풍압이 느껴졌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 몬스터의 울음소리와 함께 누군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어린아이였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이 상황에 왠지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엄마와 함께 갔던 루아 요새에서 겪은 일이었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의 악역이던 몽블랑이, 어째서인지 날 구해준 그때.

    하지만 그 기억과 달리 이번에 나를 껴안은 사람은 그가 아니라 엄마였다.

    여기서 엄마가 죽을지도 몰라.

    앞뒤 없이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쳤다.

    나는 그 순간을 위해 수백, 수천 번 훈련했던 사람처럼 엄마의 팔을 뿌리치고 두 팔을 뻗었다.

    내 손끝에서부터 화려한 마법진이 피어났다.

    그것은 안개를 물들이는 불꽃처럼 스파크를 튀기다가 이내 복잡한 수식을 만들었다.

    그리고 몬스터가 내 눈앞에 닥친 그 순간, 마법진을 이룬 수식의 중앙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아니, 잠깐. 그게 말이 되나? 난 저렇게 화려한 마법 못 쓰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눈이 뜨였다. 아무래도 꿈을 꾼 것 같았다.

    “개꿈인가…….”

    역시 오늘 너무 무리한 게 분명했다. 아니면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 거라든가.

    나는 도로 눈을 감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근육이 오그라드는 느낌에 저절로 끙 소리가 나왔다.

    순찰이라는 말만 듣고 산책 같은 기분으로 출발한 스스로에게 멱살을 틀어쥐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침대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 이 방송을 듣고 계신 분들은 제3성곽으로 집합해 주십시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눈이 떠진 건 단순한 꿈자리 때문만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

    쾅쾅!

    “크레페! 일어나!”

    “어, 일어났어!”

    에클레어가 방문을 두드렸다. 내가 있는 한층 위까지 데리러 와준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서 거의 굴러떨어지듯 내려가 다급히 문을 열었다.

    에클레어는 잠옷 대신 편한 일상복처럼 생긴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팔에는 토시를, 허리에는 검을 갖춘 걸 보니 오늘 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에 미리 대비를 한 듯 보였다.

    물론 나는 그냥 파자마 차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거의 흉악범처럼 끌고 내려갔다.

    계단이 가팔라 내려갈 때마다 발바닥이 아프긴 했지만 그런 걸 걸고넘어질 상황은 아니었다.

    “제3성곽이랬지?”

    에클레어가 풀어놓은 듯한 푸딩이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응, 아마 저쪽일 거야!”

    푸딩이 내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낮게 비행했다.

    “가자.”

    에클레어가 잰걸음으로 앞장섰다.

    곧 붉은 탑 쪽에서 카눌레와 크렘이 나타나 합류했다.

    “많이 위험한 걸까요?”

    크렘은 조금 긴장한 듯 굳은 얼굴로 물었다.

    나도 충분히 이해 가고도 남는 반응이었다. 방송을 따라 제3성곽으로 가는 사람들이 우리 말고도 많았기 때문이다.

    일부는 무장을 갖춘 기사였고, 일부는 꾀죄죄한 차림의 민간인이었다.

    그들의 표정에 긴장감과 공포심 따위가 섞여 있는 걸 보니 나까지 덩달아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라니, 내가 딱히 방향을 알려줄 필요도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가보면 알겠지.”

    에클레어가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수다나 떨고 있을 거야?”

    카눌레가 검을 채운 혁대를 가다듬으며 받아쳤다.

    * * *

    이곳 슈트루델 제국 최북단에 있는 중앙 요새는, 요새라 불리긴 하지만 그 규모는 성채에 가까웠다.

    단순히 방벽으로 둘러싸인 구역이 아니라 어느 정도 마을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었다.

    몬스터들의 위협이 잦아서인지 민간인이 그리 많이 사는 것 같진 않았지만.

    어쨌든, 이곳이 제법 넓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요새의 전부를 둘러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이쪽 길은 아예 처음 오는 방향이었는데, 나는 기사들을 따라 외곽으로 나갈수록 변방의 환경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열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나마 막사는 제대로 된 보루 같았던 데 반해 외곽의 건물은 폐허 같았다.

    천이나 판자로 수리해 놓은 곳들은 군데군데 허물어져 사람이 살 수 없을 것처럼 보였고, 임시로 지어놓은 듯한 목조 건물에서는 피죽도 못 얻어먹은 듯한 민간인이 벽에 기대어 웅크려 떨고 있었다.

    그들은 피난 경보가 울렸는데도 제대로 몸을 숨길 생각도 없는 듯했다.

    일렁거리는 모닥불의 빛 때문에 그 광경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너희는 이쪽이 아니야.”

    “캑!”

    누군가 내 뒷덜미를 잡아챘다. 갑작스레 목이 졸려 괴상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쿨럭, 아빠?”

    “백작님, 지시를 부탁드립니다!”

    에클레어가 빠릿하게 섰다.

    우리와 섞여 성곽으로 향하고 있던 기사들도 자세를 바로 하고 멈췄다.

    “1군은 이동, 2군과 3군은 활을 준비한다. 각자 위치로!”

    지휘관인 아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자다 나온 듯 부스스하게 뻗친 머리카락 때문에 그들의 행색은 다소 보잘것없어 보였으나 어스름한 달빛에도 그들의 검과 갑옷만은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저희는 뭘 하면 됩니까?”

    카눌레가 끼어들었다. 나도 잠옷 차림이었지만 재빨리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아빠는 짧게 고개를 젓고 말했다.

    “여러분이 가야 할 곳은 성곽이 아니라 피난소입니다.”

    “저희도 기사 지망생입니다. 희망자는 돕게 해주십시오.”

    “마법 물품을 쓰면 문제없을 거예요. 아니면 민간인 대피라도…….”

    에클레어까지 카눌레를 거들고 나섰다. 하지만 아빠는 여전히 단호했다.

    “몇 번이나 말했듯이 마구(魔具)의 사용은 엄금합니다. 마법을 쓰는 몬스터는 마나 흐름에 민감해 이곳에 몰려올 가능성이 있어요.”

    “…….”

    쿠릉.

    에클레어와 카눌레가 잠시 말을 잃은 틈을 타 뭔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주변이 어두웠기에 그쪽의 상황을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지금 상황이 그리 안전하지 않다는 건 분명했다.

    카눌레가 금방이라도 그 소리를 쫓아 달릴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빠가 그 마음을 읽어낸 것처럼 카눌레의 어깨를 잡았다.

    “상황이 급박하니 확실히 해두겠습니다. 절대,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특히 마법 물품을 켜는 것, 아니 끄는 것도 엄금입니다! 아무쪼록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주시길.”

    “…예.”

    결국 카눌레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그 반응을 보자마자 남은 기사들과 함께 전방으로 달려 나갔다.

    “크흠,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말자. 여기 분들 다 베테랑이시잖아.”

    나는 눈치를 보다가 그렇게 운을 뗐다.

    카눌레는 어지간히 분하다는 듯 이를 악물고 있었다.

    반면 크렘은 여전히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괜찮을 거라며 짧게 덧붙이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오면서 민간인이 들어간 건물을 봤기 때문이다.

    목조로 보수된 가건물. 분명 그게 피난소겠지.

    다행히 카눌레도 에클레어도 대놓고 명령에 거스를 생각은 없어 보였다.

    각자 편한 차림 위에 보호구나 검을 챙긴 걸 보니 직접 몬스터들과 전투할 각오로 나온 것 같긴 했지만.

    진짜 쌩 잠옷 차림으로 나온 건 나뿐인가.

    역시 기사 지망생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문득 크렘을 돌아보았는데…….

    “크렘 님은 아무것도 안 챙겨 오셨나요?”

    “…네. 상황이 급박해 보여 차마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다.

    조금 민망한 기분으로 피난소 문을 열었다.

    격벽 하나 없는 공간은 마치 체육관처럼 넓었으나 사람이 많아서 그 넓이가 제대로 체감되지는 않았다.

    당연히 안에 있던 이들은 전원 민간인인 듯했다.

    낮에 우리와 동행해 온 사람, 급식소에서 마주친 사람뿐 아니라 원래 요새 근처에서 지내던 사람도 포함된 듯 제법 인원수가 됐다.

    귀족으로 태어난 이래 이렇게 많은 평민들과 한자리에 있기는 처음이었기에 조금 몸이 굳었다. 물론 그들 역시 우리에게 적잖은 경계심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벌어져 있는 거리나, 우리의 얼굴과 옷차림을 살피는 시선만 봐도.

    그리고 나는 문득, 그 시선의 대부분이 카눌레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악마의 눈이다!”

    폭풍 전야 같던 적막 끝에 누군가 외쳤다.

    “저놈이 괴물들을 불러들인 거야!”

    식당에서 들었던 것과 맥락은 동일했으나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물론 분위기도 훨씬 험악했다.

    이건 한두 명의 불평이 아니었다. 불안과 공포가 도화선이 되어 조금씩 웅성거림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크레페.”

    에클레어가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고는 나를 자신의 몸 뒤에 숨겼다.

    그러나 시비를 걸어온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카눌레와 직접 싸우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내가 보기에도 겁에 질려 있었고, 손에 검은커녕 날붙이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만하시오! 저분이 어떤 분일 줄 알고.”

    중후한 목소리가 과열되는 분위기를 진정시키려 나섰다.

    역시나 사람들은 그 제지에 못 이기는 척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적대적인 태도는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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